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78화 (7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78화>

79. 또 그 아이가 옳았더군요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단상 위의 정근영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12월 31일.

마켓 프레시의 종무식.

250여 명의 직원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정근영 대표는 단상 아래로 내려와 이사들과 악수를 하고, 나는 부서원들 사이에 섞여 악수나 가벼운 포옹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내년에는 장가가셔야죠?”

“소개나 해 주고 말씀하세요.”

“그럴까요? 말 나온 김에 제가 아는 동생 좀 소개해 드릴까요?”

정진택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전 진심인데요?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자리 한번 만들어 볼게요.”

“그러지 마세요.”

“제가 부장님 완전 사랑하잖아요.”

“전 아닌데요?”

“에이 그러지 마시고, 한번 만나 보세요. 신덕 반도체 외동딸에 외모도 훌륭하고, 성격도 아주 좋은 친구입니다. 만나 보시면 정말 후회 안 하실 겁니다.”

신덕 반도체의 외동딸이라…….

로열패밀리라 그런지, 역시 다르긴 다르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담스럽네요.”

“왜요? 부장님 정도 외모에 능력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나오라고 전화 때리겠습니다.”

“그냥 마음만 받겠습니다.”

정진택 팀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성근 팀장이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부장님! 올 한 해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가끔 그가 이렇게 행동할 때면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팀장님. 이거 좀 그만하시면 안 돼요?”

마성근 팀장을 빨리 일으켜 세우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이는 저보다 한참 어리지만,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그만 존경하셔도 됩니다.”

“아시죠? 전 언제나 부장님 라인이라는 걸요.”

“라인은 무슨…….”

내가 등을 돌리려 하자.

마성근 팀장은 내 어깨를 잡고 강제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 부장님. 마누라가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시간 되시면…….”

“아닙니다.”

“이제 서른인데, 연애는 해 보셨어요?”

“물론이죠!”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치우치며, 의심스럽다를 눈빛을 보내 왔다.

“혹시……. 모쏠?”

“아니거든요. 저 연애 아주 많이 했거든요?”

“하긴 그 얼굴에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았겠죠.”

“당연하죠! 저도 집에 거울은 있습니다.”

“그러면 혹시 종교에 심취해서 신부님이나 스님이 되려는 겁니까?”

“무교입니다.”

“그럼 혹시 취향이……. 저 굉장히 쿨한 사람입니다. 그런 거 다 이해…….”

“후……. 그냥 그런 거라고 해둡시다.”

나는 마성근 팀장과 몇 마디 농담을 나누고 등을 돌렸다.

강당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나를 보는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원 부장. 잠깐 차 한잔할까?”

검은 슈트에 파란 넥타이를 한 최구열 이사.

그는 언제나 온화한 인상으로 직원들을 대하곤 했다.

시커먼 속마음과 다르게 말이다.

나는 손목의 시계를 힐끔 보고, 미안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네. 죄송합니다. 연휴 지나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언제든지 올라와. 바둑 좋아하나?”

“오목은 좀 합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럼 언제 차라도 한잔하지.”

최구열 이사는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BO푸드의 김지욱 상무.

김상만 회장의 장남이자, BO푸드의 공식적인 후계자.

오전에 그가 잠깐 보자는 전화를 걸어 왔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마스이브 때 김지영 이사의 연락으로 언젠간 그를 볼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   *   *

5층 김지욱 상무의 개인 사무실.

지주회사인 BO푸드의 상무이사라 그런지, 사무실은 정근영 대표의 사무실보다 더 넓고 쾌적했다.

나는 김지욱 상무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한쪽 벽에는 경영 관련 서적들이 가득했고.

반대쪽 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만화의 피규어 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고급 책상은 커다란 통 창을 등지고 있었으며, 반대쪽 벽에는 알 수 없는 화가의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종무식은 끝났나요?”

김지욱 상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태하랑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면서요?”

“예. 상무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난 지금도 편해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사무실을 걷던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앉아 있는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통은 상석의 1인석 자리에 앉는데…….

그는 달랐다.

다리를 꼬지도 않았고, 한 손으로 소파를 두르는 건방진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지영이한테도 부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커머스의 실질적인 리더라면서요?”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회장님은 내년에는 커머스가 상장할 거라면서 기대가 크시더라고요. 물론, 저도 기대가 크고요.”

“아……. 네.”

김지욱 상무는 자신의 목적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 걸까?

왜 나를 불렀으며.

그날 김지영 이사는 왜 그렇게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을까?

나는 궁금한 마음에 소파 앞 테이블에 있는 집기들을 오른손으로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청주 공장에 로스율을 줄여야 하는데.>

<베트남 컨테이너가 생각보다 늦게 들어오는구나.>

<냉동 시설 비용을 더 추가한다면…….>

오로지 지금 BO푸드에 대한 기억뿐이다.

뭘까?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성질이 급한 나는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저 상무님.”

“네 말씀하세요.”

“저를 부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내 말에.

김지욱 상무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있던 천으로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회장님. 아니,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커머스의 지분을 제가 상속받으려 합니다.”

김상만 회장은 BO커머스의 대주주.

그의 지분을 상속받는다면, 김지욱 상무가 마켓 프레시의 대주주가 되는 것이다.

BO푸드는 김지욱.

BO커머스는 김지영의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설마 김지욱 상무가 김지영 이사의 몫을 탐내는 것인가?

그래서 김지영 이사가 급하게 전화를 했고?

근데 그 둘 사이에 나는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김지욱 상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커머스의 지분을 제가 좀 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상무님은 BO푸드의…….”

“후계자라고요?”

“네.”

“하하 후계자라……. 처음엔 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푸드, 지영이는 커머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

“지영이는 그렇게 언론에서 성공한 여자 CSO라고 불리는데, 난 그냥 아버지 잘 만난 금수저로만 보이는 겁니다.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김지욱 상무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그 미소가 차갑던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원 부장님이 지영이 사람인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

“지영이는 어릴 때부터, 참 영특한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가 선택한 것들은 항상 좋은 결과가 있곤 했죠.”

“그 말씀을 왜 저에게 하시는 겁니까?”

“처음에 지영이가 BO푸드에서 손을 떼고 나간다고 했을 때, 솔직히 비웃었습니다. 근데 지금 보니까 또 그 아이가 옳았더군요.”

“…….”

“최구열 이사의 말로는 원 부장이 나가면, 현재 제조사나 벤더의 3분의 1이 마켓 프레시에서 나갈 거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최구열 이사가 괜히 겁을 내는 건가 보군요.”

“예. 전혀 상관없습니다.”

이건 본론이 아니라, 그냥 나를 치켜세워 주려는 말이다.

내가 아는 김지욱 상무는 얼마 전까지 마켓 프레시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닦던 안경을 다시 쓰고, 머그잔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티슈를 한 장 꺼내 입 주위를 닦아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BO푸드는 탄탄한 회사입니다. 아버지가 32%를 12%는 어머니와 내가 가지고 있고, 지영이는 커머스의 지분을 받는 대신 모두 포기했죠. 아 참, 태하의 몫도 약간은 생길 겁니다. 아버지가 그 아이를 좋아하시니까요.”

“…….”

“아버지의 파트너인 정 대표님과 그의 가족들이 나머지 6%를 가지고 있으며, 유동 지분은 겨우 30%대입니다.”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커머스도 그렇게 탄탄한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

“원 부장님이 가장 1선에서 뛰시는 분이라 들었는데, 정말 커머스가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눈을 게슴츠레 뜬 김지욱 상무.

나를 떠보려는 것이다.

“네.”

“그래서 지영이가 그렇게 욕심을 냈나 보군요.”

“…….”

“얼마 전에 이정우 이사와 장상익 사외이사가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내게 지분을 양도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아 참, 김재열 사외이사는 부장님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면서요?”

이정우 이사는 7%.

장상익 사외이사는 4%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그 둘에 김상만 회장의 28% 지분까지 상속받는다면…….

총 39%.

거기에 나와 김재열 사외이사의 5%까지 합친다면 44%.

완벽한 경영권을 갖기 위해서는 7%만 남는다.

내가 멍하니 김지욱 상무를 보자, 그는 눈을 살짝 찡긋하며 말을 이었다.

“돈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내줄 수 있습니다. 대신, 상장 후에 지분을 주겠다는 계약서만 적어 주시면 됩니다.”

상장 후에 나머지 7%를 조용히 사 모으려는 생각이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저었다.

“겨우 1%에 이렇게 공을 들이시는 것보다, 19%를 가진 최구열 이사를 만나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만났죠.”

“…….”

“확실한 비전이 있다고 자신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하더군요. 현재 주가의 50%를 더 드리죠. 35억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정말 큰돈이다.

1년 전에 주식을 받을 때 비해 20배 이상이 오른 금액이다.

물론, 그 돈이 탐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35억 정도면 커머스를 만들어서 혼자 잘 먹고 잘살 정도는 됐을 테니까.

하지만 내 목표는 이룰 수 없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오로지 김지영 이사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제가 거절하면요?”

내가 말하자, 김지욱 상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차갑게 말했다.

“원 부장님. 난 당신이 지영이 사람인 것도 알면서 불렀습니다. 제가 그렇게 가벼워 보입니까?”

“네?”

“지영이의 지분도 곧 가져올 것입니다. 난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

이건 전혀 예상도 못 했다.

7%의 지분을 가진 김지영 이사.

그녀가 지분을 내놓는다면, 김지욱 상무가 51%의 지분을 갖게 된다.

“난, 확신이 없는 게임에 베팅하지 않습니다.”

산 넘어 산이구나.

회사가 성장하니, 정말 많은 사람이 욕심을 드러내는구나.

처음에는 최구열 이사가.

다음은 이정우 이사와 BO푸드의 김지욱 상무까지.

1%를 가졌던 것이 오히려 독이었을까?

나는 확신에 찬 김지욱 상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 그의 테이블 위에 있던 안경을 닦던 천을 내려다봤다.

“제가 성격이 좀 이상해서요. 이런 걸 보면 못 참습니다. 하핫.”

대충 내려놓은 파란 천.

나는 천을 곱게 접어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조금 전 김지욱 상무의 기억을 들었다.

<지영이도 참 웃기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뭐가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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