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87화>
88. 고 부장님이랑 일하는 건 어때?
김명진 차장은 모든 일에서 완벽했다.
그리고 그의 비결은 타고난 능력이 아닌, 부지런함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회사에 나와 업무를 시작하고.
온종일 거래처를 돌다가 저녁 늦게나 사무실로 복귀했다.
한 번쯤은 바로 퇴근하거나 늦장을 부릴 수도 있는데, 그는 소름 돋을 만큼 계산대로만 움직였다.
김명진 차장이 MD 사업부로 와서 오픈한 지역 E티켓.
일주일 만에 무려 100여 개의 맛집 쿠폰이 등록됐다.
MD 사업부 직원들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서울 주요 지점에서 100여 개의 할인 쿠폰을 따 온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진짜 소문대로 괴물이네요. 괴물.”
김명진 차장에 관해 얘기하던 박대영 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홍대 식당들은 매진됐다면서요?”
“예. 올리고 30분 만에 완판입니다. 건대도 오늘 중에 다 판매될 거 같아요.”
“고 부장님은 어떤가요?”
“여전하죠. 애들 줄 세워서 군기 잡기 바쁩니다.”
고동수 부장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부서원들에게 실시간 보고를 요구했고, 정작 보고가 들어오면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보고를 받아야 부서원들이 하나라도 더 체크한다는 그의 논리는 실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진성 차장은요?”
차장 진급 후,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이진성 차장.
그는 이전보다 더한 업무가 몰려오면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죽으려고 하죠. 김명진 차장이 날아다니니까, 더 기가 죽어서 삽니다.”
“가전 쪽 매출 많이 떨어졌죠?”
“네. 20% 이상 떨어졌습니다.”
“김민정 팀장은 아직도 그런가요?”
유아동 카테고리의 김민정 팀장.
그녀는 육아 때문에 지각이 잦았지만, 일 처리 하나는 똑 부러졌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지각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줬는데, 고지식한 고동수 부장은 달랐다. 여자라서 늦는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등 김민정 팀장에게 심한 언어폭력을 행사했다.
“아니요. 얼마 전에 고 부장을 들이받았답니다.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하핫.”
“그 착한 김민정 팀장님이요?”
“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요. 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근데 둘 다, 그룹폰 출신이잖아요. 잘 알던 사이 아니에요?”
“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장선영 차장 얘기 들어 보니까 둘은 그룹폰에서도 그랬답니다.”
“그렇군요.”
생각보다 잡음이 많구나.
나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대영 차장은 할 말이 남았는지, 한참 동안 내 옆에서 떠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박대영 차장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 모니터를 확인했다.
- 부장님. 언제 시간 되시면 소주 한잔 사 주세요.
김명진 차장의 메시지.
나는 바로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 오늘은 어때요?
- 좋습니다.
- 네. 그럼 저 아는 집으로 가죠.
- 아니요. 제가 잘 아는 연희동의 중식당으로 가시죠. 부장님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연희동 중식당이라면.
요즘 한참 방송에 나와서 예약이 밀렸다는 그 집?
언젠간 예약을 해 보고 싶었는데…….
- 연희동이면 이복남 쉐프님이요?
- 네 맞아요. 거기.
- 거기 예약이 돼요?
- 아니요. 쉐프님이 한 번은 예약 없이 받아준다고 했거든요. 부장님이랑 가니까 그 특별 기회를 써 보려고 합니다.
역시 오프라인 쿠폰을 다루던 사람이라 다르긴 다르구나.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요.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고맙습니다.
- 제가 더 고맙죠.
* * *
가정집을 개조한 연희동 중식당.
테이블 20개 조금 넘는 그곳은,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다.
우린 직원이 추천하는 코스요리를 주문했고, 방송에서 보던 이복남 쉐프가 직접 음식을 가져다줬다.
“우리 명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내게 고개를 숙이는 이복남 쉐프.
우리 명진이라.
얼마나 친하길래 이런 말을 하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었다.
“차장님은 저희 회사 에이스입니다. 덕분에 유명한 쉐프님 요리도 맛보고 너무 좋네요.”
“과찬이십니다.”
“혹시 다음에 제 여자 친구도 데려와도 되나요?”
“예. 얼마든지요. 예약은 매월 1일과 15일에 전화로 주시면 됩니다.”
혹시나 나에게도 특권을 줄까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 안 되는구나.
이복남 쉐프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김명진 차장의 어깨를 토닥인 후 주방으로 돌아갔다.
“입맛에는 맞으세요?”
김명진 차장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물론이죠.”
“근데 연애하세요?”
“네. 합니다.”
“그럼 언제 소개 좀 해 주세요.”
“네?”
내가 무안한 표정을 짓자,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친해지면요.”
“예. 그럴게요.”
마음에도 없는 답을 하자, 그는 동파육 한 점을 입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부장님, 이번에 서른 되셨죠? 제가 한 살 어린데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요?”
“네.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씩 웃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소문처럼 대단한 음식들을 맛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쉐프님은 어떻게 알았어?”
“그냥 일 때문이죠. 쉐프님이 방송하시기 전부터 조금 친분이 있었습니다.”
“전에 한정식집도?”
“거긴 좀 재미있는 사연이 있었어요.”
“재미있는 사연?”
“거기 사장님 딸이 일진 애들한테 괴롭힘을 받아서, 학교에 찾아간 적이 있었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김명진 차장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의 기억을 듣고 이를 이용하는 나만큼.
“참 신기한 인연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일하는 건 어때?”
“해 오던 일이라 크게 힘들지 않습니다. 회사 분위기도 좋고, 이전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전이면 태산그룹?”
“예. 그렇죠. 하하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겸손한 그에게 마음이 갔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인근 포차로 향했다.
너무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았는데, 왠지 그와는 소주를 오래 마셔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우린 회사와 일 얘기를 한참 동안 나눴다.
가치관이 잘 맞는 그와 얘기를 하면 할수록 즐거웠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다 있네.>
<팀장님들 말처럼 고 부장님보다는 좋은 분이신 것 같네.>
서로 번갈아 따르던 소주병에서 들리는 기억.
김명진 차장도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동수 부장에 대한 생각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고 부장님이랑 일하는 건 어때?”
“그냥 그렇습니다.”
“김민정 팀장이랑 전에 크게 한바탕했다고 들었는데.”
“그랬나요? 전 외근 중이라 몰랐습니다.”
그는 고동수 부장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면서, 내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 행동은 고동수 부장의 얘기는 그만하자는 일종의 신호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소주병을 잡아 그의 잔에 따라줬다.
<원 부장님 반만 같아도 좋았을 겁니다.>
소주병에서 들려온 김명진 차장의 조금 전 기억.
고동수 부장에게 확실히 불만이 있구나.
나는 그의 기억을 듣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생각났다.
“그래, 명진 차장 목표는 뭐야?”
“1등 해 보는 겁니다. 쿠폰으로 1등은 해 봤는데, 그보다 더 큰 커머스 시장에서 1등 하는 겁니다.”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목표.”
“개인적인 목표요? 글쎄요.”
술잔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김명진 차장은 처음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 욕심이 많습니다. 부장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언젠간 마켓 프레시의 대표이사까지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그게 뭐가 죄송해?”
이렇게 능력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이는 내가 정확히 원하던 답이다.
나는 술잔을 비우고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최구열 이사님은 만나 본 적 있어?”
“예. 한번 식사를 했는데, 젠틀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
“네, 역시 그룹폰의 신화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덕분에 커머스에 크게 매력을 느꼈고요.”
사람을 보는 눈은 그리 정확하지는 않구나.
능력과 욕심이 많은 김명진 차장.
그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일은 철저하고, 사람을 믿는, 사람과의 관계로 일하는 사람이다.
나는 다짐했다.
지금은 최구열 이사의 사람인 그를, 언젠간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 * *
“민정아! 제발 일 좀 하자 응?”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회사에 나오는 거야? 너도 페미인가 그거냐?”
“부장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왜? 내가 없는 말 했어? 걸핏하면 여자, 여자 타령이잖아! 내가 언제까지 네 사정 봐줘야 해?”
아침부터 고동수 부장의 목소리가 파티션을 넘었다.
얼마나 그의 목소리가 큰지, 부서원 모두가 일을 멈추고 파티션 너머를 힐끔거렸다.
김민정 팀장에게 민정이라니…….
그것도 다른 부서원들이 모두 듣게 큰소리로.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파티션을 돌아서 고동수 부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왜요?”
나를 본 고동수 부장이 미간을 구겼고, 나는 고개를 숙인 김민정 팀장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너무 크시네요.”
“내 부서원 혼낼 때도 눈치 봐야 합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나는 김민정 팀장의 앞을 막아서며, 고동수 부장을 노려봤다.
그러자 고동수 부장은 코웃음을 치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관하지 마세요. 우리 부서 일에 원 부장이 왜 나섭니까?”
“이런 말들이 성희롱인 건 아십니까?”
“걸핏하면 성희롱, 성희롱. 이거 무서워서 어디 회사 다니겠나.”
“고동수 부장님!”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사무실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전화를 받던 직원들도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고, 조용히 자리를 뜨는 직원들도 여럿 보였다.
“왜요?”
“잠깐 얘기 좀 하시죠.”
회사의 분위기를 위해 그를 따로 불러냈다.
내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고동수 부장은 씩씩대며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문을 닫고, 그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바쁩니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닫힌 문 앞에 서서 미간을 구겼다.
“앞으로 다른 부서원들 앞에서 팀장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니요. 그래야 애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원 부장님이 어려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사람은 계속해서 자극을 줘야 변화가 생깁니다. 특히 여자는 더더욱 그렇고요.”
“어려서 모른다고요?”
내가 화를 내자, 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손을 저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그 말은 취소하죠.”
나는 화를 참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김민정 팀장이 지각은 잦아도, 한 번도 기한이 늦은 적이 없습니다.”
“그건 원 부장님이 볼 때나 그렇겠죠. 기본도 안 된 애가 무슨 MD를 한다고. MD는 시간 관념이 철저해야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맞춰 주는 게 팀이죠.”
“그럼 피해 보는 사람은요?”
“누가 피해를 봅니까?”
“내가 봅니다. 내가 영 보기가 싫거든요!”
꽉 막힌 사람이다.
대충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부장님 부서원들이 불쌍해지네요.”
“뭐요?”
고동수 부장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싸움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
그리고 그때, 그의 뒤에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야!”
강하게 열린 문고리에 허리를 부딪친 고동수 부장.
그는 허리춤을 잡고 화가 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누구야?”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몰랐습니다.”
잔뜩 미안한 표정의 김명진 차장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세요? 병원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앞으로는 살살 열어.”
“예. 죄송합니다.”
꽤 아파 보였다.
문이 얼마나 세게 열리던지, 마치 일부러 밀어 버린 것 같았으니까.
김명진 차장은 재빨리 고동수 부장을 부축하고, 그의 자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회의실을 나오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에라이. 쓰레기 새끼야.>
김명진 차장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