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91화>
92. 제가 여권을 안 가져와서요
- 부장니미
마성근 팀장은 메신저를 칠 때 오타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 정도는 충분히 애교로 받아 줄 수 있다.
- 아니 뷰장님 ㅎㅎㅎㅎㅎㅎㅎ
- 네.
- 이번주 큭판 일정올렿ㅅㅅ어요.
- 네 수고하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ㄴㄴ ㅇ벗어요. 뷰자니 사라나하니다
금주의 특판 일정을 관리자에 올렸다는 말이다.
근데, 오늘은 유난히 심한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성근 팀장의 특판팀으로 갔다.
팀원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지만.
마성근 팀장은 자리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자리로 다가가려 하자, 김대성이 내 옆으로 다가와 대신 변명을 해 줬다.
“아까 에너지 드링크 시음하다가, 저렇게 되셨습니다.”
“에너지 드링크?”
“예, 미팅 온 BM이 맥주나 소주에 타 먹으면 좋다고 계속 권해서요.”
“하…….”
“겨우 한 잔씩만 드셨는데, 저렇게 되셨네요.”
“어떤 잔으로?”
“그냥 종이컵이요.”
마성근 팀장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근데, 에너지 드링크까지 타 마셨으니 아주 맛이 갈 만 하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김대성에게 말했다.
“대성 씨, 마 팀장님 깨워서 사우나에 보내.”
“그래도 될까요?”
“응. 술 먼저 깨고, 사무실 들어오면 나한테 오라고 좀 해 주고.”
“알겠습니다.”
“아니다. 나 이따 원주 가야 하는데, 그냥 전화만 달라고 해.”
내가 전화를 달라는 이유는 문책이 아닌, 순수한 걱정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함께 1년 넘게 일한 김대성은 내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김명진 차장이 파일 철을 겨드랑이에 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마 팀장님, 완전히 뻗으셨네요.”
“그러게.”
“마 팀장님은 좋겠네요. 걱정해 주는 상사에 부하 직원에.”
“우리 회사 슬로건 알지? 꼭 먹어 본 것만 팔아라. 마 팀장은 BM이 권유한 방법대로 경험해 본 거야.”
내 설명에, 김명진 차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사실을 말한 거야.”
“점점 더 배가 아파지네요. 그건 그렇고,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저희 사업부에서 특판 들어갈 품목들 보고드리려고요.”
특판에 들어갈 목록은 고동수 부장에게 직접 가져오라고 했는데…….
“그걸 왜 명진 차장이 가져와?”
“고 부장님은 바쁘시답니다.”
“그래, 회의실로 갈까?”
“네.”
우린 두 사업부 중앙에 있는 유리 벽이 쳐진 회의실로 갔다.
그렇게 30여 분의 회의가 끝나고, 김명진 차장은 유리 벽 밖의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창익 대리님은 오늘 아침도 바쁘네요.”
건강식품 팀의 김창익 대리.
업무보다는 다른 능력이 좋은 사람이다.
복사기, 컴퓨터 수리, 최저가 검색, 심지어 구두 수선까지.
못하는 일이 없다.
나는 책상 밑에서 기어 나오는 김창익 대리를 바라봤다.
같은 팀원의 컴퓨터를 수리해 준 그는 먼지로 더러워진 손을 펼치고,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보던 김명진 차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러니까 자기 실속을 못 차린다는 말을 듣죠.”
“그게 무슨 말이야?”
“고 부장님이 개인 실적표 출력해서 벽에 크게 붙여 놨어요. 보고 각성하라고.”
“언제?”
“방금요.”
“경쟁을 붙이겠다는 건가?”
“네,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무슨 보험 회사도 아니고…….”
나는 팀의 실적에서 개인의 업무 기여도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상품 기획, 사입, 재고, 통계, 마케팅, 때로는 고객 응대까지…….
MD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기에, 협업을 기본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동수 부장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디지털 커머스 사업부의 매출을 올려 보고자 생각한 방안이 겨우 개인 간의 경쟁이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김명진 차장은 유아동 팀의 이성준 과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준 과장님은 요새 스트레스가 심한가 봅니다. 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저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부하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이성준 과장.
나도 저렇게 화를 내는 이성준 과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쪽은 상사와 부하 직원이 감싸주고, 다른 한쪽은 실적 가지고 억지 경쟁이나 붙이고.”
“…….”
“회사 참 재미있네요.”
김명진 차장의 말처럼 한 명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변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명진 차장.”
“네?”
“이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이 회사에서 고 부장님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원 부장님뿐이잖아요.”
나는 김명진 차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진 차장이 멈춰 볼래?”
“제가요?”
“응, 내가 조금은 도와줄 테니까.”
김명진 차장은 나와 마주한 눈을 살짝 피하고.
유리 벽 밖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뭘 하면 됩니까?”
“나 오늘은 원주 가야 하니까 다녀와서 보자고. 그때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김명진 차장은 내게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 * *
“아이고! 부장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테이크푸드의 최성준 대표.
참 허리를 잘 굽히는 사람이다.
그는 목요일 공개 품평회 날에 홀로 찾아와, 냉동식품 몇 종으로 우리 MD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때도 얼마나 허리를 굽혔는지, 부담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나는 맛과 가격까지 잡아낸 그들의 제품이 궁금했다.
어떤 공장에서, 누가,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최성준 대표는 빙빙 돌리며 결정적인 답을 피했고, 아무리 제품과 제안서, 명함 등을 만져도 그의 기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태하 팀장을 설득해 강원도 원주까지 왔다.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
나는 허리를 숙인 최성준 대표를 재빨리 일으켜 세웠다.
“이러지 마세요.”
직원 다섯이 전부인 테이크푸드.
대표 이사실이 없는 사무실은 회의실과 작은 책상 다섯이 전부였다.
낡은 정수기와 윙 소리가 크게 나는 작은 냉장고는 얼마나 그들이 힘들게 사업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바로 갈까요?”
“숨 좀 돌리고 출발하시죠.”
오늘은 공장 실사를 위해 불시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최성준 대표는 우리를 공장이 아닌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이곳의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녹차가 담긴 종이컵을 가져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김태하 팀장의 말에.
그녀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어때?”
내 옆구리를 찌르며, 눈썹을 치켜뜨는 김태하 팀장.
나는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한 것인지 알지만 모르는 척했다.
“뭐가?”
“아까 저분.”
“저분?”
“응, 녹차 주고 간 여자분 말이야.”
김태하 팀장은 이은지와 헤어진 이후,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
길 가는 이성에게 자주 눈이 돌아갔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설레발을 쳤다.
“하지 마라.”
“하긴 뭘 해?”
“뭐든 하지 말라고.”
“원래 사랑은 불시에 오는 거야.”
“그러다 불시에 뺨 맞는다.”
“아까 그 여자가 나 보면서 웃었거든. 못 봤어?”
봤다. 아주 사무적이고 평범한 미소.
“못 봤으니까 하지 마.”
“아니야. 내가 볼 때는 99% 확실해.”
“나도 99% 확실하니까. 하지 마.”
“내기할까?”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조금도 하려고 하지 마. 알았지?”
내가 김태하 팀장을 뜯어말리는 사이.
최성준 대표와 40대의 남자가 함께 들어왔다.
남자는 우리에게 차례로 명함을 건네고, 고개를 숙였다.
“테이크푸드의 김정무 실장입니다.”
“네, 원지훈입니다.”
“김태하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하고 자리에 앉자.
김정무 실장은 출력한 두꺼운 문서를 우리에게 나눠 줬다.
“저희 떡갈비랑 돈카츠는 시식해 보셨죠?”
“네.”
“어떠셨나요?”
“아주 좋았습니다.”
“목요일에 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집에 일이 있어서 못 갔네요.”
김정무 실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요일에 사무실로 온 최성준 대표는 제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답답했었는데…….
그는 어떨까?
나는 김정무 실장이 출력해서 준 제품 소개서를 오른손으로 훑었다.
<진작 준비했어야 하는데.>
<김 실장 보낼걸.>
김정무 실장의 목소리.
뭘 준비했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리고 ‘김 실장 보낼걸.’이라는 기억은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를 떠보기 위한 질문을 시작했다.
“대표님. 돈카츠에 어떻게 팔각을 넣을 생각을 하셨어요?”
중국의 향신료 팔각.
고기나 생선의 잡내를 없애 주고, 맛은 매콤하면서 달달하다.
또한, 소화를 촉진시켜서 기름이 많은 음식에 좋은 향신료이기도 하다.
“하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번 시험한 끝에 어렵게 성공한 제품입니다.”
최성준 대표의 답을 원했는데, 김정무 실장이 빠르게 답했다.
이상하다.
최성준 대표는 목요일 품평회 때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팔각을 넣을 정도로 특별한 제품이라고 대놓고 자랑해도 될 텐데.
“공장에는 몇 분이나 계시나요?”
“20명이 조금 넘습니다.”
이번에도 김정무 실장이 대신 답했다.
“튀김용 기름은 어떤 제품을 쓰시나요?”
“청정에서 나온 해바라기씨유 씁니다. 좀 비싸도 좋은 먹거리를 만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일하고 있습니다. 마프도 그렇잖아요. 하핫“
“튀김용 설비는 장호에서 설치해 줬나요?”
“네, 장호에서 나온 설비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긴 하죠. 근데 너무 임대료가 비싸서 고민이 큽니다.”
“장호 설비도 임대되나요?”
“제 친구가 장호에 있어서요.”
장호의 설비가 임대라 된다라…….
그쪽 대표를 아는 나도 시도해 보지 못한 것이다.
“요새 온라인에서 반응은 좀 어떻습니까?”
“그냥 어렵게 유지만 합니다. 새로운 벤더들에게도 뿌렸는데, 아직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네요.”
“에이 마켓에서는 좀 팔린 것 같던데요?”
“그건 번들로 특가 친 거라서, 남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김정무 실장과 한참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재료, 설비, 마케팅까지 막힘없이 술술 답을 해 줬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둘도 없는 천재이거나, 그냥 달달 외운 사람.
나는 갈증을 느끼고, 녹차가 담긴 종이컵을 움켜잡았다.
그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CFS Charge.
이는 컨테이너 하나 분량이 되지 않는 화물의 분류작업 비용을 말하는 무역용어다. 이전에 근무했던 원스몰은 소량의 제품만 수입했기에 잘 알고 있다.
근데, 이 직원은 왜 CFS Charge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그때.
“준비 다 됐습니다.”
회의실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직원이 조용히 말했다.
“가시죠!”
최성준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펼쳐 보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미간을 살짝 구기며 그들에게 말했다.
“어쩌죠?”
“네?”
“제가 여권을 안 가져와서요.”
“네? 여권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 공장에 가 보자고 하셨잖아요.”
“…….”
아무런 말이 없는 최성준 대표와 김정무 실장.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김태하 팀장이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부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공장에 가자고 하시잖아. 테이크푸드는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고 한국에서는 포장지만 바꾸는데 말이야.”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한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봤다.
김정무 실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실장님, 저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습니다.”
“그게…….”
고개를 숙인 김정무 실장.
최성준 대표는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내 팔을 잡았다.
“도와주십쇼. 저희가 너무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마켓 프레시는 국내 생산 제품만 판매합니다.”
“저 부장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나는 최성준 대표의 손을 떼어 내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 있던 테이크푸드 직원들도 안의 내용을 들었는지, 물끄러미 나와 김태하 팀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회의실에 있는 최성준 대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음에 수입 카테고리가 생기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저…….”
회사로 돌아가는 길.
운전하는 김태하 팀장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지훈아.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
“팔각이 들어간 거 보고 그냥 찍은 거야.”
“찍어? 진짜 넌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야.”
“그리고 그 둘 명함도 바꿨던데?”
“응?”
“대표가 실장이고, 실장이 대표야. 아마 대표가 중국에 가 있어서 못 왔을 거야.”
“하……. 점쟁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 운전을 하는 김태하 팀장을 보고 씩 웃었다.
“마지막으로 그 여자는 너한테 관심 일도 없었어.”
“잔인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