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80화>
81.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무려 8시간을 달려 도착한 정동진.
해돋이 명소라는 곳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와 김지영 이사는 비교적 한산한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우고, 해변으로 내려가는 난간 앞에 나란히 섰다.
여명이 밝아오고.
김지영 이사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나는 그녀와 잡은 손을 내 점퍼에 집어넣었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수평선을 보는 그녀.
나는 반대쪽 손으로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줬다.
김지영 이사는 그런 나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발그스름하게 빛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로 내 입술을 가져갔다.
내 입술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포개지고.
내 볼 위로 뜨거운 그녀의 눈물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강렬한 태양이 그 위로 조금씩 모습을 보였다.
“와아아!”
근처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고, 우린 말 없이 그 태양을 바라봤다.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훌쩍.
그녀는 매서운 바람에 새빨개진 코를 훌쩍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어깨에 그댄 그녀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새빨간 태양을 가득 담은 그녀의 눈에서 다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갈까?”
“아……. 아니야. 조금만 더 이렇게 있자.”
“그래.”
우린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태양을 바라봤다.
이미 주변은 밝아졌고,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갔지만, 우린 그대로 먼바다를 바라봤다.
미세하게 몸을 떠는 김지영 이사.
나는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줬다.
“춥지?”
“너는?”
“난 괜찮아.”
“근데 너 이제 아주 대놓고 반말이네?”
“그래서 싫어?”
“치.”
입술을 삐죽 내미는 김지영 이사.
나는 앙증맞고 귀여운 그 모습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양 볼을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야!”
나는 그녀의 볼을 잡은 손을 떼어 내며, 환하게 웃었다.
“배 안 고파?”
“좀.”
“아침부터 회는 무리인가?”
“아니. 배고파서 다 먹을 수 있어.”
“그래. 가자.”
우린 근처 횟집으로 들어갔다.
반찬들이 나오자.
김지영 이사는 재빨리 휴지를 가지런히 깔아 그 위에 수저를 놓고, 물잔에 물을 따라 줬다.
“선남선녀네.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어요?”
나를 챙겨 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던 식당의 아주머니가 너스레를 떨었다.
“네?”
김지영 이사가 머뭇거렸고.
그녀가 곤란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답했다.
“좀 됐어요.”
“아가씨가 참 다소곳하네. 몇 살 차이예요?”
“동갑입니다.”
“그렇구나. 난 아가씨가 하도 깍듯하게 챙기길래 더 어린지 알았지.”
“그래요?”
“응. 둘 다 젊어서 그런지 참 보기가 좋네.”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는 식당의 아주머니.
김지영 이사는 워낙 동안이었고.
관리도 잘했기에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는 데 무리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내 답에 김지영 이사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그렇게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김지영 이사는 밖으로 나오기 전에, 테이블 위로 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뭐야?”
“그……. 그냥. 아주머니가 잘해 주셔서.”
나는 피식 웃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나도.”
식당의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켜고, 눈을 비볐다.
밤새 차를 운전해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김지영 이사의 얼굴을 힐끔 보고, 손을 내밀었다.
“키 줘.”
“괜찮겠어?”
“응. 이따가 졸리면 말할게.”
“정말 괜찮겠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출발하자.”
“그래 커피 좋지.”
우린 횟집 위에 있는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그곳에는 이미 많은 커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김지영 이사는 빈 곳을 가리키고, 나에게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다가가 따뜻한 라떼 두 잔을 주문하고 돌아왔다.
“추웠지?”
“아니. 괜찮아. 조……. 좋았어.”
“뭐가 좋았을까?”
“그냥…….”
“그냥 뭐가?”
얼굴을 붉힌 김지영 이사.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 가려 했다.
그때 진동벨이 울렸고, 김지영 이사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진동벨을 잡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고 말했다.
“내가 가져올게. 그렇게 나 안 챙겨 줘도 돼.”
“으……. 응.”
최근에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었을까?
우리는 TV나 연예인 같은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커피를 다 마시고.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키 줘.”
“괜찮겠어?”
“응. 괜찮아.”
“그럼, 가다가 피곤하면 말해. 꼭!”
“응. 난 괜찮으니까. 눈 좀 붙여.”
우린 1층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다.
내가 시동을 걸고 기어에 손을 올리자, 김지영 이사는 내 손에 깍지를 끼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수량 잘못 넣었잖아!”
“네 마켓 프레시입니다. 아……. 네네. 지금 라이브할 예정입니다.”
“과장님! 메인 배너 구좌, 10일까지 꽉 찼답니다.”
1월 2일.
새로운 해가 시작됐지만, 우린 이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부장님! 오늘 점심은 저희랑 가시는 겁니다!”
마성근 팀장이 아침 일찍부터,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예. 메뉴는 뭡니까?”
“부장님 좋아하시는 순댓국으로 가죠.”
순댓국은 마성근 팀장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순댓국을 좋아해요?”
“예! 전에 맛있다고 엄청 좋아하셨잖아요.”
대충 눈치를 보니.
다른 메뉴를 먹자는 팀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를 끌어들인 것 같았다.
“그래요.”
식사 시간이 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진동 소리에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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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님의 아버지께서 1월 2일 오전에 별세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영안실: 완도 장례식장.
슬픔에 잠긴 유족들께, 여러분의 따뜻한 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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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몇 달 전에 최진영 대리의 리베이트 사건 때문에.
투서를 넣고 말 못 하는 아버지와 사무실을 찾았던 아이다.
메시지의 내용을 보니, 장례식장에서 연락처가 저장된 사람에게 모두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내 슈트와 넥타이를 확인하고.
검은 넥타이를 메고 있는 김대성에게 말했다.
“대성 씨. 넥타이 나랑 좀 바꾸자.”
“이거요? 이거 싸구려인데.”
“내일 와서 줄게.”
“아……. 네네.”
김대성이 넥타이를 푸는 사이.
대충 눈치를 챈 마성근 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돌아가셨어요?”
“네. 완도에 좀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완도요?”
“전에 이유정이라고 혹시 기억나세요? 완도에서 전복 양식하는…….”
“아……. 최진영 그 새끼가!”
“네. 그 아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네요.”
내 말에, 마성근 팀장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아이, 아버지랑 둘이 살지 않아요?”
“네.”
“세상에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그런 아이한테……. 가 보시려고요?”
“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번호를 저장했었나 보네요.”
“에고, 완도까지 언제 가시려고.”
“퇴근하고 바로 가 봐야죠.”
“그럼 운전하지 말고, KTX나 비행기 타고 다녀오세요. 꼭이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온.
정진택 팀장이 휴대전화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부장님도 이중석 씨 부고 문자 받으셨어요?”
“네. 받았습니다.”
“하……. 정말 어이가 없네요. 중석 씨는 두 달 전까지 저랑 통화를 했는데.”
“…….”
“세상 참, 모를 일이네요.”
신선식품팀은 그와 이번 연도 전복까지 미리 계약한 상태다.
그랬기에, 중요한 생산자의 죽음에 놀란 것 같았다.
“팀장님도 가실 건가요?”
내 질문에, 정진택 팀장이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감사팀의 박승하 팀장이 내 자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원 부장님!”
감사팀의 그가 올라올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
“저도 문자 받았습니다.”
“그랬군요. 부장님도 받으셨군요. 가실 건가요?”
박승하 팀장은 차갑고 냉정해 보여도, 따뜻한 사람이었다.
최진영 대리의 사건 이후로 아이와 종종 연락했고, 가끔은 학용품을 사서 보내 줬다는 사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네. 가야죠.”
“그럼 지원팀에 말해서 항공권 두 장 끊어 달라고 하겠습니다. 티케팅 정보는 이따 메신저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진택 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저도 가겠습니다. 조문혁 대리랑 같이요. 두 장 더 부탁드립니다.”
“팀장님도요?”
“네. 저희 팀 계약도 걸려 있어서,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넷이나 가니, 유정이가 든든해하겠네요.”
박승하 팀장은 고개를 숙이며, 나와 정진택 팀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 * *
광주공항.
우린 비행기에서 내려.
택시를 나눠타고 완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와 함께 택시에 탄 박승하 팀장은 초조한 표정으로 깜깜한 창밖을 바라봤다.
“참 좋은 아이인데……. 안됐어요.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 뭐가 그렇게 급하시다고.”
“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부장님이 가신다고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당연히 가야죠.”
“바쁘다고 들었는데……. 고맙습니다.”
“팀장님이 왜요?”
“글쎄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고맙습니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는 박승하 팀장.
마치 이유정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반대쪽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우리가 탄 택시는 깜깜한 도로를 뚫고, 완도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서성대던 정진택 팀장과 조문혁 대리가 우리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들어가시죠. 102호입니다.”
“네.”
시끌벅적한 다른 곳과 다르게 초라하고 조용한 장례식장.
근조 화환도 우리가 보낸 것과 완도 수협에서 보내온 것이 전부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은 유정이는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참아 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박승하 팀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 유정이를 끌어안으며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고맙습니다.”
어렵게 말을 꺼내는 유정이.
나는 유정이의 어깨를 토닥이고, 테이블 위에 있는 조객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적힌 이름이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가장 앞줄에 이름을 적었다. 이어서 정진택 팀장과 조문혁 대리, 박승하 팀장이 이름을 적어넣었다.
우린 말 없이 영정 사진이 걸린 앞으로 걸어가 분향과 헌화를 하고, 나란히 서서 절을 했다. 그리고 가만 서서 눈물을 흘리는 유정이를 한 번씩 가볍게 안아 줬다.
“유정아, 어떻게 된 거야?”
내 질문에 유정이는 아랫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