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66화>
67.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원지훈!”
이정우 이사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야.”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지금은 최구열에게 숙이고 챙길 거 챙기는 게 맞아!”
“이사님처럼요?”
이정우 이사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술잔을 비웠다.
“그래. 비겁하고 돈만 밝히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어. 난 회사에 미련도, 비전도 없으니까. 내 몫만 받아서 뜨면 끝이야.”
“…….”
“사람의 가치는 바뀔 수 있지만, 돈의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아. 돈이 많아지면 사람을 얻을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저를 대신할 사람으로 차기영 부장을 준비한 건가요?”
온라인 사업부가 새롭게 만들어진 바론.
최구열 이사는 마켓 프레시의 MD들을 잘 알고, 자신이 컨트롤 가능한 차기영 부장을 미리 그곳에 준비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론에서 먼저 메일을 보내 미팅을 요구했고, 그 자리에 차기영이 당당하게 나타났다.
왜 나에게 노출한 것일까?
충분히 숨길 수도 있었는데, 왜?
내가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리자, 이정우 이사가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차기영을 만났나 보지?”
“네.”
“최구열……. 이 소름 돋는 인간.”
“…….”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아. 최구열이 사람을 믿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 아니, 사람을 사람같이 보지 않아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는 네가 마켓 프레시에 애정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애정을 미끼로 너를 데려가고 싶은 거야. 차기영이가 말은 잘 듣지만, 효율은 높지 못한 사람이니까.”
최구열.
그는 생긴 것과 말투는 푸근하고 자상한 듯하지만.
속은 계산적이고 냉정한 사람이다.
나는 이정우 이사가 따라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럼 실수를 한 것 같네요.”
이정우 이사는 다시 술을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실수일까?”
“예.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줬으니까요.”
얼마 전에 있었던 2천억의 펀딩.
이는 BO푸드의 김상만 회장의 보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근데 최구열 이사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런 계획을 세웠다.
아니, 어쩌면 이전부터 계획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의 등에 칼을 꽂아 넣다니…….
그리고 다음은 내가 그 칼을 맞을 수도 있다.
“지훈아. 너도 지분이 있잖아. 적당히 이용하고 빠져. 그게 가장 좋은 거야.”
“BO푸드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글쎄. 그건 네 생각이지. 김상만 회장은 이미 마음을 먹었을 거야.”
“……!”
“김상만 회장은 자수성가를 한 사람이야. 죽어라 일만 해 온 사람이라서 주변에 사람도 없지. 그런 사람이 적자가 계속 이어지는 커머스를 언제까지 안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특별한 신념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
“반면, 바론의 양 회장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로열패밀리 중 한 명이야.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지. 둘이 경쟁이 될 것 같아? 말이 삼대 식품 회사지. 사실 두 회사의 격차가 큰 건 사실이잖아.”
“…….”
이정우 이사의 말이 맞다.
냉동과 레토르트가 주력인 BO푸드.
제과, 스낵, 라면, 레토르트, 냉동 등 모든 제품을 생산과 유통을 하는 바론.
두 회사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이정우 이사의 말처럼 두 회장의 태생 또한 다르다.
“커머스는 매출만을 보고 가는 사업이야. 적자를 벗어날 수 없는 사업이라고.”
“아마존은 2015년부터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그건 미국이니까 그렇지.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커머스로 흑자를 낼 수 없어. 그냥 규모만 불려서 넘기기 좋은 사업이라고.”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
“할 수 있습니다.”
이정우 이사는 나를 빤히 보다가,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도 현실적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좀 실망스러운데?”
그리고 한입에 털어 넣고.
테이블 위에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올려놨다.
“잘 생각해 봐. 최구열이 차기영을 노출시킨 것은 너한테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니까.”
“그럼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요?”
“원지훈!”
“왜요?”
“최구열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최구열 이사.
그를 신화로 보는 사람들은 많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일하면서 알았다.
미국에서 대박을 이어 갔던 그룹폰을 왜 그렇게 급하게 매각했는지.
사람이 아닌 돈을 따르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말이다.
나는 술잔에 술을 따르고 다시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한번 해 보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
* * *
김지영 이사의 오피스텔 앞 정원.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지훈이니?”
김지영 이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하얀 모자에 회색 카디건, 몸에 꽉 달라붙는 검은 레깅스를 입은 그녀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 다녀 왔어요?”
“응. 앞에 편의점에. 넌 술 마셨어?”
걱정스러운 표정의 김지영 이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네. 조금요.”
“에이, 조금이 아닌 거 같은데? 술 깨는 약이라도 사줄까?”
“밤늦게 이러고 다니지 마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김지영 이사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찔찔이가 이제 누나 걱정하는 거야? 다 컸네. 다 컸어.”
나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 정도만 하시죠.”
“…….”
“맥주 한 캔만 산 건 아니죠?”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 안에 손을 넣어,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괜찮겠어?”
“아직 멀쩡해요.”
“그럼 나도.”
김지영 이사는 비닐봉지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 바짝 달라붙어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이사님.”
“또 이사님이야?”
“회장님은 요새 어떠세요?”
“그냥 똑같이 잘 지내시지. 갑자기 회장님은 왜?”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차기영 부장을 만난 것과 이정우 이사의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듣던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추웠는지, 다리를 벤치로 올려 두 팔로 끌어안았다.
“추워요?”
“조금.”
나는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감싸 줬다.
그리고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 말씀드려야겠죠?”
“아니, 이정우 이사의 말처럼 회장님도 이미 아셔.”
“……!”
“최구열 이사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들었어.”
그랬구나.
이정우 이사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바론에 마켓 프레시를 넘기겠답니까?”
“글쎄. 그건 회장님이 판단하시겠지.”
“이사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오늘 알았어.”
김지영 이사는 남은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먼 산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회장님이 생각하실 동안 기다려야지.”
“이사님은 마켓 프레시에 애정이 없습니까? 이대로 넘겨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으세요?”
특판팀과 함께 만든 달빛 배송.
목요일마다 제품 품평회를 통해 신제품을 수급하는 정책.
도재문 대리와 만든 재고 관리 시스템.
튜나월드와 완성한 완벽한 콜드 체인.
그리고 수많은 제조사와 벤더, 협력사들.
마켓 프레시는 나와 우리의 노력이 그대로 배어 있는 곳이다.
이는 절대 돈 몇 푼으로 살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
“회장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김지영 이사는 무슨 생각인지, 피식 웃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네 말이 바론에서 제시하는 돈보다 더 가치가 있을까?”
“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그럼 회장님께 말씀드려 볼게.”
“고맙습니다.”
* * *
이른 아침.
신선식품팀의 정진택 팀장이 사내 메신저로 문서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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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불러베리.
가장 뜨거운 천도복숭아.
미안 내가 사과할게.
내 상태가 메론이야.
정신 체리세요.
살구 싶으면 먹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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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웬 말장난이지?
웃기지도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최구열과 바론에 대한 생각뿐이었으니까.
“어때요? 재미있죠?”
정진택 팀장이 내 책상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네. 그러네요.”
“이번에 추석이 끝나고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아서요. 사이트에 이렇게 말장난을 좀 해 볼까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내 답에.
정진택 팀장은 뭔가 께름칙했는지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재미없으신가요?”
“아뇨. 재미있어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뭘요?”
“얼굴에 쓰여 있어요. 왜 이런 짓을 하냐고요.”
정진택 팀장은 팔짱을 끼고, 내 책상에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인턴 애들이 올린 기획서 보셨어요?”
“기획서요?”
“네. 부장님이 인턴들한테 내준 숙제들이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추석 전, 사업부 회의 중에 내가 했던 말을.
“아…….”
“그거 인트라넷에 전부 올라왔어요. 근데 재미있는 게 꽤 많네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는 인트라넷에 접속해, 인턴들이 올린 기획안을 확인했다.
옆에서 나를 가만 보던 정진택 팀장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함께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역시 이안나가 에이스는 에이스입니다.”
“왜요?”
“한번 보세요.”
김경일 팀장의 펫 사업팀으로 배정한 이안나.
그녀는 유일한 경력직으로 김경일 팀장이 적응을 못 한다고 평가했던 인물이다.
나는 정진택 팀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이안나의 제안서를 먼저 열었다.
[온/오프라인 수입 과자 판매 실태와 전망]
마켓 프레시는 유기농이나 건강한 스낵류만 판매한다.
근데 수입 과자라…….
얼핏 보면 잘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현재 유행하는 상품군이기에 한 번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문서를 열어, 그녀가 선택한 상품들을 확인했다.
테라 칩스, 미주라 비스켓, 베기스틱스, 핀크리스프 등.
다르다.
불량식품처럼 허접스러운 스낵이 아닌 유기농, 친환경 제품만 찾아놨다.
“이건 좀 흥미롭군요.”
“그죠?”
“판매량이 나오면, 다른 대중적인 스낵들도 함께 판매해 볼 수 있겠어요.”
“네. 맞아요. 가공식품팀의 김준위 것도 한 번 보세요.”
다시 정진택 팀장의 말대로 김준위의 PPT를 확인했다.
[새벽 배송을 이용한 베이커리와 간편식]
마켓 프레시에서는 현재 샐러드와 닭가슴살은 주력으로 판매한다. 베이커리도 일부 판매하지만, 본격적으로 카테고리를 만들 수준은 아니다.
김준위는 아침에 빵을 굽는 대형 프랜차이즈의 제품을 받아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가전팀의 김혁진은 레시피를 상품 상세 설명에 같이 넣을 것을 제안했고.
유아동팀의 최지섭은 뜬금없이 아동복을 판매하자고 제안했으며.
특판팀의 김현희는 배송 기사들의 처우 개선에 대해 말했다.
당장 현실로 이어 갈 수 있는 것들이 많지는 않지만.
많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도 많다.
“인턴들이 이거 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어했는지 모르시죠?”
“팀장님도 그랬어요?”
“네?”
“재미있냐고요?”
“솔직히 이전에는 일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서 정진택 팀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원들을 둘러봤다.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를 하거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 식구, 내 부서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소비한다.
그런 회사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것일까?
나는 부서원들의 밝은 얼굴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