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84화>
85. 넌 참 쿨해서 좋겠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이 재물을 그대들에게 바치겠나이다.”
마성근 팀장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전년도 실적에 대한 특별 상여금이 나오자, 두툼한 봉투를 양손으로 들고 허공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사실.
회사 매출만 보면 적자였기에, 직원들은 상여금을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김지영 이사는 창고의 재고와 제조사에 선지급이 나간 금액까지 모조리 계산해, 어렵게 각 사업부에 상여금을 지급했다.
월급 계좌로 상여금을 쏴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녀는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회사의 유부남들에게만 현금으로 지급하는 이벤트.
회계팀이 오만 원권 지폐를 직접 나누느라 힘들었겠지만, 실제로 두둑한 봉투를 받은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좋아요?”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은 내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게 얼마 만에 만져 보는 현금인지 아십니까? 맨날 마누라가 용돈 넣어 준 체크카드만 들고 다녔는데.”
“그럼 그건 형수님께 비밀인가요?”
“당연하죠.”
“흠……. 과연 그게 될까요?”
“오늘은 마프의 모든 유부남이 자유를 찾는 날입니다. 프리덤!”
그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릎을 꿇고, 양팔을 벌리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그만 좀 하세요.”
“창피합니다.”
김대성과 이우진이 마성근 팀장의 양팔을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마성근 팀장은 두툼한 봉투에 연신 입을 맞추며, 허공에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마치,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부장님은 이번에 두둑이 들어왔지?”
김태하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서 손을 올렸다.
“응. 생각보다 많네.”
“얼마나 들어왔길래 생각보다 많아?”
“말해 주면, 놀랄걸?”
“난 말해 줄 수 있는데. 우리 깔까?”
“좋아. 그럼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다.”
“오케이.”
우린 높은 파티션 뒤에 몸을 숨기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
“…….”
너무 뻔하다.
둘 다 금액을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닫았다.
김태하 팀장은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었는지, 깔깔대며 나를 살짝 밀쳤다.
“뭐야? 어디서 쌥쌥이 짓이야!”
“지는?”
“이번엔 진짜 까는 거다!”
“오케이 콜!”
다시 수를 세고.
“이천 칠백 이십!”
“…….”
순진한 김태하 팀장은 깠지만, 나는 입만 뻥긋했다.
“에이 사기꾼 새끼!”
이천 칠백 이십이라…….
내가 받은 칠천 사백여만 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직급의 차이였을까?
아니면 김지영 이사가 설마?
아니다. 김지영 이사는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오 김태하! 생각보다 많이 받았네.”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 메신저의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부장님!
- 부장님 고맙습니다.
- 다음에 부장님 시간 되실 때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 모든 유부남에게 자유를!
- 얼마 받았냐고 이 사기꾼 새끼야!
김태하 팀장을 제외한 부서원들 대부분이 상여금에 대한 감사 인사를 보내 왔다.
내가 준 것도 아닌데…….
그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보내고, 하연두의 메시지에서 잠깐 멈칫했다.
- 부장님……. 저는 계산이 잘못된 거 같아요. ㅠㅠ
- 왜?
-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 많으면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쓰면 되는 거야!
- 그게 아니라, 회계팀 직원이 저 때문에 혼날까 봐서요.
역시 하연두는 마음이 여리고 착하다.
- 그냥 써! 맞게 들어갔으니까.
- 그래도……. 한 번만 확인해 주시면 안 돼요?
고집은…….
나는 피식 웃으며 키보드에 다시 손을 올렸다.
- 얼마나 들어왔는데?
- 그게…….
- 힘들면 말 안 해도 돼. 나도 연두 씨 상여금 얼마 들어갔는지 모르니까.
- 아니요. 백만 원 조금 넘어요. ㅠㅠ
- 헐. 많긴 많네.
- 그죠? 이상하죠?
나는 하연두의 순수함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 다 그 정도는 받아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 정말요?
- 그래 정말.
- 부장님, 감사합니다. ^____^
- 내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연두 씨에게 고마워하면 돼.
- ㅎㅎㅎ 네.
나는 메신저에 마지막 인사 글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노크하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
창문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더욱 빛나게 해 줬다.
“오늘 너무 예쁘다.”
“원지훈 부장님!”
정색하며 말하는 그녀.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지훈아. 장난치다가 죽는다.”
김지영 이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풀고,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차 한 잔 줄까?”
“예.”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상여금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사업부 식구들을 대표해서 감사 인사드리려고요.”
“당연한 거잖아. 작년에 다들 노력했잖아.”
김지영 이사는 소파의 상석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평소 앉던 자리에 앉아,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저는 뭐 이렇게 많이 주신 겁니까?”
“돈 필요하잖아.”
“왜요?”
“내년 우리 상장 대비해야지. 돈 펑펑 쓰지 말고, 잘 아껴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김지영 이사는 그런 나를 보고.
코를 찡긋하며 너무도 해맑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럴게요.”
“아, 그리고 다음 주에 인사 발령 공고 나갈 거야.”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나를 보고, 김지영 이사가 미간을 구겼다.
“뭐 이렇게 쿨해?”
“그럼 울까요?”
“넌 참 쿨해서 좋겠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김지영 이사.
그녀는 매번 정근영 대표와 최구열 이사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다.
상여금이 나갈 때도, 다른 임원들의 비위를 맞췄을 그녀가.
“이사님도 조금만 편하게 생각해요.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
“대안은 준비했어?”
“아니요. 이제 슬슬 생각해 봐야죠.”
내 답에.
김지영 이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후……. 매번 얘기하지만, 언제든 힘든 것 있으면 나한테 말해.”
“든든하네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 퇴근하고 뭐 하세요?”
“너! 자꾸 장난칠래?”
자신이 있기에 장난이 나오는 것이다.
고동수 부장이 아닌, 최구열 이사가 MD 사업부를 관리한다고 해도 이겨 낼 자신이 있다.
나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힘든 거 있으면 말하라면서요. 진짜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참, 이런 꼬마가 뭐가 좋다고.”
“이따 저녁 살게요. 상여금 많이 받은 기념으로.”
“그래.”
오후 6시 30분.
조용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007작전을 하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고, 김지영 이사의 차가 세워진 곳으로 향했다.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잠겼던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있던 김지영 이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 파스타 먹고 싶은데. 괜찮아?”
“통했네. 나도 파스타 먹고 싶었는데.”
내가 말을 놓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퇴근했다 이건가?”
“왜요? 김지영 이사님, 하지 말까요?”
“아니. 내가 얼마나 듣고 싶었는데. 고개나 숙여!”
김지영 이사는 철저했다.
회사에 있는 CCTV들을 피하고자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액셀을 밟아 최대한 빨리 회사를 벗어나려 했다.
그렇게 우린 막히는 도로를 뚫고, 작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김지영 이사는 포크로 샐러드를 헤집다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훈아.”
“응?”
“우리 잘하는 걸까?”
나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나이 차이는 10살.
외모로만 보면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지만, 그래도 10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어려운 숫자다.
“뭐가 걱정인데?”
“그냥. 전부다. 회사, 아버지, 태하, 우리 나…….”
나이라는 단어를 차마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김지영 이사.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녀의 하얀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누나, 우리 그냥 지금 이 시간만 보자. 맛있는 거 같이 먹고, 즐거운 거 함께 하고, 힘든 일은 나누고.”
“…….”
“난 지금 너무 좋아. 그리고 누나도 나처럼 좋았으면 좋겠어.”
“넌 참 쿨해서 좋겠다.”
“그럼 누나도 좀 쿨해지던가.”
김지영 이사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나는 그녀가 이 표정을 지을 때가 참 좋다.
유난히 빨갛고 작은 입술을 내밀 때마다, 입을 맞추고 싶어질 정도로.
내가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손을 슬며시 빼내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지훈아.”
“응?”
“일단 우리 한 달만 만나 보는 거로 할까?”
“그건 이미 저번에 다 끝난 거 아니야? 저번에 강릉에서 내가…….”
해돋이 때의 입맞춤을 말하려는 순간.
그녀는 이를 눈치채고 한 손을 올려 말을 끊어 냈다.
“정한 건 없잖아.”
“뭘 정해?”
“난 정확히 했으면 좋겠어. 우리가 남들처럼 평범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건 정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가는…….”
“아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김지영 이사는 지금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랐다.
현실적이고, 진지했으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생각을 존중한다.
그리고 최대한 그녀의 의견에 따라주고 싶다.
나는 피식 웃고, 팔짱을 낀 채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떻게 정할 건데?”
“우리 일단 한 달만 연애하는 거다. 그리고 누구든 상대방에게 실망하면, 쿨하게 헤어지는 거야.”
“오케이. 난 자신 있어.”
“그리고 하나 더!”
“뭔데?”
김지영 이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누나라고 부르지 마. 그거 싫어.”
“그럼?”
“그런 거 있잖아. 애…….”
“애칭?”
“나 그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 늙어서 주책이지?”
사실, 나는 이렇게 간지러운 것들을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다.
“늙긴 누가 늙어? 그리고 나도 꼭 해 보고 싶었어. 애칭……. 그거.”
고개를 숙이고, 포크로 파스타 면을 뒤적거렸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지만, 그녀는 지금의 시간을 즐겼다.
“여니 어때? 발음에 약간 에이치를 섞어서 허니 같이 해 봐.”
“여허니. 그거 좋네.”
내가 웃으며 답하자.
그녀는 여니라는 단어를 혼자 중얼거리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너무 촌스러워.”
“그럼?”
“자기나 달링 같은 건 간지럽겠지?”
“아……. 좀 그렇긴 한데 자기가 원한다면 그렇게…….”
“아니야. 아무래도 이건 너무 간지러워.”
“그럼?”
“애기야는 어때? 나 이거 정말 듣고 싶었거든.”
“그래. 애기야, 우리 밥 계속 먹을까?”
“아니다. 그 단어 들으니까 육아에 찌들어 있는 친구가 생각나네.”
그렇게 김지영 이사는 다양한 단어 들을 뱉어 냈다.
나는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단어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영아. 이건 어때?”
내 말에, 그녀는 입에 미소를 띠고, 미간을 구겼다.
“이게 어디 건방지게 누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왜 우리 지영이 뭐가 문제인데?”
“그건 너무 도전적이지 않아?”
“난 좋은데? 지영이, 우리 지영이, 예쁜 지영이.”
“치…….”
그렇게 우린 식사를 마치고, 영화를 본 후, 헤어지기 아쉬운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다른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그녀.
나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한 손으로 머리를 넘겨줬다. 그리고 턱을 그녀의 작은 어깨에 기대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영아. 잘 자.”
엘리베이터의 닫힌 문에 비친 김지영 이사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어?”
눈을 동그랗게 뜬 하연두가 나와 김지영 이사를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