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86화>
87. MD라면 정확히 예측해야죠
3일 후.
MD 사업부의 중앙에 높은 파티션이 쳐졌다.
사업부 인원들을 한눈에 볼 수 있던 내 자리는 한쪽으로 치우쳤고.
그 뒤로 가공, 신선, 음료, 특판, 펫팀이 일렬로 자리를 잡았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고동수 부장.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 부장님. 잘 지내셨죠?”
오랜만에 보는 그가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잘 지냈습니다. 고 부장님은요?”
“하하하, 저도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여긴 오프라인 티켓 사업을 했던 김명진 차장입니다. 부장님도 아시죠?”
“네?”
“쿠폰북이요.”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훈남형 얼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김명진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김명진입니다.”
“원지훈입니다. 쿠폰북을 운영하셨다고요?”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강남, 홍대, 잠실, 건대 등.
유명 오프라인 상점들의 쿠폰을 인쇄한 쿠폰북.
매주 발행하는 쿠폰북은 한국의 미슐랭이라 불리며, 한때 최고로 인기가 있던 주간 매거진이었다.
소비자들은 쿠폰북이 선정한 상점을 믿었고.
상점들은 자발적으로 할인율이 높은 쿠폰을 걸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쿠폰북의 인지도가 오르자.
M&A 전문 기업인 태산그룹이 비싼 돈을 주고 사업권 전부를 인수했다. 그들은 쿠폰북을 전국구 사업으로 확장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밝히며, 수많은 오프라인 식당과 소비자들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겨우 2년 만에 사업을 포기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태산그룹이 상점들에 무리한 광고비를 요구하면서 소비자의 신뢰를 잃은 것이라 했지만, 이는 명확하지는 않았다.
고동수 부장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김명진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 김명진 차장님은 쿠폰북의 실 창업자이자, 영업이사로 모든 쿠폰을 직접 영업했던 분입니다.”
“그렇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인사에 김명진이라는 남자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답했다.
“원 부장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식품 카테고리에서는 국내 최고시라고요.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아닙니다.”
고동수 부장과 김명진 차장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간 것을 보고.
한 발 뒤에서 지켜보던 박대영 차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좀 알아봤는데요.”
“뭘요?”
“김명진 차장이요. 부장님 같은 괴물이더라고요.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새벽부터 청소하고, 식자재 배달하면서 영업했답니다. 심지어 식당 사장 아이까지 과외를 해 준 적도 있답니다.”
좀 의외다.
고생은 전혀 해 보지 않은 것 같은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였는데.
역시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그래요?”
“네. 완전 밑바닥부터 천천히 다져온 노력파라고 합니다.”
“어디서 들으셨어요?”
“제 친구 놈이 태산그룹에 M&A 파트장이거든요.”
“근데 쿠폰북 사업은 왜 접었데요?”
“저 괴물 때문에요. 김명진 이사가 아니, 김명진 차장이 한 달 정도만 근무하다가 사표 던지고 미국으로 가 버렸대요. 헤더가 사라지니까, 우왕좌왕하다가 주요 협력사들 다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한 달이요? 흠. 계약서에 추가조항 안 넣었나 보죠?”
M&A를 할 때 주요 임원이나 직원들이 이직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는 것은 일종의 관례다. 그래서 나도 최소 1년 이상 마켓 프레시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항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는데.
내 질문에 박대영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급하게 인수하느라 빼먹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김명진 차장은 왜 사라진 거랍니까?”
“태산 애들 말로는 지네 대표랑 김명진 차장이 한 달간 대립하다가, 결국 김명진 차장이 두 손 들고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사내 정치 싸움에서 졌다는 말인가?
박대영 차장의 설명을 듣고 나니, 김명진이라는 인물이 더 궁금해졌다.
생각보다 괜찮은 이력과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었고, 직접 일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기대되는군요.”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고.
고동수 부장과 김명진, 이진성 차장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부장님 우리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그러시죠. 그럼 저희 차장님들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예. 편할 대로 하세요.”
나와 박대영, 장선영 차장.
고동수 부장과 김명진, 이진성 차장은 나란히 고급 한정식집으로 갔다.
이곳을 예약한 이진성 차장이 앞장섰고, 우린 식당의 직원이 안내해 주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섰다.
“여기 음식 정말 괜찮습니다. 특히 식전에 나오는 전복죽이 예술입니다.”
인근의 맛집을 꿰고 있는 이진성 차장이 엄지를 세우며 말했다.
잠시 후.
주문한 코스 요리들이 들어오면서, 사장으로 보이는 60대의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이고,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진성 차장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밝게 웃어 보였다.
“하하, 사장님. 제가 좀 바빠서. 앞으로 자주 올게요.”
식당의 사장은 이진성 차장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조용히 식사를 준비하는 김명진 차장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이사님. 잘 지내셨죠? 진짜 이게 얼마 만입니까?”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제가 어떻게 이사님을 잊겠습니까?”
“저는 기억 못 하시는 줄 알고, 일부러 조용히 있었는데.”
차분한 표정으로 답하는 김명진 차장.
그는 손을 닦던 물수건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친분이 있는 건가?
우린 식당의 사장과 김명진 차장의 대화에 집중했다.
“우리 이사님은 그동안 더 미남이 되셨네요.”
“고맙습니다. 따님은 잘 지내죠?”
“그럼요. 이놈의 지지배가 요새 연애질하느라 아주 난리입니다.”
“사장님 쏙 빼닮아서 예쁜 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10년만 젊었더라면 바로 대시했을 겁니다.”
식당의 사장은 김명진 차장의 어깨를 툭 치고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이사님 같은 남자만 데려오면 내가 소원이 없겠습니다.”
“사장님, 오랜만이라고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주 좀 오세요. 오늘 제가 특별히 준비했으니까,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시고요.”
“그럼 사장님의 타락죽을 오늘 맛볼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죠! 전복 말고, 임금님들 드시던 그 타락으로 올려 드릴게요.”
이 식당은 이진성 차장이 섭외한 곳이다.
그리고 식전에 먹는 전복죽이 일품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이진성 차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매사에 솔직하고 직선적인 장선영 차장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어 댔다.
“이 차장님, 한 방 제대로 먹었네요?”
“뭘요?”
이진성 차장이 미간을 구기자.
장선영 차장은 손사래를 치고,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렸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신경 쓰지 마세요.”
“흠…….”
이진성 차장은 불편한 내색을 했고.
김명진 차장은 재빨리 이진성 차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사장님. 전복죽이 그렇게 일품이라던데요?”
“그럼 둘 다 드릴까요?”
“번거로우실 텐데요. 그냥 전복죽으로 주세요.”
“아닙니다. 전혀요! 둘 다 해서 드릴게요.”
고급스러운 놋그릇에 담아 온 하얀 타락죽.
요리 좀 한다는 한정식집에 가도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사장이 자랑하던 타락죽은 다른 곳과는 정말 달랐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와. 이런 타락죽은 처음인데요?”
내 말에, 김명진 차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입니다.”
“차장님은 어떻게 여기 사장님을 아세요?”
“이곳 사장님이 예전에 백반집을 하셨어요. 그때 맛이 좋아서 쿠폰북 메인에 소개해 드렸는데, 손님이 조금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쿠폰북 메인 표지에 나오면, 건물을 산다는 여담도 있었는데.
김명진 차장은 겸손하기까지 했다.
“자. 드시죠.”
점심이라고 하기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음식들.
한정식집 사장이 신경을 써 준 것이 역력해 보였다.
“여기 진짜 맛있네요.”
보통 이런 인사는 이진성 차장이 듣는다.
그는 이런 말 듣는 것을 즐겼기에, 자신만의 맛집으로 많은 사람을 데려갔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람들은 김진명 차장 덕분에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한정식집 사장이 다시 김명진 차장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내가 계산대에 카드를 내밀었다.
“아닙니다. 사장님이 오늘은 대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식당의 사장이 달려와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마켓 프레시 분들이셨구나. 앞으로 우리 이사, 아니지 김명진 차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인사를 하고, 직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지시를 받은 직원이 달려가 쇼핑백을 들고 왔고, 사장은 손수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저희 누룽지입니다. 집에서 끓여 드셔도 되고, 그냥 간식처럼 드셔도 맛있을 겁니다.”
많은 식당을 다녀왔지만, 이런 대접은 나도 처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사장이라는 여자가 이렇게 김명진 차장을 극진히 대하는 걸까?
고동수 부장 또한 궁금했는지, 밖으로 나오자마자 김명진 차장에게 물었다.
“김 차장, 여기 사장이랑 많이 친해?”
“아니요. 그냥 조금 아는 사이입니다.”
“그래? 내가 볼 때 조금이 아니던데?”
“아닙니다.”
김명진 차장은 겸손한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한 표정의 이진성 차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떤 것 같아요?”
“뭐가요?”
“김명진 차장이요.”
“글쎄요. 뭐, 두고 봐야죠.”
그는 자신의 특기를 뺏겼다는 생각에 입을 댓 발이나 내밀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후 3시.
MD 사업부의 차장과 팀장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김명진 차장은 준비한 인쇄물을 나눠 주고,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오프라인 식당의 할인 쿠폰을 팔겠다는 사업계획서.
군더더기 없는 PPT 문서와 목표치까지 명확히 설정한 문서는 사업부 내에서 문서 작업을 가장 잘하는 김경일 팀장보다 훌륭해 보였다.
아니, 디자인까지 깔끔한 김명진의 것이 훨씬 더 좋았다.
그리고 다른 차장, 팀장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함께 하게 된 김명진이라고 합니다.”
사업계획서를 보던 팀장들이 박수를 보내자.
김명진 차장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강한 먹거리를 고민하는 마켓 프레시. 우리와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카테고리이며, 제가 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준비해 봤습니다.”
PPT를 넘겨보던, 김경일 팀장이 손을 들었다.
“차장님. 예상 매출을 너무 높게 잡은 거 아닙니까?”
“어느 부분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가득한 번화가에 가 보셨나요? 프랜차이즈 아니면, 경쟁이 어렵습니다. 지금 잡아 두신 목표치는 그에 비하면 좀 과한 것 같습니다.”
“그 표는 홍대, 건대의 유동 인구를 기준으로 잡은 수치입니다. 인근 프랜차이즈 식당들의 매출과 동향을 파악했고, 이에 경쟁이 가능한 메뉴들만을 1차로 선정한 겁니다.”
“소비자의 선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니요. MD라면 정확히 예측해야죠.”
당당한 표정의 김명진 차장.
점심시간에는 맛집을 꿰고 있는 이진성 차장을 PT 중에는 페이퍼 작업에 능한 김경일 팀장을 차례로 넘어섰다.
유동 인구를 기준으로 수치를 예상했다라…….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말 그의 예상치에 접근할 수 있을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