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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75화 (7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75화>

76. 이건 배신이잖아

회사 로비.

지난주 장식된 대형 트리에서 요란한 전구의 불빛을 반짝였다.

아침부터 물씬 풍겨 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무슨 계획이 있는지.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김태하 팀장은 원어민처럼 혀를 굴리며, 출근하는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파인 땡큐다. 자식아.”

“아침부터 왜 짜증이야?”

“내가 언제?”

“부장 달더니 점점 히스테리만 늘어나고. 자, 잘 봐!”

김태하 팀장은 내 어깨를 잡고 돌려서, 대형 트리 앞으로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어깨 사이로 자신의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앞에 있는 트리를 가리켰다.

“얼마나 아름다워! 회사에서 보인 성의에 좀 감탄을 해 보라고.”

“뭐 잘못 먹었어?”

“뭐가?”

“연애하더니 감성적으로 변한 건가?”

“난 원래 지성과 감성을 지닌 현대인이었어. 나도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싸이월드 하냐? 입만 살아 가지고.”

김태하 팀장은 소리 내 크게 웃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하하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약속 없어?”

“없어. 집에 가서 밀린 미드나 보려고.”

“요즘 뭐 보는데?”

“워킹데드.”

나는 김태하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가득 찼고, 17층까지 올라가는 우린 자연스럽게 맨 끝의 벽에 바짝 붙었다.

“잠깐만요!”

문이 닫히기 전.

사람들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최충연, 이진성 팀장이 몸을 비집고 올라탔다.

그들은 우릴 못 봤는지, 닫힌 문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너 어제 고 부장이랑 저녁 먹었지?”

“네.”

“고 부장이 뭐래?”

“그냥 별말 없었어요.”

“그래? 정말 별말 없었어?”

“네. 형도 며칠 전에 저녁 먹지 않았어요?”

“아……. 그랬지.”

“형한테는 뭐 별말 없었어요?”

“나도 뭐 그냥 별말 없었어.”

조용한 엘리베이터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고 부장은 고동수 부장을 말하는 것인가?

그가 팀장들에게 슬슬 손을 내미는 것인가?

상관없다.

어차피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엘리베이터의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고.

최충연 팀장은 고개를 돌려 나와 김태하 팀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한 채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김태하 팀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두 분 다 고동수 부장이랑 만나신 겁니까?”

“아……. 그게.”

“배신자.”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저녁 먹자는데 어떻게 거절해?”

손사래를 치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최충연 팀장.

이진성 팀장은 내 눈치를 보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는 김태하 팀장의 옆구리를 툭 치고,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성과 감성을 가진 현대인이 예민하게 왜 이래?”

“이건 배신이잖아.”

“뭐가 배신이야.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저녁도 먹고 그러는 거지.”

“하여간 맘에 안 들어. 두 분 제가 지켜봅니다!”

김태하 팀장은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고, 둘을 번갈아 가리키며 경고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이진성 팀장의 팔을 툭 치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런 거 진짜 없어요.”

순간, 들려온 이진성 팀장의 기억.

<최 팀장님에게는 차장 제안을 하지 않은 건가?>

<그럼, 내가 차장을 달 수 있다는 말인가?>

고동수 부장은 이진성 팀장에게 차장을 주겠다고 했구나.

근데, 이를 체인마켓 때부터 함께한 최충연 팀장에게 말하지 않고 간을 본 다라…….

잠시 생각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도착했다.

최충연, 이진성 팀장이 다시 한번 내게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김태하는 엘리베이터의 옥상 버튼을 누르고, 한 손으로 나를 못 나가게 막았다.

“왜?”

“일단 따라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옥상.

김태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화가 난 것처럼 담배를 급하게 뻐끔뻐끔 피우고 입을 열었다.

“아까 얘기 들었지?”

“뭐?”

“둘 다 고동수 부장이랑 따로 저녁 먹었다는 거 말이야.”

“왜? 넌 안 불러서 서운했어?”

“무슨! 네가 잊었나 본데, 이 MD 사업부에는 크게 세 개의 라인이 있어. 미국 그룹폰, 체인마켓, 그리고 너를 포함한 기타 등등.”

“난 기타 등등인가?”

분위기를 바꾸고자 했지만.

김태하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몇 모금 더 빨고 꺼 버렸다.

“너도 알겠지만, 체인마켓에서 온 MD들이 가장 많아.”

“근데?”

“박대영 차장을 제외하고, 체인마켓 애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은 최충연, 이진성이야. 고동수 부장은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먼저 만들려는 거고.”

“그럼 둘 다 차장을 달아주려는 건가?”

“흠……. 차장이 둘이라……. 하긴 그럴 수도 있지. MD 사업부를 둘로 쪼개도 50명에 가까우니까, 1명의 부장과 2명의 차장도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럼 잘됐지 뭐.”

“뭐가 잘돼?”

“차장이 총 넷이라는 소리잖아. 더 많은 직원이 차장, 팀장, 과장, 대리가 될 수 있잖아.”

김태하 팀장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너……. 설마.”

“설마 뭐?”

“최구열 이사님 손으로 MD 사업부를 키우도록 할 생각인 거야?”

정확하다.

내가 백날 떠들어 봤자, 부장의 힘으로 100명에 가까운 MD 사업부를 개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회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최구열 이사가 나선다면?

이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부장, 네 명의 차장, 팀장들과 과장, 대리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사업부 전체의 파워가 강해지는 것이다.

“응. 내가 하는 거보다 빠르잖아.”

“여우 같은 놈.”

“칭찬인가?”

“근데 최구열 이사님이 고동수 부장을 계속 밀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야. 모든 임원이 있는 자리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겠다고 했으니까.”

“치밀한 놈.”

“그것도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나는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권력으로 내 목표에 다가갈 것이다.

김태하 팀장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시죠. MD 사업부 총괄 이사님.”

“이사는 무슨?”

“연말에는 우리 경일이랑 같이 술 한잔하자.”

“응? 갑자기 경일이는 왜?”

“우리 이제 낼모레면 진짜 서른이잖아. 아후…….”

“서른. 그래 벌써 서른이구나.”

나는 피식 웃고, 김태하 팀장과 함께 옥상에서 내려왔다.

*   *   *

오후 6시.

퇴근 시간이 되자, 지원팀 직원 두 명이 커다란 끌차 위에 상자들을 담고 부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 한 명은 끌차를 구석에 두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부장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눠드리러 왔습니다.”

“케이크요?”

“네. 대표님께서 커머스 전 직원에게 케이크를 선물하셨습니다.”

정근영 대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여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원팀 직원은 내 답을 듣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수령하신 분들은 여기 사인해 주시면 됩니다.”

나는 그가 건넨 넉 장의 종이를 차례로 넘겼다.

우리 부서원은 총 91명.

하지만 명단에 적힌 이름은 71명뿐이었다.

“빠진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MD 사업부 71명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71명?”

“네. 71명이요.”

MD 사업부의 정규직 직원은 71명.

나머지 20명은 인턴과 계약직 사원이다.

그들을 뺐구나.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지원팀 직원에게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박민규입니다.”

“네. 민규 씨. 제가 사내 메신저로 20명의 이름과 부서를 보내 드릴게요. 그 친구들 이름만 추가해서 한 장 더 출력해 주실 수 있으세요?”

“네?”

“여기 빠진 직원들이 있어서요.”

“그게…….”

“케이크를 더 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게요. 가서 한 장만 더 출력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나는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김대성을 불렀다.

“대성 씨!”

“예. 부장님.”

“심부름 하나만 해 줄 수 있어?”

“뭐든 말씀하세요.”

나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지갑에서, 개인 카드를 꺼내 김대성에게 건넸다.

“이 카드 가지고 근처 베이커리 가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스무 개만 사 와. 제일 비싸고 예쁜 거로.”

김대성은 카드에 적힌 영문 이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부장님 개인 카드 아니에요?”

“응.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회사에서 케이크가 나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김대성은 내 심부름에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원팀 직원이 한 장을 추가로 출력해 왔고, 김대성과 이우진이 함께 케이크 스무 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스무 개를 혼자 들고 오기 힘들어서 팀 동료인 이우진을 불렀나 보다.

“고마워.”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사내 메신저로 각 팀의 막내를 이쪽으로 보내라고 했다.

“자. 회사에서 나온 케이크입니다. 막내들이 선배님들 직접 나눠 줘요. 그리고 이건, 받았다고 사인을 좀 해 달라는데. 자! 혁진 씨가 각 팀 돌려서 사인받아 와.”

“예. 알겠습니다.”

인턴 중 대장 노릇을 하는 김혁진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쌓여 있는 케이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다른 종류도 있는데요? 저건 팀장님들 드리면 되나요?”

“아……. 그거? 그건 그동안 고생한 막내들 거야.”

“네. 알겠습니다.”

각 팀의 막내들이 걸어가 자신의 팀으로 케이크를 옮기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에 나눠 준 케이크 때문인지.

사무실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든 직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하나둘 퇴근했다.

부서원들 절반 이상이 퇴근하자.

최충연, 이진성 팀장이 고개를 숙이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둘은 내 눈치를 보다가, 최충연 팀장이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장님. 케이크 잘 먹겠습니다.”

“그건 대표님께 인사하세요.”

“아……. 우진이한테 들었습니다. 인턴 애들 케이크 따로 사 오라고 하셨다고요.”

나는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아……. 이우진이가 이렇게 입이 싸다니.”

“아닙니다. 제가 여러 번 물어서 답한 겁니다. 그리고 저…….”

“네?”

“오늘 괜찮으시면 저희랑 삼겹살에 소주 한잔 어떠세요?”

아마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둘이 수군거린 것이 미안했나 보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는 척했다.

“흠……. 오늘은 밤새 미드 보려고 했는데.”

“제가 특별히 좋은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맛집 마니아 이진성 팀장이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얼마나 갑니까?”

“걸어서 5분입니다!”

“근처에 그런 집이 있어요?”

“네. 삼겹살에 전복, 관자를 삼합으로 먹는 아주 유니크한 집입니다. 오늘 최 팀장이 쏘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야! 내가 언제?”

최충연 팀장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이진성 팀장을 살짝 밀었다.

그렇게 둘은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노력했다.

“좋아요. 오랜만에 얻어먹어 볼까요?”

“예.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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