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94화 (94/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94화>

95. 내가 목표한 바를 다 이뤘으니까

*   *   *

회사 옥상의 흡연실.

지이잉. 지이잉!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담배를 끄고, 난간에 기대 전화를 받았다.

- 일단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의 김명진 차장.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따로 전화하는 것 같았다.

“그래, 최 이사님은 별말씀 없었고?”

- 네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생각이라……. 그래. 수고했어.”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김명진 차장이 다급하게 불렀다.

- 저 부장님!

“응?”

-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적응 안 되지? 여긴 원래 이래. 그리고 명진 차장도 원했잖아.”

- 그래도 너무 욕심이 많아 보이지 않아요?

“그런 욕심도 좋게 보였을 거야.”

나는 김명진 차장에게 최구열 이사와의 독대를 요청하라고 했다.

그리고 직책이 너무 낮아 일을 진행할 수 없다는 말을 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최구열 이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도 뻔하다.

그는 고동수 부장의 밑으로 김명진 차장과 같은 그릇을 두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그럴까요?

“그래, 수고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고동수 부장의 자리로 가서 그를 불렀다.

“고 부장님.”

차분한 내 목소리에 책상에 앉아 볼펜을 돌리던, 고동수 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네.”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무슨 일 있습니까?”

“10분이면 됩니다.”

고동수 부장은 의심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일어났다.

나는 그를 데리고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앉으시죠.”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말없이 앉는 고동수 부장.

나는 그가 앉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정진택 팀장에 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그걸 왜 저와 얘기하십니까?”

“푸드 커머스가 아닌, 전체 MD 사업부에 관한 얘기입니다.”

고동수 부장은 팔짱을 끼고,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씀해 보세요.”

“신선식품 팀의 매출이 1개월 전보다 15%나 올랐습니다.”

“그래서요?”

“따로 사업부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

놀란 눈으로 고동수 부장이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상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매출이 잘 나오는 부서의 독립을 막고, 무조건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이니까.

“신선의 매출만 놓고 보면, 건강과 베이커리를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앞으로 사람도 더 필요해질 것이고, 수고한 정 팀장에게도 진급이라는 보상이 갔으면 합니다.”

“그야. 마켓 프레시의 메인이 신선이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별도의 사업부가 필요한 겁니다.”

달그락!

고동수 부장은 회의실까지 들고 왔던 볼펜을 돌리다가 땅에 떨궜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할 때의 습관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내 폭탄 발언에 제법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워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신선 팀 매출이 제일 좋잖아. 근데 그 매출을 빼겠다고?>

<이 새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들려오는 고동수 부장의 조금 전 기억.

그는 신선식품 팀을 독립시키겠다는 내 말에 의심을 먼저 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볼펜을 힐끔 보고,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대표님의 지시입니까?”

정진택 팀장은 정근영 대표의 외아들.

지금까지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다.

“아니요. 대표님의 지시였다면, 최 이사님에게서 내려왔겠죠. 이건 모두 저 혼자의 생각입니다.”

“그럼 혹시, 정 팀장을 바로 부장으로 올리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럼요?”

“박대영 차장을 부장으로 올리고, 정진택 팀장을 차장으로 올려 볼까 합니다.”

“박대영 차장을요?”

당연히 수락하지 않겠지.

박대영 차장이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까.

고동수 부장은 잠시 고민을 하는척하다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박대영 차장은 미끼다.

최구열 이사나 고동수 부장이 그를 챙겨 줄 리는 없다.

이제 그는 최구열 이사에게 쪼르르 달려가 논의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신선식품이라는 마켓 프레시 최고의 떡을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를.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의 행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   *

오후 5시.

최구열 이사는 MD 사업부 차장 이상급 회의를 소집했고, 나와 장선영, 박대영 차장이 함께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먼저 와있던 고동수 부장, 이진영, 김명진 차장.

그들과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최구열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앉아요.”

최구열 이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확신이 있으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사람이다.

거짓말투성인 그의 자서전에는 이런 추진력과 결단력 덕분에 그룹폰의 신화를 썼다고 말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에 앉은 김명진 차장을 힐끔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재빨리 눈을 피하며 최구열 이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고 부장에게 들었네. 신선식품 팀을 따로 독립하겠다고?”

“네.”

최구열 이사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놀란 표정의 박대영, 장선영 차장.

나는 이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원 부장.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신선식품 팀의 매출은 건강과 베이커리를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좀 더 많은 권한을 가진 사람이 관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긴 원 부장이 많이 힘들었을 거야.”

최구열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힘들다고 한 적이 없는데…….

“조금 힘들긴 했습니다.”

“하하하! 원 부장, 내 방 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그런 일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나를 찾아와.”

“사업부 일이라, 고 부장님과 먼저 상의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최구열 이사는 박대영 차장을 힐끔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원 부장. 박 차장이 가능할 거라 보나?”

“물론입니다.”

여기서 굽히면 안 된다.

이들에게 나는 고집 세고 불통의 캐릭터니까.

최대한 내 캐릭터 그대로 밀어붙여야 한다.

최구열 이사는 다시 박대영 차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박 차장. 할 수 있겠어?”

박대영 차장은 오랫동안 차주영 부장의 그림자로 살아왔던 사람.

기회가 왔을 때 겸손은 미덕이라고 생각하며, 한두 번은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을 주셔서…….”

“흠……. 그럼 우선 내 계획을 말하지.”

“…….”

“나는 신선과 건강을 하나의 사업부로 묶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번에 새로 오픈한 쿠폰도 더 키워 보고 싶은데. 어떤가?”

“쿠폰이요?”

“그래. 쿠폰. 이번에 매출이 꽤 잘 나왔다고 들었네.”

“그……. 그야 그렇죠.”

오프라인 쿠폰 쪽 매출이 좋다는 것은 김명진 차장을 칭찬하는 말.

새로운 사업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박대영 차장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유일하게 최구열 이사에게 대들 수 있는 내가 나설 차례다.

“아닙니다. 영업에 들어가는 공수에 비하면 쿠폰은 이윤이 적다고 봅니다.”

“그래?”

“네. 사업이 확장되면 이익보다는 손실이 클 수 있습니다.”

“김 차장, 생각은 어떤가?”

최구열 이사가 고개를 돌려 김명진 차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차분한 표정의 김명진 차장은 나와 최구열 이사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쿠폰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도 원 부장님과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거래를 튼 상점은 쿠폰이 소진되면 바로 다시 오픈할 수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프라인 상점은 판매할 수 있는 수량이 적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말에, 김명진 차장이 미간을 구겼다.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대로였다.

“그래서 더 많은 오프라인 상점들을 섭외할 생각입니다.”

“그걸 영업에 들어가는 공수라고 말하는 겁니다. 오프라인 상점 하나를 영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이 들어가는지 잘 아시잖아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많은 공수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 보정, 상세 페이지, CS 등 들어가는 일손이 꽤 많습니다.”

“우린 커머스입니다. 그 정도 노력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다르다는 겁니다. 겨우 하루에 10개 팔 수 있는 오프라인 쿠폰과 하루에 10만 개 이상도 팔 수 있는 냉동 만두와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아니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브랜드의 한계가 있는 제품보다, 오프라인 상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나와 김명진 차장이 핏대를 세우자,

최구열 이사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올려 우리를 말렸다.

“자자, 그만!”

“이사님. 쿠폰은 잠깐의 이벤트 정도의 상품이지 절대 메인 카테고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소설커머스들이 철수를 하겠습니까?”

이제 이 정도 판을 깔았으니, 최구열 이사는 확신했을 것이다.

쿠폰 사업을 무슨 수를 써서든 해 보고 싶다고.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차갑게 말했다.

“원 부장, 나는 쿠폰 사업을 더 확장해 보고 싶네. 그래서 김 차장을 우리 회사로 데려온 것이고.”

“하지만 손실이 큰…….”

최구열 이사는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었다.

“저번에 티켓 쪽도 원 부장의 반대에 내가 포기했으니, 이번엔 내 말을 들어 줄 수 없겠나?”

“이사님! 명확한 근거가 있다면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니. 누가 하느냐의 차이지. 여기 모인 사람들도 알 거야. 김 차장이 차장의 직급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

“처음에는 이 친구를 부장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사업부가 둘뿐이라 그렇게 하지 못했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생각인데, 정말 안 되겠나?”

“네, 절대 안 됩니다. 명진 차장은 입사한 지 3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생각은 반대야. 능력이 있으면 누구든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그럼 그렇지.

이래야 최구열 이사지.

이제 그가 확실히 못을 박았으니,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 줄 것이다.

내가 목표한 바는 이미 이뤘으니까.

최구열 이사는 소파에 앉아 있는 직원들을 둘러봤다.

“이 얘기는 이사회의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박 차장!”

실망에 찬 박대영 차장은 고개를 들어 최구열 이사를 바라봤다.

“너무 실망하지 마. 다음에는 내가 특별히 신경 쓸 테니까.”

그렇게 최구열 이사가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박대영 차장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자신이 돕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최 이사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기가 MD 사업부 이사도 아니면서, 이제 인사까지 신경을 쓰는 겁니까?”

사업부로 내려오자 박대영 차장이 내게 불만을 털어 놨다.

“차장님, 소주 한잔할까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미안해요. 내가 힘이 없어서.”

“아닙니다. 부장님께 섭섭한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자리는 꼭 박 차장님 물려주고 갈게요.”

박대영 차장에게는 맞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나는 조만간 그 자리에 박대영 차장을 앉힐 것이다.

내 말에, 박대영 차장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되물었다.

“어디 가세요?”

“아니요. 혹시나 가게 되면요.”

“불안하게 왜 그러세요?”

나는 박대영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무리하고 갑시다. 오늘은 특별히 소고기 쏠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