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90화 (90/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90화>

91.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을 냈나 봐

“지영아!”

긴 생머리의 화장기 없는 여자가 김지영 이사의 어깨를 잡았다.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부잣집의 딸 같은 여자.

얼굴은 하얗고 피부도 좋아서.

지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20대 후반으로 여겼을 것이다.

김지영 이사는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어머! 혹시나 했는데……. 나 소개 좀 해 줘!”

소개해 달라는 말을 다 들리게 말하는구나.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레이첼 김이에요.”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은 그녀는 애교가 가득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혹시 배우나 가수 그런 거 하세요?”

“아……. 아니요.”

“그럼 모델?”

“아니요.”

“근데 뭐 이렇게 잘생겼대?”

“아닙니다. 레이첼 씨가 더 미인이신데요.”

“호호호홍!”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레이첼 킴.

그녀는 부담스럽게 내 옆에 바짝 달라붙으며 속삭였다.

“지영이 뭐가 좋아서 만나요?”

“예쁘잖아요.”

“저는 어때요?”

레이첼 킴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부담스럽게…….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살짝 피했다.

“네?”

“농담이에요. 농담!”

레이첼 킴은 한 손을 휘휘 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행동을 했다.

하지만 영 불편한 표정의 김지영 이사가 미간을 구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레이첼,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하지?”

“장난 한번 한 거 가지고 왜 그래?”

“레이첼!”

김지영 이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레이첼 김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 BO가 기내식 입찰 따냈다면서?”

“어떻게 알았어?”

“스카이밀 난리 났잖아.”

“너, 거기도 아는 사람이 있어?”

“당연하지. 나 레이첼이야! 그나저나, 신규 공장 부지는 준비했어?”

커머스가 활발해지면서, BO푸드의 가공식품들도 판매량이 늘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BO푸드는 대형 항공사가 진행하는 기내식 입찰에 참여해, 3년 계약에 성공했다.

그것도 10년간 납품하던 스카이밀이라는 회사를 밀어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늘어난 생산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선 새로운 공장 설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야. 요새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벌써 사람들 움직이더라.”

“그래?”

“응. 아현이 언니 알지?”

“그 언니가 왜?”

“영종도 지하철역 근처에 오피스텔 새로 올린다고 하더라.”

“행동 진짜 빠르네.”

“규모는 얼마나 돼? 사람은 새로 뽑는 거지? 공장 위치는?”

“난 하나도 몰라.”

“그러지 말고, 오빠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주면 안 돼?”

이들은 이런 얘기를 이렇게 쉽게 하는구나.

김지영 이사는 이런 경험이 많은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럼 넌 뭐 해 줄 건데?”

“해 달란 거 전부다.”

“내일 회사로 와.”

“오케이! 너 약속했다!”

“그래.”

레이첼 김은 김지영 이사의 볼에 입을 맞추고, 아이처럼 웃었다.

그리고 애교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내게 후 불어서 보내는 시늉을 했다.

“야! 김미옥!”

“알았어. 그냥 장난이야.”

레이첼 김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김지영 이사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섞였다.

김지영 이사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미옥이가 부동산을 좀 크게 하거든.”

“미옥이?”

“레이첼 말이야.”

“한국 이름이 미옥이야?”

“응. 김미옥. 쟤는 미국에서 3개월 이상 있어 본 적 없어. 그리고 얼굴도 완전 싹 갈아엎은 거야. 예전 사진 보면 놀랄걸?”

“아……. 그래. 근데.”

“근데 뭐?”

“친해지면 좋은 부동산 정보 좀 받을 수 있는 건가?”

혹시 내게 관심을 보여서 그런가?

김지영 이사는 애써 레이첼을 깎아내리려 했다.

“죄다 엉터리니까, 친해질 생각은 하지 마.”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잖아.”

“모르긴 뭘 몰라?”

나는 씩 웃으며, 김지영 이사의 허리를 손으로 둘렀다.

“알았어. 말 들을게.”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살폈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지영아. 저 사람 영진실업의 전무이사, 양은재 맞지?”

포켓볼 다이에 걸터앉아 샴페인을 마시는 한 남자.

그는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는 재벌 2세로 각종 TV 프로그램에 종종 나오는 영진실업의 전무이사다. 또한, 영진실업은 식품의 수출입을 주로 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무역 회사로 언젠간 곧 만나야 하는 회사이기도 하다.

“으……. 응.”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김지영 이사.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저 사람 어때?”

“그냥 별로야.”

“왜? 영진이면 BO푸드랑 거래 많이 하지 않아?”

BO푸드의 매출 60%가 수출에서 발생한다.

또한, 원재료들의 수입도 많아서, 당연히 식자재 수입을 크게 하는 영진과의 거래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건 그런데.”

“그럼, 우리 지영이한테 더 힘을 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쟤는 아니야.”

“가자.”

“응?”

“갑자기 궁금해졌어.”

내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김지영 이사는 내 손목을 꽉 움켜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훈아.”

“걱정하지 마.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게 사람 상대하는 거니까.”

“아니……. 그게.”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내 손목을 쥐고 있던 김지영 이사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고, 양은재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나와 김지영 이사를 본 양은재가 손을 살짝 들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여! 지영이 누나!”

그는 약간 당황한 표정의 김지영 이사를 가볍게 끌어안고, 나에게 바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양은재라고 합니다.”

“네. 원지훈입니다.”

“종신이 형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마프의 MD시라고요?”

지영이 누나에 종신이 형이라…….

일단 나이는 많지 않은가 보구나.

하긴, 그의 외모와 복장만 보면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네.”

“샴페인 좀 드릴까요?”

“네. 주시면 좋죠.”

양은재가 한 손을 까닥이자,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리고 나와 김지영 이사에게 긴 샴페인 잔을 쥐여 주고 고개를 숙였다.

“아르망디 괜찮으시죠?”

아르망디는 한 병에 200만 원이 넘는 샴페인이라고 들어는 봤다.

나는 살짝 입에 대고, 미간을 구겼다.

“제 입맛에는 싱겁네요.”

“와인은 좀 드세요?”

“전 와인은 별로.”

“그럼 어떤 술 좋아하세요?”

“소맥이요.”

“소맥?”

“네. 소맥 안 좋아하세요? 제가 한잔 말아드릴까요?”

“하하하, 역시 종신이 형 말처럼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양은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올해 서른이시죠?”

“네.”

“저랑 같네요. 앞으로 지훈 씨랑 잘 통할 거 같은데, 어때요?”

동갑이었구나.

그에게서는 전혀 무례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요?”

“혹시 제가 노안이라서 놀라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 뜻이.”

“하하하 농담입니다. 커머스의 부장님이시면 MD를 총괄하시죠?”

“맞습니다.”

“잘됐네요.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는데.”

나는 그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그는 생각 외로 말이 잘 통했고, 이쪽의 시장 상황도 제법 알고 있었다.

다른 재벌 2세와는 다르게.

직접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새 나는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상태로 그와 대화를 섞었다.

“요즘 콘도그 프랜차이즈 유행인 거 아시죠?”

“네.”

“그쪽에 들어가는 감자랑 치즈가 있는데, 품질도 좋고 원가가 상당히 좋습니다.”

“그래요?”

“원하시면 내일 소개서 보내드리라고 할게요.”

“주시면,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혹시 옛날 수입 과자들 좀 구할 수 있을까요?”

“판매해 보시려고요?”

“네. 요즘 레트로 열풍이잖아요.”

“요즘 잘 나가긴 하죠. 저희 쪽에서 수입하는 제품들이 제법 있는데 그것들도 포함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누나네 회사니까 특별히 신경을 쓰려는 겁니다. 이번에 누나가 커머스 대표이사직을 노린다고요?”

이종신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나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식품 전문 커머스에서 여자 대표라……. 누나한테 잘 어울리겠네요.”

김지영 이사는 왜 양은재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데.

나는 고개를 돌려,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색이 안 좋네. 괜찮아?”

내가 묻자, 김지영 이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받아 들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은재가 말하면 어떡하지? 설마……. 5년이나 지난 일인데.>

<지훈이가 크게 실망하겠지?>

5년이나 지난 일이라…….

뭔데 말하면 안 된다는 걸까?

내가 왜 실망을 한다는 걸까?

이 샴페인 잔을 더 오래 쥐고 있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알기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즐거웠습니다.”

나는 그녀의 비밀을 지켜 주고자,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양은재에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때, 양은재가 다소 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 지훈 씨!”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나 말 아직 안 끝났는데.”

“…….”

“누나, 상대하기 힘들죠? 변덕도 죽 끓듯 하고.”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아버렸다.

왜 김지영 이사가 그렇게 멀리하라고 했는지.

“아니요. 전혀요.”

“그야 처음이니까 그렇죠. 저랑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별로, 알고 싶지 않네요.”

“하하하 왜요? 혹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까 봐? 지훈 씨도 한 달인가? 그거 해요?”

악마 같은 놈.

김지영 이사가 곤란해하자, 놈은 더 심하게 몰아붙였다.

나는 양은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한 손을 올려 내리치려는 순간, 김지영 이사가 내 주먹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만해.”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었고.

김지영 이사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실수다.

그녀가 대표이사에 오를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에 내가 졸라서 온 자리인데.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주먹을 내리고, 김지영 이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자.”

“……그래.”

우린 아무런 말 없이 밖으로 나왔다.

대리 기사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구석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내 뒤로 다가온 김지영 이사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담배 냄새나.”

“미안해. 기분 많이 상했어? 오늘 올 줄은 몰랐어.”

“뭘?”

“은재랑은 잠깐 만났었어. 근데 이제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누가 뭐래?”

“…….”

나는 담뱃불을 끄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마나 바람둥이였는지 모르지? 아마 들으면 깜짝 놀랄걸?”

막판에 난리를 치고 오는 바람에 이 자리에서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

이런 친구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을 냈나 봐. 다신 힘들게 안 할게.”

“…….”

“난 이렇게 웃는 김지영이 좋아.”

나는 김지영 이사의 양 볼을 잡고 옆으로 쭉 늘렸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어서 내 손을 떼어 내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치.”

지금 당장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담배를 물어서 냄새가 날 것이라는 생각에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는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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