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92화>
93. 건강식품 팀 먼저
* * *
오후 9시.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도로.
사고 때문에 길이 막혀, 생각보다 늦었다.
“나 서울 들어가면 내려 줘.”
내 말에, 운전을 하던 김태하 팀장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회사 가려고?”
“응, 처리할 일이 남아서.”
“내일 하고 오늘은 가서 좀 쉬어. 아까 운전도 오래 했잖아.”
“아니야. 내일 미팅 많아서, 오늘 꼭 마무리 지어 놔야 해.”
“무슨 일인데?”
“차주 특판 제품들 컨펌 내 줘야 하거든.”
“그걸 왜 네가 해? 마 팀장은 뭐하고?”
“마 팀장님은 점심 때 에너지 드링크를 잘 못 먹어서 병원 가고 난리 났었대.”
“특판팀 애들은?”
특판팀의 제품을 등록하기 위해서는 팀장이나 사업부 부장의 최종 승인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단기간에 많은 제품을 판매하는 특판의 성격상, 실수가 생겨도 팀원들에게 책임이 가지 않도록 내가 정한 룰이다.
“관리자 권한이 없잖아.”
“그럼 마성근 팀장이 해야지. 집에 가서 하건, 병원에 누워서 하건, 자기가 맡은 일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괜찮아. 금방 끝나.”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김태하 팀장은 평소와 달랐다.
그는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버럭 소리까지 질러 댔다.
“그럼 원주를 가지 말든가. 지금 들어가면 언제 퇴근하려고?”
“너 갑자기 왜 그래?”
김태하 팀장은 짜증이 나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냥 회사까지 가자. 나 때문에 원주까지 갔으니까.”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내가 보고 싶어서 가자고 한 거였잖아.”
“우리 팀 일이잖아!”
김태하 팀장이 다시 한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짜증이 났을 것이다.
테이크푸드의 제품에 잔뜩 기대하면서, 직접 원주까지 갔으니까.
그는 침을 삼키고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훈아.”
“응?”
“난 말이지. 네가 고 부장처럼 적당히 치고 빠질 줄 알았으면 좋겠어.”
“고동수 부장은 왜?”
“…….”
“무슨 일이냐고?”
내가 연거푸 묻자.
김태하 팀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답했다.
“후……. 아까 이진성 차장한테 전화 왔었어. 건강식품 팀에서 식약처 경고조치 받은 제품을 판매했었다고.”
전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다.
각 팀의 팀장이나 내가 최종 확인을 했으니까.
하지만 고동수 부장은 개인 실적을 가지고 평가한다고 했다. 그래서 실적에 대한 개인의 욕심이 지금과 같은 사고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제품은 내렸고? 공지는? 반품은? 클레임 많았다고 하지? CS는 제대로 했겠지?”
“…….”
“제조사에서는 뭐라고 하고?”
“지훈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해?”
“고동수 부장의 사업부 일이야. 그리고 누가 실수를 한 것인지 먼저 물었어야지.”
“누가 실수를 했건, 일단 일은 터진 거잖아. 누구든 수습을 해야지.”
더는 말을 하지 않는 김태하 팀장.
나는 답답한 마음에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내가 전화해 봐야겠다.”
그러자 김태하 팀장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나를 불렀다.
“지훈아!”
“왜?”
“이번 테이크푸드 일도 그래.”
“뭐가 그런데?”
“이 일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마무리하는 거고, 넌 그냥 내가 올린 보고서에 사인만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러다 원산지 속인 제품 판매하면?”
“…….”
“건강 보조 식품은 그냥 시정조치 이행하면 그만인데, 원산지 표기를 속이면, 9시 뉴스까지 나오는 거야. 왜 그래? 너도 알잖아!”
“그럼 등신같이 일 처리한 내가 책임을 져야지! 넌 그냥 김태하가 확실하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니더라, 김태하가 등신처럼 일 처리해서 이 사달이 났다고 그래야지!”
왜 갑자기 삐딱한 것일까?
나는 의아한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 왜 그래?”
“고 부장은 모두 충연 팀장 실수라고 보고서 올렸대. 그래서 충연 팀장은……. 아니다. 됐다.”
“충연 팀장이 뭐?”
“아니야. 그게 보통의 사람이고, 보통의 직장 상사고, 보통의 회사인 거야.”
애써 합리화를 하려는 김태하 팀장.
평소 친했던 최충연 팀장이 걱정돼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내가 걱정되는 걸까?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뭐야, 지금 너, 형님 힘들까 봐 걱정해 주는 거야?”
“…….”
“걱정하지 마. 난 원래 잘난 놈이라서 이 정도는 끄떡없으니까.”
내가 평소처럼 장난을 쳤지만,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핸들을 꺾어 마지막 휴게소로 들어가는 김태하 팀장.
그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운전하는 내내 그는 씩씩댔었다.
무슨 일일까?
“어차피 늦은 거, 밥이나 먹고 가자.”
차가 휴게소에 멈춰 서고.
김태하 팀장은 지갑과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내렸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조금 전까지, 그가 쥐고 있었던 핸들에 오른손을 올렸다.
<그걸 박 대리한테 떠넘겼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박 대리한테 왜? 변했어. 충연이 형까지 변했어.>
책임을 아랫사람들에게 전가한 것인가?
고동수 부장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놀랍지 않지만, 최충연 팀장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그리고 김태하 팀장.
복잡했구나.
평소 형처럼 따르던 최충연 팀장마저 변하자 마음이 좋지 못했구나.
그래서 나에게도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태하를 잘 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기에, 이런 경우 남들보다 더 크게 실망한다는 것을.
나는 차에서 내려.
휴게소로 걸어 들어가는 김태하 팀장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야! 김태하!”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냥 보통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보통이 될 거였다면, 여기 들어오지도 않았어.”
“…….”
“너도 그렇잖아. 안 그래?”
김태하 팀장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래. 너 잘났다.”
“최충연 팀장이 그럴 사람이 아니야.”
“무슨 말이야?”
“누구한테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아니라고.”
김태하 팀장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너 어떻게 알았어?”
“그냥 네 표정 보고. 이진성 차장한테 들었다고 했지?”
“응.”
“그래. 대충 감이 온다.”
“무슨 감이?”
“충연 팀장에게 전화해서 이따 호프집에서 좀 보자고 해 줘.”
“왜?”
“너도 같이 오고.”
“나는 또 왜?”
“오해는 풀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지. 이따 사람들 모이면 얘기하자.”
김태하 팀장은 씩 웃을 뿐 더는 묻지 않았다.
“가자. 늦겠다.”
* * *
17층 MD 사업부 사무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가장 늦게 퇴근하던 도재문 과장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재고 관리 빅데이터를 만든 도재문 과장.
사입 예측과 재고까지 완벽히 파악하는 이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과장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업무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매일 사무실에서 가장 늦게 퇴근했고, 업무 시간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좀 늦었네?”
“네. 업무가 조금 남아서요.”
“요새도 맨날 늦어?”
“재미있어서 하는 겁니다. 근데 왜 다시 들어오셨어요?”
도재문 과장의 질문에 나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빼먹은 게 있어서.”
“아 참, 정진택 팀장이 인트라넷에 데이터 보내 놨다고 합니다.”
“그래, 수고했어. 그리고 나 뭐 좀 부탁해도 될까?”
“네?”
“한 30분 정도면 뽑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예. 뭐든 말씀하세요. 30분이 아니라, 30시간이 걸려도 뽑아 드리겠습니다.”
“그럼 디지털 커머스 사업부, 최근 사입 좀 뽑아 줘. 단가, 수량, 제조사, 벤더,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다.”
“알겠습니다.”
“아 참, 다 뽑으면 요 밑에 호프집으로 와.”
“예!”
나는 자리로 돌아와, PC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먼저 정진택 팀장이 보낸 신선 식품 팀의 판매 데이터를 훑어봤다.
그때.
“오셨어요?”
슬리퍼를 끌고 복도를 지나가던 김명진 차장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기다렸던 사람처럼.
“응.”
“원주 가신 일은 잘되셨고요?”
“아니, 별로였어. 근데 왜 아직 남아 있어?”
“원주 다녀와서 보자고 하셨잖아요.”
나를 기다렸구나.
만약 없었다면, 나오라고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김명진 차장은 내 옆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보고,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부장님은 신선 식품 팀 업무도 하세요?”
“업무는 아니고, 그냥 확인만 해 주는 거야.”
“왜요?”
“내가 책임자니까.”
“책임자라……. 특판 팀 차주 판매 리스트도 최종 확인 하시죠?”
“그렇게 사업부 일들 일일이 신경 쓰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책임자가 알아야지. 그래야 사고가 나도 대처를 하지.”
내 말에, 김명진 차장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구랑은 완전 다르네요. 그분은 사인만 하기 바쁜데. 커피 한잔 드릴까요?”
“아니야. 오면서 마셨어.”
“한잔 더 드세요. 제가 타는 믹스는 좀 다릅니다.”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탕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드세요.”
“그래, 잘 마실게.”
“오늘 건강식품 팀 얘기는 들으셨죠?”
“들었어. 시정 사항은 다 이행한 거지?”
“예, 잘 처리했습니다.”
“그럼 박 대리는?”
“징계위원회 넘겨질 거라고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요.”
“그걸 왜 명진 차장이 몰라?”
“저를 못 믿으시거나, 자신도 잘 모르는 거죠. 우리 부장님은 저한테 아무 말씀도 안 해 주십니다.”
저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김명진 차장은 고동수 부장에게 불만이 가득하다.
나는 그의 말에 따로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봤다.
“잠깐, 나 이거 좀 마무리하고, 나가서 맥주나 한잔하자.”
“맥주 좋죠. 저도 그럼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 * *
회사 인근의 작은 호프집.
나와 김명진 차장은 구석의 자리에 앉아 생맥주 두 잔을 주문했다.
맥주가 나오고 갈증이 났던 나는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잘 드시네요?”
“갈증 났거든. 명진 차장, 건강식품 팀 얘기 좀 더 해 봐.”
“제가 뭘 알겠어요. 내일 최충연 팀장에게 들으세요.”
“그게 아니라, 명진 차장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그런 거야.”
김명진 차장은 앞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먼 곳을 응시했다.
“제 생각이라…….”
“그래. 명진 차장의 생각.”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까?”
“그럼 달라지지.”
김명진 차장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렇게 새로 나온 맥주까지 급하게 마시고.
“고 부장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개인 실적이 오히려 사업부에 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리나 사원이 책임을 지는 게 말이 됩니까?”
“충연 팀장이 잘못했다는 말인가?”
“잘은 모르지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장님.”
“왜?”
김명진 차장은 마시던 맥주잔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소주로 바꿔도 될까요?”
“아니, 사람 더 불렀어. 그때 마셔.”
“누굴요?”
“최충연, 김태하, 정진택 팀장이랑 도재문 과장.”
“왜요?”
“다 똑같은 이유에서 오는 거야.”
잠시 후.
트레이닝복 차림의 정진택 팀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어왔다.
그는 나와 김명진 차장을 보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부장님. 늦게 무슨 일입니까?”
“잤어요?”
“아뇨. 그냥 티비 보고 있었어요.”
“오늘 건강식품 팀 얘기 들었죠?”
“설마 그것 때문에 부른 건가요?”
“네.”
“다른 사업부 일이잖아요.”
“팀장님이 좀 도와줘요.”
“제가 뭘요?”
“건강식품 팀 먼저 찾아오려고요.”
“네?”
정진택 팀장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