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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85화 (8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85화>

86. 제 마음이 뭔데요?

우린 멍하니 서서 엘리베이터 안의 하연두를 바라봤다.

재빨리 손으로 눈을 가린 하연두.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열렸던 문이 닫히고.

나와 김지영 이사는 말없이,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적이 이어진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1층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안의 하연두가 아무런 버튼을 누르지 않았나 보다.

두꺼운 철문을 앞에 두고 꽤 긴 정적이 이어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엘리베이터의 올라가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문이 열리자, 하연두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 이사님. 부장님.”

처음 보는 것처럼 말했지만 어색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연두 씨. 혹시 오해할까 봐서 얘기하는데.”

내가 말하자, 하연두는 꽤 노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오……. 오해요? 아……. 아니, 진짜 아……. 아무것도 모…….못 봤어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나는 김지영 이사와 하연두를 번갈아 보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두 씨 어디 가?”

“매……. 맥주 사러요. 오늘 보너스 나와서 친구랑 한잔하려고요.”

“그래? 그럼 같이 한잔할까?”

“네? 친구가…….”

“친구도 내려오라고 해. 내가 살 테니까.”

“아……. 그게.”

“괜찮아.”

“그게 좀…….”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했지만, 분위기는 급속하게 냉랭해졌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바꾼 것은 다름 아닌, 김지영 이사였다.

“따라와요. 연두 씨.”

“…….”

김지영 이사는 차가운 표정을 하고,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누르고 나에게도 빨리 타라는 손짓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김지영 이사는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에 있는 맥주와 소주를 식탁 위에 꺼내 놨다.

너무도 태연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나와 하연두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그러자.

“지훈아. 베란다에 나초랑 치즈 있으니까, 가서 좀 담아 와.”

“알았어.”

“연두 씨는 나 좀 도와줄래요?”

김지영 이사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냉장고에 있는 치즈와 햄 등을 꺼내 간단한 안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린 별다른 대화 없이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숨 막히는 30여 분이 지나고.

김지영 이사는 테이블에 앉아, 맥주 캔을 뜯어 나에게 건네줬다. 그리고 자신의 맥주를 뜯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두 씨.”

하연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네.”

“연두 씨 생각이 맞아요. 우리 한 달만 만나 보기로 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축하드려요.”

“연두 씨도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죠?”

“예…….”

“그리고 나 솔직히 연두 씨 마음 알고 있었어요. 오늘 확실히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고개를 푹 숙이는 하연두.

김지영 이사가 쐐기를 박으려는구나.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넘어가고 싶은 마음에, 둘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자 한잔하시죠. 연두 씨, 친구한테 연락했어? 걱정할 거 같은데?”

하연두는 내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김지영 이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식탁 위의 소주를 뜯어, 병째로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연두 씨!”

내가 말리려고 불렀지만, 하연두는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셨군요. 언제부터요?”

“내가 처음 여기로 이사 온 그날이요.”

“…….”

“한 달입니다. 만약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깔끔하게 물러날게요. 그때는 연두 씨 마음대로 하세요.”

“제 마음이 뭔데요?”

“…….”

하연두의 발언에 차갑게 바라보는 김지영 이사.

아…….

분위기가 묘해지는구나.

이건 내 인생에서 가장 난처한 순간이다.

솔직히 하연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수를 존경하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기억을 읽는 오른손 덕분에 알았는데.

김지영 이사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게 여자의 촉이라는 건가?

“후…….”

내가 길게 한숨을 내 쉬자, 두 여자가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지훈아. 불편하면 방에 가 있어.”

김지영 이사가 차갑게 말하자.

취기가 올라온 하연두가 김지영 이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부장님, 듣고 가세요.”

“지훈아. 빨리 들어가!”

“아니요! 여기서 들으시라고요!”

“연두 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사님이 명확히 하자고 하셨잖아요.”

집에 가고 싶다. 미쳐 버릴 만큼 난처하다.

그래도 일단 이 둘은 떼어 내야 한다.

특히,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하연두는 지금 극도로 위험한 상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두의 어깨 아래쪽을 살짝 잡아서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때, 그녀가 입고 있는 노란 카디건에서 기억이 들려왔다.

<왜 이사님이야. 왜 하필 이사님이냐고.>

회사의 여직원 중에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남자 임원 사이에서 항상 당당한 김지영 이사를 존경하는 직원들이 많다.

하연두도 그 여직원 중 한 명이었나?

나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두 씨, 가자. 취한 거 같은데 내가 데려다줄게.”

“부장님도 알고 계셨죠?”

“뭐를?”

“그래서 한동안 절 피하셨던 거잖아요.”

사실 그랬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조금씩 피했던 것은 사실이다.

“아니야. 내가 뭘 알아?”

“기억나세요? 처음으로 국밥집에 데려가서 MD에게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던 거요.”

“그야…….”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하하, 연두 씨 많이 취했네. 가자. 데려다줄게.”

내가 대충 둘러대며 하연두를 일으키려고 하자, 그녀는 내 손을 뿌리쳤다.

“저도 처음에는 착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선배로서 존경하는 마음이었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사님,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부장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부하 직원으로 저를 대해 주세요.”

김지영 이사는 물끄러미 하연두를 바라봤다.

그리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이사님, 부장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이거 진심입니다.”

하연두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지러웠는지, 몸을 휘청이며 한 손을 벽에 대고 중심을 잡으려 했다.

“연두 씨,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김지영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두는 한 손을 내밀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찮습니다.”

“연두 씨,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내가 말했지만, 하연두는 한 손을 허공에 흔들고 아무런 대꾸도 없이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신고 왔던 신발을 신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 버렸다.

“후…….”

긴 한숨을 내쉬는 김지영 이사.

그녀는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짓말이야.”

“응?”

“거짓말이라고. 딱 봐도 알잖아. 지훈아.”

“…….”

“난 연두 씨가 좋아. 젊고, 예쁘고, 상냥하고, 착한 아가씨잖아.”

“그래서?”

“난 한 달 후에 네가 어떻게 행동하던,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거야.”

나이 차이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한 달이라는 연애 기간을 정해 둔 것이.

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한 달이라는 시간만 지켜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말한 그녀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지영아.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김지영 이사는 나를 떼어 내며, 미간을 구겼다.

“이게 미쳤나?”

“왜?”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라.”

입을 삐쭉 내미는 김지영 이사.

난 그녀의 이 습관이 너무도 좋다.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내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는 내 양 볼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 위로 살포시 포갰다.

“오늘은 여기까지.”

“치.”

나는 그녀가 방금 했던 것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자 김지영 이사는 해맑게 웃으며, 내 엉덩이를 툭 치고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이것 좀 같이 치우고 가.”

“알았어.”

김지영 이사는 설거지를 했고.

나는 식탁 위의 병과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연두가 비워 낸 소주병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어차피 나랑은 어울리지 않았잖아. 차라리 잘됐어.>

내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이튿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연두는 평소처럼 밝고 유쾌했지만,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그녀가 속해 있는 특판팀의 근처로도 가지 못했다.

사람의 기억을 듣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능력을 이용해서 많은 돈과 명예를 얻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듣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듣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오늘은 뭐 이렇게 진지해? 진지는 잡쉈나?”

점심을 먹고 온 김태하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심한 김치찌개 냄새를 풍긴다.

“태하야.”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응?”

“김치찌개 먹었나 보네.”

“응. 완전 개 코네. 개 코.”

“또 은지 씨랑 단둘이?”

비밀 연애를 하는 김태하 팀장과 이은지.

전에는 종종 연애하는 장면을 나에게 걸렸는데, 요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팀원들이랑.”

“왜 둘이 안가고?”

“은지 씨랑은 얼마 전에 헤어졌어.”

고개를 돌려,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김태하 팀장을 바라봤다.

“왜?”

“너도 알잖아. 내가 좀 평범하지 않은 집안에서, 평범하지 않게 살아왔다는 거. 은지 씨가 결혼 얘기를 조금씩 꺼내는데, 힘들더라고.”

“그래서?”

“그냥 헤어지자고 했어.”

사랑이 현실을 이기지 못했구나.

김태하는 결국 자신이 가진 특별한 조건들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구나.

“태하야. 소주 한잔할까?”

“오늘?”

“나 외근 갔다가, 들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원래는 외근이 끝나고 바로 퇴근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김태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사내 연애의 선배이자, 김지영 이사의 동생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와.

“어디로 가는데?”

“마장동 청년고기.”

“그럼 내가 아예 마장동으로 넘어갈까? 오랜만에 신선한 육회가 땡기네.”

“알았다. 이따 전화해.”

“오케이!”

김태하 팀장이 자리로 돌아가고.

PC의 스피커에서 사내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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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발령 공고

디지털 커머스 사업부(가전, 유아동, 건강, 베이커리)

부장 고동수

차장 김명진

차장 이진성

가전팀

팀장 박호영, 과장 이만종, 대리 김동진, 대리 김인서

푸드 커머스 사업부(가공, 신선, 음료, 특판, 펫)

부장 원지훈

차장 박대영

차장 장선영

음료팀

팀장 이미정, 과장 김신혜, 대리 이정미, 대리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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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쪼개질 것을 알았던 나는 태연하게 공지사항을 확인했다.

김명진, 이 사람은 누구지?

MD 사업부나 전략기획부의 직원이 아닌 처음 듣는 이름이다.

차장으로 진급한 이진성은 눈치 없이 히죽거리며 돌아다녔고, 가전팀의 새로운 팀장이 된 박호영이 그의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다녔다.

이진성 팀장은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미안했는지 고개를 내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와 빠르네! 빨라.”

마성근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

“참 태세 전환이 빨라요. 어제까지는 부장님만 보면 밥을 먹자고 달려들더니.”

“다 그런 거죠.”

“섭섭해하지 마세요. 부장님 라인에는 제가 있으니까.”

“하나도 섭섭하지 않아요. 장 팀장님도 차장으로 진급했고, 다음엔 마 팀장님도 기회가 있겠죠.”

“하하하, 정말요?”

“네. 이제 조금 더 바빠지겠네요.”

나는 마성근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의자에 걸려 있는 외투를 걸쳐 입었다.

“어디 가세요?”

“외근이요. 오늘 아마 못 들어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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