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71화>
72. 야 이 죽일 놈아
늦은 밤.
나는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돌아왔다.
현관 센서 등이 켜졌고,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헝클어진 머리와 축 처진 어깨.
그동안 힘들었나 보다.
이런 생활을 한 지 10년이 넘어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내공이 모자란 건가?
시끌벅적한 곳에서 조용한 곳으로 와서 그런지, 갑자기 외로움이란 놈이 밀려왔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누구에게 전화를 걸까를 고민했다.
그때.
지이잉. 지이잉.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휴대폰 액정에 김지영 이사의 이름이 표시됐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상기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훈아. 저기.
“네. 이사님.”
- 저기……. 그게…….
“무슨 일 있어요?”
- 그……. 그게.
“말해요. 뭐든 괜찮으니까.”
- 호……. 혹시. 여기로 와줄 수 있을까? 아니, 아니야 그냥…….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말을 못 하는 건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다그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요? 무슨 일 있어요?”
- 사……. 사고가 났어…….
“사고요?”
- 바……. 밖에서 나오라고……. 나 무서워. 지훈아 어떡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술이 확 깨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예요?”
- 가……. 강남…….
“주변에 보이는 거 없어요?”
- 기업은행. 나……. 남자가 계속 두드려…….
강남의 기업은행이라는 정보만으로는 찾아갈 수 없다.
나는 놀란 그녀에게 달래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침착하시고 지금 차 안이죠?”
- 으……. 응.
“내비게이션에서 지도를 눌러봐요. 주소나 큰 건물 보이는 거 있어요?”
- 상호가 안 보여.
거의 반쯤 울먹이는 김지영 이사.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한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내 감정을 최대한 낮추며 차분히 말했다.
“지도 옆에 더하기 버튼 눌러보세요. 그럼 보일 겁니다.”
- 아우디 전시장……. 하……. 한우리 한정식.
한우리 한정식. 이제 모바일 지도로 찾아서 가면 된다.
나는 더 침착한 목소리로 당황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내가 갈 때까지 차 문 꼭 잠그고, 차 안에 있어요. 할 수 있죠?”
- 으……. 응.
“아니다. 전화 끊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 그래…….
전화기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우려 했지만, 평소에 많던 택시도 꼭 급할 때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평소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 지훈아.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숨을 참고,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 미안해. 내가……. 바보 같아서.
“난 오히려 좋은데요? 누나, 금방 가니까 걱정 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길가에 서서 한가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젊은 택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강남 언주로요. 빨리요.”
택시 기사는 땀 범벅인 나를 보고, 눈썹을 추켜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빨리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속도, 신호 걸리면 벌금은 제가 다 내 드리겠습니다.”
주머니를 뒤져, 오만 원권 지폐 한 장과 명함을 그에게 건넸다.
지폐를 본 택시 기사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부족하다는 건가?
나는 주머니에서 오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더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지폐와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씩 웃었다. 그리고 세워 둔 택시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뭐 해요? 빨리 안 타고!”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기사는 액셀을 세게 밟으며 입을 열었다.
“벨트.”
우리나라 총알택시는 참 대단하다.
내비 상에는 20분은 걸릴 거리라고 나오는데, 겨우 6분 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4차선 중앙 분리대 근처에 김지영 이사의 차와 검은색 BMW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김지영 이사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
“당신 뭐야?”
차 앞에서 서성이던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흰색 반소매 티셔츠에 패딩 조끼.
더운 것인지, 추운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패션이다.
마른 체형의 남자는 포마드로 머리를 넘기고, 반소매 티셔츠 밑으로 알록달록한 타투가 가득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김지영 이사의 차 앞으로 걸어갔다.
공포에 떨고 있던 그녀는 창문 앞의 나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그녀의 미소에는 미안함과 안도의 마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차 안의 그녀에게 한 손을 올려 보이며.
괜찮다고.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사고 현장을 살폈다.
뒤 범퍼가 충격 때문에 찌그러진 김지영 이사의 차량.
그리고 뒤에서 들이받은 것 같은 BMW 차량.
사고 현장으로 봐서는 뒤에서 들이받은 BMW의 잘못이 명백해 보였다.
“뒤에서 받으신 거죠?”
내 말에, 남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이 여자가 급정거했잖아! 이 시간에 왜 급정거를 하고 지랄인데?”
“안전거리 확보하셨어야죠.”
“밤늦게 여자가 싸돌아다니고!”
“경찰 먼저 부르죠.”
내가 휴대폰을 꺼내자, 남자가 재빨리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뭐? 뭔데 껴드는 거야?”
금방이라도 한 대 칠 듯한 남자.
나는 멱살을 잡힌 채로 휴대폰의 112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남자가 내 휴대폰을 가로채기 위해 손을 뻗었고,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 새끼가!”
험악해진 분위기.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고 갈 것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야! 야 이 죽일 놈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차 안에 서 울먹이던 김지영 이사가 밖으로 튀어나와 소리쳤다.
그리고 욕도 아니고, 죽일 놈이라는 말을…….
그 목소리가 얼마나 귀엽고 어색했는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고 다시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게 미쳤나? 지금 웃음이 나와?”
“그래 나온다. 이 죽일 놈아.”
“뭐?”
나는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왜소한 남자는 휘청이며, 중앙 분리대에 허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고! 이 새끼가 사람 패네! 아이고!”
힘과 협박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 남자가 다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그의 패딩 조끼를 오른손으로 스치듯 만졌다.
<씨발 좆됐네.>
<사장님 보기 전에 빨리 수리해 놔야지.>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BMW 7시리즈.
사장이라…….
그럼 짚이는 것이 하나 있다.
남자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쭈그려 앉아 있는 나를 밀쳐 냈다.
그리고 김지영 이사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뚜벅뚜벅 걸어가 인상을 구겼다.
“그냥 당사자끼리 조용히 처리합시다. 보니까 부잣집 사모님 같은데 수리비만 입금해 주면 갈 테니까.”
“…….”
“그럼 법대로 할까? 저 새끼가 나 팬 거 블박에 다 녹화됐어!”
“그……. 그건.”
당황한 김지영 이사.
놈의 협박에 내가 걱정됐나 보다.
나는 둘의 사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겁에 질린 김지영 이사의 앞으로 나섰다.
“어이! 나랑 얘기하자니까!”
“넌 뭔데 껴드는데?”
“이 여자……. 내……. 내 여자다. 왜!”
남자는 나와 김지영 이사를 번갈아 보다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덤비네. 그럼 폭행에 살인미수 걸고 얘기해 볼까?”
“오! 그거 좋겠네.”
“나 전화한다! 진짜 경찰에 신고한다!”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겁에 질린 양아치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해. 그래. 빨리해.”
“나……. 진짜 한다! 진짜……. 한다!”
“응. 마음껏 하세요.”
“진짜……. 한다!”
“해. 하라고! 아니면 내가 할까?”
내가 휴대폰을 꺼내자, 남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다, 씩 웃으며 말했다.
“너 차에 보험도 안 들고 끌고 나왔지?”
“……!”
“중고차 딜러 맞지? 금요일 밤에 외제차 끌고 여자 꼬드기러 나온 건가?”
“아……. 아니야.”
“내가 아까부터 말 길게 하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아……. 아닙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급하게 자세를 고쳐 섰다.
나는 주머니에서 내 명함을 꺼내 그의 패딩 조끼 주머니에 넣고 말했다.
“월요일까지 수리 가능한 공업사 찾아서 연락해. 딜러면 공업사들 많이 알 거 아냐?”
“…….”
“월요일까지 연락 안 하면 네가 좋아하는 블랙박스 떼어다가 경찰서에서 만나게 될 거야.”
“저…….”
나는 남자를 무시하고, 등을 돌려 김지영 이사를 바라봤다.
겁에 질린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고, 여자 친구를 대하는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보험사에 전화는 했어?”
“으……. 응.”
“그래. 그럼 차 안에서 기다려.”
“저……. 저기.”
“걱정 마. 난 괜찮으니까.”
궁지에 몰린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상대방에게 맹렬하게 대항하거나, 잘못했다고 싹싹 빈다.
남자는 물론 후자였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김지영 이사의 차는 포르셰 파라메라.
남자가 몰고 온 차는 BMW 7시리즈.
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수리비는 남자가 낼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분명 남자의 잘못.
더군다나 김지영 이사가 약한 여자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잘못을 하지 말던가.”
“죄송합니다.”
남자가 내 다리를 잡았지만, 나는 냉정하게 그를 뿌리쳤다.
잠시 후.
사고 접수를 받은 보험사에서 왔고, 새파랗게 질린 남자는 보험사 직원과 무언가를 얘기했다. 나와 김지영 이사는 차가 레커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보고, 등을 돌렸다.
“그냥 가도 되는 거야?”
“네. 이제는 보험사가 알아서 하겠죠.”
“그럼 저 사람은…….”
“불쌍해하지 마요. 이대로 넘어가면 저런 놈들은 다음에 또 그럽니다.”
“그래도 중고차 딜러에 보험도 들지 않았으면…….”
“그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몸에 감은 타투만 해도 몇천만 어치는 될 겁니다. 제 몸은 저렇게 꾸미면서, 정작 책임은 지지 못하는 저런 놈은 혼이 좀 나야 합니다.”
“…….”
나는 김지영 이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씩 웃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이거 혹시 땀이야?”
김지영 이사는 젖은 내 와이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까 집 근처에 소나기 왔어요.”
“소나기? 푸훗. 그리고 아까…….”
“아까 뭐요?”
“아니야.”
김지영 이사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귀에는 분명 들렸다.
어깨를 감쌌던 오른손으로 그녀의 기억이.
<내 여자라고 했어.>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급하게 오느라 술 다 깼네.”
“응?”
“책임져요.”
“내가 뭘?”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술 한잔 사라고요.”
“그래.”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