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95화 (9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95화>

96. 지금은 어때요?

*   *   *

“준위 씨! 회의 자료 준비됐지?”

가공식품 팀이 분주하게 회의를 준비했다.

회의 자료 준비는 팀의 막내의 김준위의 몫.

나는 자리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변해 있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거침없던 행동과 발언들이 사라지고, 평범한 어느새 회사원이 되어 버렸다.

마치, 시키는 일만 하겠다는 사람처럼.

“준위야, 이거 복사 좀 해 줘!”

“네!”

“준위 씨! 팩스 보냈어?”

“금방 보내겠습니다.”

“준위 씨! 회의 자료 3페이지에 수식 또 틀렸잖아.”

“수정해서 출력하겠습니다!”

분주한 그를 부르는 가공식품 팀원들.

김태하 팀장은 책상 앞에 서서 그들을 보다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뭐, 할 말 있어?”

내 시선을 느꼈었나 보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양팔을 벌려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의 담배를 확인하고 옥상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혁진아! 음료 샘플 나온 거 팀원들 시음 돌렸어?”

“금방 하겠습니다.”

“그거 내가 12시까지 하라고 했잖아!”

“아……. 네네.”

“뭐 해? 빨리 안 하고!”

음료 팀의 강성준 대리와 김혁진 인턴.

형 동생처럼 꽤 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둘의 관계는 예전만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무언가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김혁진.

인턴들의 리더로 알고 있었는데, 당당하던 모습이 지워져 있었다.

김혁진이 자신의 자리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사이, 강성준 대리는 나를 보고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요새 바쁘지?”

“괜찮습니다.”

내 질문에, 강성준 대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옥상 올라가?”

“네.”

“그럼 같이 갈까?”

“아……. 네네.”

나는 강성준 대리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나의 무관심이 아닌, 윗사람을 어렵게 생각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꺼내자, 강성준 대리가 한 손으로 라이터의 불을 켜고, 다른 한 손으로 그 밑을 받치며 불을 들이밀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나도 있어.”

강성준 대리는 대충 이런 스타일이다.

이런 행동이 정말 상사를 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난간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 선영 차장님이랑 PB 들어갈 음료 준비한다면서?”

장선영 차장이 메인이 되어서 준비하는 PB음료.

강성준 대리가 프로젝트의 막내로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 네네.”

“할 만해?”

“네.”

강성준 대리는 잔뜩 얼어 있었다.

나는 그의 등을 툭 치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음료 팀 직원 맨날 야근이던데. PB 때문 아니야?”

“아닙니다.”

“요즘 혁진 씨는 좀 어때?”

“인턴이요?”

강성준 대리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부서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막내의 근황을 묻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응, 김혁진 씨.”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혼을 낸 거야?”

강성준 대리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변명하듯 재빠르게 답했다.

“다 좋은데, 가끔 깜빡하는 게 좀 있어서…….”

“사람이 다 똑같지 뭐.”

“…….”

“잘하는 걸 찾아줘야 하는데. 시음 음료 돌리는 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 성준 대리도 나랑 같은 생각이지?”

“……!”

시음 음료의 평가를 받는 것은 프로젝트의 막내인 강성준 대리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밑에 인턴에게 그 업무를 지시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김혁진과 나누지 않을 것이면서 말이다.

나는 이를 돌려서 말한 것이었고, 강성준 대리는 내 뜻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래. 나는 혁진 씨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찾아주는 것이 성준 대리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네.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처음 인턴들을 뽑을 때, 좀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 들을 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복사, 팩스, 전산 입력, 파쇄 등등.

그들은 우리의 업무 보조만 하기에 바빴다.

나는 담배를 끄고, 강성준 대리에게 다시 말했다.

“언제 성준 대리하고도 한잔해야 하는데.”

“네? 아……. 네네.”

“그래. 나 먼저 내려갈게.”

나는 어정쩡한 자세를 한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사무실로 내려왔다.

*   *   *

- 이따 3시에 인턴들 회의합니다.

팀장들을 초대한 사내 메신저의 대화방.

내 말에 놀란 팀장들이 물었다.

- 인턴들만요?

- 네. 인턴들만 회의실로 보내 주세요.

-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 아니요. 그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아서 특별히 숙제를 좀 나눠 줄까 합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정진택 팀장을 질문에 답을 하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나는 회의에서 할 말들을 천천히 노트에 적었다.

가공, 신선, 음료, 특판, 펫.

오후 3시.

펫 팀의 이안나, 구석호, 박기현, 특판팀의 김미나, 김현희, 음료팀의 김혁진, 가공식품팀의 김준위, 신선식품팀의 최기연.

푸드 커머스 사업부의 인턴 여덟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이죠?”

내가 입술을 떼자, 인턴들은 잔뜩 군기가 들어간 표정으로 각을 잡고 앉았다.

“왜들 그래요?”

“…….”

아무런 답이 없는 인턴들.

말 잘하던 김준위까지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구나.

잠시 윗사람들의 사내 정치 놀이나 하는 동안, 꿈 많던 이들이 이렇게 물들어 버렸구나.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재미없죠?”

“…….”

“하루에 자는 시간을 빼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을 겁니다. 근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가 재미없으면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일주일에 이틀뿐인 휴일을 즐긴다라……. 내 상식에서는 너무 불공평한 것 같은데?”

내 말이 끝나자, 김준위가 살짝 고개를 들며 답했다.

“맞습니다.”

“처음 마프에 지원했을 때는 다들 꿈이 있었겠죠. 지금은 어때요?”

“…….”

나는 노트 사이에 껴두었던 하얀 봉투들을 꺼냈다.

그리고 인턴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고, 봉투를 펼쳐 보라는 손짓을 했다.

봉투를 열어 보는 인턴들.

그들은 내가 적은 메모를 보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가장 먼저 질문을 한 것은 김혁진이었다.

“부장님. 이건…….”

“맞아. 메모에 적힌 첫 페이지는 내일까지 여러분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오늘 아니면 내일 그들을 만나세요.”

“…….”

“그리고 만나서 뭘 해야 할지도 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을 겁니다.”

특판팀의 김미나가 손을 살짝 들었다.

“네, 미나 씨.”

내가 지목을 하자, 그녀는 자신이 받은 메모를 내게 보이며 물었다.

“삼호는 유 과장님이랑 친합니다.”

“근데?”

“삼호에 PB를 제안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유 과장님이 좋지 않을까요?”

“아니. 난 미나 씨가 더 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저, 부장님!”

이번엔 신선식품의 최기연이 질문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농사를 짓다가 올라온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인턴이다.

“네, 기연 씨.”

“딜라이트는 가공식품 팀의 벤더 아닌가요?”

“맞아요.”

“그럼 제가 아니라 가공식품 팀에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공식품 벤더들도 만나면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더덕구이는…….”

말끝을 흐리는 최기연.

내가 그에게 준 미션은 딜라이트에서 유통하는 더덕구이의 더덕을 수입이 아닌 국내산으로 바꿔 보라는 것이다.

물론 어렵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왜 더덕을 수입해야 하고,

수입 더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알면 그에게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다.

“싫으면 바꿔 줄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8명의 MD는 갑자기 진행하게 된 미션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들이 마켓 프레시의 명함을 들고 거래처를 만나고, 시장 조사를 하면서 처음 MD를 꿈꿨던 그때의 설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들 이해됐죠?”

“부장님, 그럼 저희 업무는 어떻게 됩니까?”

김혁진의 질문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늘부터 이틀간은 빼 줄 겁니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팀장님이나, 차장님들께 법카 받아 가세요. 안나 씨는 내 것 가지고 가고.”

이 또한 차장과 각 팀장에게 미리 협조를 요청해 놨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인턴들이 나가고, 박대영, 장선영 차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재미있겠는데요?”

장선영 차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네, 재미들 있어 할 겁니다.”

“그러게요. 우리가 너무 안에만 가둬 뒀죠. 출신도 다양한 사람들을 뽑아다가, 똑같은 일만 시켰으니까.”

“선영 차장님 법인 카드 줬어요?”

“네, 조금 전에 박기현 씨 주고, 걱정하지 말고 팍팍 쓰라고 했어요.”

“하하하 잘하셨어요.”

“과연, 그 새가슴이 얼마나 쓸지 궁금하네요. 설마 자기 카드 쓰고 다니진 않겠죠?”

“두고 봐야죠.”

잠시 후.

소문을 들은 마성근 팀장이 들어왔고 그는 대뜸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부장님. 우리 이러지 말고 팀장들 모아서 크게 내기 한 번 할까요?”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가 근질근질했나 보다.

“무슨 내기요?”

“근사한 저녁 어때요? 최소 소고기 이상.”

“법인카드 없기로?”

“물론이죠. 그럼 팀장들 싹 모으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   *   *

오후 9시.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장선영 차장이 전부였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려는 순간, 장선영 차장이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부장님, 박기현 씨 나간 거 맞죠?”

“네, 그런 거로 아는데요?”

“근데 오늘 카드명세 뽑아달라고 해서 봤는데, 하나도 쓴 게 없네요.”

“그래요?”

“네, 또 그 새가슴이 자기 카드 쓰고 다녔나 봅니다.”

“겨우 교통비인데요. 뭐.”

“아뇨. 제가 카드 주면서 태종푸드 김 팀장은 홍삼이라면 끔뻑 죽는다고, 꼭 사 가라고 했거든요.”

사업부의 차장과 팀장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장선영 차장처럼 카드명세를 뽑거나, 직접 전화를 해서 문제가 없는지를 매번 체크했다.

내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자, 장선영 차장은 내 옆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 물었다.

“부장님. 박기현 씨 미션 내용이 뭐예요? 태종푸드까지는 아는데, 내용은 몰라서요.”

“밀 웜이요. 사료에 들어갈 식용 밀 웜 농장 좀 소개받으라고 했어요.”

밀 웜이라는 말에 장선영 차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아……. 태종이 내줄까요?”

“아마 안 내주겠죠.”

“근데 왜 그런 걸 시키신 거예요?”

“그렇다고 100%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설마 박기현 씨가 가져올 거라고 기대하시는 거예요?”

“네, 기대합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퇴근할 준비를 했다.

장선영 차장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메고,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부장님. 약속 있으세요? 없으시면 저랑 와인 한 잔 어때요?”

“갑자기 왜요?”

“편애하시는 겁니까? 인턴들만 관리하시고……. 저도 좀 관리해 주세요.”

“그리고 와인 싫은데.”

“왜요? 와인이 얼마나 건강한 음료인지 모르시죠? 제가 살 테니까 그냥 따라나 오세요.”

장선영 차장은 내 팔을 잡아당기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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