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67화 (67/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67화>

68. 우리 막내놈이 그려 온 제 부적입니다

모든 커머스는 아마존을 꿈꾼다.

하지만.

공격적인 투자와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 환상적인 맨파워.

그들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꾸는 꿈일 뿐이다.

사실, 우리도 그렇다.

작은 시장 규모, 자본금의 한계, 부족한 시스템과 설비 등.

그들에 비해 모든 것이 떨어지지만, 제2의 아마존이 되길 꿈꿔왔다.

며칠이 지나.

언론에서는 바론이 마켓 프레시의 인수를 준비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덕분에 사업부의 분위기도 좋지 못했다.

협력사들의 전화가 빗발쳤고, 부서원들의 멘탈은 무너져 있었다.

“아닙니다. 정정 보도를 요청할 겁니다!”

“아직 정해진 게 없다니까요!”

협력사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

바론은 이전에도 제조사를 인수하고, 유사한 제품을 생산하는 등.

먹이 사슬의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바론이 말하는 상생.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과는 달랐다.

“네, 원지훈입니다.”

- 지훈아! 진짜야? 바론이 진짜 마프를 인수하려고 하는 거야?

양지푸드의 함중식 사장.

그의 주력 상품인 냉동 만두도 바론이 유사 제품을 만들었다.

이에 매출은 20% 이상 급락한 상태였고.

새롭게 출시한 레토르트들 또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아닙니다.”

- 지훈아 넌 알지? 바론이 어떤 놈들인지 말이야!

“예.”

- 바론이 인수하면 우린 물건 다 뺄 거야!

“예.”

- 그리고 너도 당장 때려치우고 나와. 돈은 내가 구해 올 테니까, 나랑 커머스인지 뭔지 하면 되잖아!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 장난하는 거 아니야!

“예. 저도 장난 아닙니다.”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진택 팀장의 자리를 바라봤다.

그의 옆에는 최충연, 이진성, 김민정 팀장이 있었고, 정근영 대표의 아들인 정진택 팀장에게 사실 여부를 들으려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팀장들을 돌려보낸 정진택 팀장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부장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나는 의자에 걸어 둔 상의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라가서 얘기하시죠.”

“예.”

옥상 난간에 기대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침에 아버지에게 들었습니다.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라고요.”

정진택 팀장의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우리한테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멋대로 하는 겁니까? 마프를 이 정도로 끌어올린 게 누군데요!”

“다른 얘기는 없었나요?”

“회장님도 거의 결정하셨다고만 들었습니다.”

“대표님은요?”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셨죠.”

김상만 회장의 지분은 28%.

최구열 이사의 19%와 이정우 이사의 7%를 합치면, 54%로 과반을 넘는다.

셋 중 한 명만 포기를 시키면 되지만.

최구열과 이정우 이사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김상만 회장뿐인데…….

나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오전에 주간 보고서가 안 올라온 것 같은데요?”

“네?”

“가전팀에도 전달해 주세요.”

정진택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그는 내 뒤를 따라와 길을 막아섰다.

“부장님은 마프를 바론에 넘길 생각이세요?”

“…….”

“그냥 이대로 그 새끼들 떠먹여 줄 생각이냐고요!”

“우리가 할 일 먼저 하죠.”

“네?”

“30분 내로 인트라넷에 보고서 올려 주세요.”

나는 그를 피해, 사무실로 내려왔다.

태연한 척했지만.

초조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지영 이사는 3일째 회사에 나오지 않았고, 전화가 걸려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BO에서 손을 떼려는 것일까?

그리고 김상만 회장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손톱은 왜 깨물어?”

어느새 다가온 김태하 팀장이 내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는 씩 웃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왜?”

“내가 한번 만나볼까?”

“누구를?”

“회장님 말이야. 회장님만 설득하면 끝나는 거잖아.”

김태하는 김상만 회장을 한 번도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김지영 이사님께 부탁해 놨어.”

“뭘?”

“회장님을 뵙게 해 달라고.”

“네가? 네가 어떻게 설득하려고?”

“글쎄. 뭐든 해 봐야지.”

마땅한 대책은 없다.

하지만, 일단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다.

김태하는 내 어깨를 툭 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우리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언론에서는 이미 바론의 인수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김지영 이사는 연락도 없었고, 일주일째, 회사를 나오지도 않았다.

마치 손을 뗀 것처럼…….

점심시간.

“식사 안 하세요?”

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마성근 팀장이 물었다.

“네. 다녀오세요.”

“어제도 안 드셨죠?”

“요새 입맛이 없어서요.”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밥은 먹어야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괜찮아요.”

마성근 팀장은 몸을 돌려,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 지훈아 주소 보낼 테니까, 최대한 빨리 이쪽으로 와.

김지영 이사.

그녀도 나처럼 다급한 것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마성근 팀장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영 이사님이시죠?”

“네.”

“그래도 이사님은 회장님의 따님이시니까……. 방법이 있겠죠?”

“네. 뭐든 찾아봐야죠.”

마성근 팀장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 내 오른손에 쥐여 줬다.

<그만둬야 하나?>

<바론은 마켓 프레시를 허접한 오픈마켓으로 바꿀 거야. 걔네 오픈마켓 준비했잖아.>

<그럼 MD도 줄이겠지.>

오른손을 펼쳐, 마성근 팀장이 건넨 물건을 확인했다.

크레파스로 그린 오만 원권 지폐.

실제 사이즈보다 작은 지폐 그림을 코팅해 둔 것이었다.

“아이가 그린 건가요?”

“네. 우리 막내놈이 그려 온 제 부적입니다.”

“…….”

“이거 가지고 가시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나는 코팅한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팀장님 주식 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요. 요즘 BO푸드 주가 많이 내려갔죠?”

“네. 최근에 10%나 떨어졌어요. 반면 바론은 10% 이상 올랐고요.”

“10%요?”

“네. 마켓 프레시 초창기만 해도 BO푸드 주식이 쭉쭉 올라가서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영 재미없네요.”

“전에는 얼마나 올랐나요?”

“마켓 프레시 TV 광고 나간 날 기억하시죠? 그때 상한가 찍었어요. 왜요? 부장님도 주식 하시려고요?”

그동안 급한 마음에 나무만 봤지, 숲을 보지 못했다.

나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 보려고요.”

*   *   *

김지영 이사가 알려 준 고급 일식집.

입구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점원이 나를 안내했다.

그는 가장 끝에 있는 방의 노크를 하고, 나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김상만 회장과 정근영 대표가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지영 이사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MD 사업부 원지훈입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정근영 대표가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김지영 이사의 옆에 앉아, 정근영 대표가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았다.

“술 괜찮지?”

“예.”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비웠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정근영 대표였다.

“원 부장. 고맙네.”

“네?”

“진택이 말이야. 원 부장 덕분에 놈이 정신을 차린 것 같아서 말아야. 그래. 할 얘기라는 게, 바론에 관한 얘기인가?”

“네. 맞습니다.”

정근영 대표는 술잔을 비우고, 고개를 돌려 김상만 회장을 바라봤다.

이제 나에게 해 보라는 건가?

김상만 회장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술이 담긴 사기 주전자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잔하지.”

“네.”

나는 고개를 돌려 술을 비워내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마켓 프레시가 오픈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김상만 회장은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명분은 이득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법이네. 나는 항상 실리를 따져왔고,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각이야.”

“마켓 프레시를 실패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는 말인가?”

“네. 마켓 프레시는 이미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저희는 성공적인 1년이었다고 봅니다.”

차가운 표정의 김상만 회장.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자네는 최구열과는 다른 말을 하는군.”

“…….”

“그는 실패를 인정했어. 커머스를 나에게 제안한 것은 최구열이었고, 난 그에게 적자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했네. 그래서 그가 들고 온 카드가 바론이야.”

몰랐다.

최구열 이사가 아닌, 김상만 회장이 먼저 손을 뗐다는 것을 말이다.

회계라는 경영의 언어로만 사업을 판단했던 것일까?

평생 오프라인 사업을 해 온 김상만 회장은 온라인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나는 안광을 뿜어내는 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작은 만둣가게에서 지금의 성공을 이룬 그는 역시 강하고 굳건한 인물이었다.

사기 주전자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김상만 회장의 잔에 술을 따르며, 그의 조금 전 기억을 찾았다.

<정 대표나 지영이는 왜 이놈을 감싸고 도는 거지?>

<커머스에 무슨 미래가 있다고?>

“저흰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최구열과 똑같은 조건을 제시하지. 2개월 안에 커머스를 흑자로 전환하게.”

“그건 불가능합니다.”

내 답에.

대화에 끼어들려 했던 김지영 이사가 말을 멈췄다.

또한, 정근영 대표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 김상만 회장.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BO푸드의 주가로 평가를 받겠습니다.”

“……!”

“최근에 BO푸드의 주가는 10% 이상 떨어졌습니다. 이는 회장님이 커머스의 실패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론은 어떻습니까? 10% 이상 상승하면서 주주들이 마켓 프레시 인수를 기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주주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마켓 프레시의 매출이 올라가고, 사회적으로 이목을 끌수록 BO푸드의 주가가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BO푸드의 주가가 오로지 커머스 때문에 움직였다고 판단하는 것인가?”

김상만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중 커머스가 가장 크다고 확신합니다.”

“최구열은 바론의 자본금 4천억을 들고 왔네. 그럼 자네는 내게 뭘 약속할 수 있겠는가?”

“2개월 안에 BO푸드 주가를 20% 이상 올려놓겠습니다. 커머스가 상장하기 전까지는 BO푸드의 주가로 저희를 판단해 주십시오.”

“그게 전부인가?”

“2개월 후에 저희가 성과를 내면 마켓 프레시의 몸값은 더 오를 것이고, 이는 회장님께서 손해 볼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BO푸드의 시가 총액은 2조가 넘는다.

이에 20%면 4천억.

바론에 매각하려는 금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만약 성과가 없다면?”

“그럼 제가 새로운 주인을 찾아오겠습니다. 대신 약속해 주십시오. BO푸드의 주가가 오르면, 매각을 유예해 주시겠다고요.”

김상만 회장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대표님!”

“예……. 회장님.”

“매각 계획을 2개월 유예하도록 하죠. 그 안에 이 친구가 말하는 성과가 없다면, 그때는 최구열에게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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