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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65화 (65/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65화>

66. 하지만 용서는 못 하겠네요

“박대영! 지금 뭐 하는 거야?”

차기영 부장의 말에 박대영 차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표정으로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저건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다.

몸을 옭아매는 것들을 버리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차기영 부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오랜 기간 박대영 차장과 일한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야가 아니고, 박대영 차장님이라고 하셔야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박대영 차장.

차기영 부장은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너…….”

“너가 아니고 박대영 차장님입니다. 미팅하러 온 협력사 직원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게……. 미쳤나!”

“네. 미쳤습니다. 아주 돌았습니다. 내가 아직도 부장님 밑이나 닦아주는 그런 놈으로 보입니까?”

“…….”

“그래, 백번 양보해서 유통기한,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 단가는 왜 이 모양입니까? 위탁으로 판매하는 오프라인 마트들보다 나쁜 조건으로 떠넘기고. 내가 당신 밑에 있었다고 아직도 우습게 보이는 겁니까?”

“차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옆에서 가만있던 바론의 직원 하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박대영 차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에 맞섰다.

“바론은 제품과 사람, 모두 다 재활용해서 쓰나 보군요. 리베이트로 쫓겨난 사람을 이렇게 온라인 사업부 본부장으로 앉히고 말이야.”

“리베이트요?”

“몰랐습니까? 바론 같은 대기업이 그것도 알아보지 않고 경력직을 채용한 겁니까?”

“……!”

차기영 부장은 벌게진 눈으로 박대영 차장을 노려봤다.

“야! 박대영!”

“박대영이 아니고! 박대영 차장님이라고!”

둘의 고성이 오가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차기영 부장이었다.

“나이 처먹고, 어린놈 비위나 맞추니까 좋냐?”

“뭐요?”

“저 어린놈이 이러라고 시키디?”

“말조심하십쇼. 지금 난 당신 밑에서 눈치 보고 비위나 맞추던 때보다 좋으니까.”

“…….”

“지난 10년간, 부장님이 저한테 가르친 게 뭐가 있습니까? 여기서 헤헤, 저기서 헤헤거리면서 병신같이 10년을 살았습니다.”

멍한 표정의 차기영 부장.

박대영 차장이 나와 일한 지는 겨우 6개월이고.

둘은 10년을 함께한 사이다.

아마, 지금 그에게는 박대영 차장의 행동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어와 박대영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죠 차장님. 길게 얘기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아무런 말 없이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주차장을 향해 걸을 때도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박대영 차장은 몇 걸음을 걷다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내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참지 못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이 더 좋다는 말 사실입니까?”

“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요즘은 좀 사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

회사 생활 중에 이보다 힘들고 치열한 일이 있을까?

차기영 부장 밑에서 10년 동안 일한 박대영 차장 또한 이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라인과 사내 정치.

그것들이 가득했던 체인마켓과 마켓 프레시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고, 주머니에 있던 차 키를 꺼내 들었다.

“갑시다. 사람들이 기다리겠네요.”

“저……. 오늘은 정말…….”

“오늘 정말 잘하셨습니다.”

내가 씩 웃고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원지훈!”

어느새, 1층 주차장까지 내려온 차기영 부장이 나를 불렀다.

“진짜……. 저 인간이…….”

당장 달려갈 기세의 박대영 차장.

나는 그를 한쪽 팔로 막아섰다. 그리고 차기영 부장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요?”

“…….”

아무런 말이 없는 차기영 부장.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눈앞에 살짝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갑니다.”

“최구열 이사님이 나를 여기로 보내셨다.”

최구열 이사?

왜 그가 차기영 부장을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나는 차기영 부장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왜요?”

“갤러리아 백화점에 팝업 스토어를 입점하실 생각이야. 그리고 그곳에 바론과 BO의 상품들을 진열하실 거라 하셨다.”

“…….”

“이메일로 계약서 보낼 테니까, 웬만하면 도장 찍도록 해. 최 이사님에게 맞설 생각하지 말고.”

팝업 스토어.

짧은 기간 특정 타깃을 대상으로 오프라인으로 운영되며.

주로 마케팅 채널로 이용이 된다.

갤러리아 백화점이라면, 상징하는 의미가 크다.

또한, 마켓 프레시의 주요 고객들이 강남에 밀집해 있어 마케팅 적인 효과도 높을 것이다.

근데 왜?

우리 제품들만으로도 충분한 공간에, 바론의 제품까지 넣으려는 것일까?

나는 차기영 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왜요?”

“박대영이 애가 셋이다. 매달 들어가는 학원비만 해도 죽을 맛일 거다.”

“…….”

“최 이사님에게 맞설 거면 혼자 해. 괜히 다른 애들 다치게 하지 말고.”

차기영 부장은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를 보고 아무런 말 없이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박대영 차장은 차 부장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최구열…….

또 무슨 생각인 것인가?

바론과의 팝업 스토어를 만들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진행하려는 것일까?

*   *   *

늦은 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은 조용했다.

사무실 전체에 불이 꺼졌고, 내 책상 위의 스탠드만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최구열 이사가 팝업 스토어를 준비하다니…….

그것도 바론의 제품을 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임원실로 올라갔다.

이미 불이 꺼진 복도.

고요한 복도에 남자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지훈?”

새하얀 코트를 입은 이정우 이사.

그는 나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여긴 웬일이야? 혹시 나 보러 온 거야?”

“퇴근 안 하셨어요?”

“응.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근데 여긴 웬일이야?”

내가 알기로, 요즘 이정우 이사는 티켓 사업을 반대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바쁘다.

평소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간신배들도 없었기에, 혼자서 시장을 조사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잘 돼 가세요?”

“뭐. 그럭저럭. 밥은 먹었어?”

“네. 대충 먹었습니다.”

“음……. 그럼 소주나 한잔할래?”

“그러죠.”

나는 순순히 그를 따라, 인근의 작은 포장마차로 갔다.

이정우 이사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자, 포장마차의 사장이 재빨리 간의 테이블과 의자를 펼치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소주 두 병이랑 어묵탕 시원하게 끓여 주세요.”

이정우 이사는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 편하게 술은 각자 따라 먹는 거다. 오케이?”

“이사님.”

“응?”

“혹시 팝업 스토어 얘기 들으신 거 있습니까?”

“팝업 스토어?”

전혀 모르는 눈치다.

나는 소주의 병을 따서, 그의 잔에 가득 따라 줬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팝업 스토어 준비해? 어디다? 이왕이면 갤러리아 같은 데 어때?”

정말 모르나 보다.

그는 소주를 마시고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어묵탕을 떠먹었다.

“와! 사장님 오늘 간 딱 맞네! 하하하.”

“내가 특별히 신경 쓴 겁니다!”

“요리 많이 느셨어. 우리 사장님!”

이정우 이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소주를 자신의 잔에 따랐다.

“잘 해 봐.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최구열 이사님은 요즘 어떤가요?”

“글쎄. 한참 티켓, 티켓 떠들고 다니다가 요새는 좀 조용하네.”

“뭔가 이상한데요?”

“그래? 뭐가?”

“서둘러 준비할 것처럼 하고서 아직까지 조용한 것이 이상하다고요.”

“뭐 그러네. 하여간 난 덕분에 숨 좀 돌리고 좋지 뭐.”

이상하게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이정우 이사.

평소의 그와는 다르다.

“바론에 아는 분 있으세요?”

“바론? 갑자기 바론은 왜?”

“제품 좀 받아볼까 해서요.”

“거기 온라인은 다 벤더들에게 풀지, 직접 나서지 않을걸? 그리고 벤더들에게 마프에는 절대 물건 넣지 말라고 했대.”

온라인 사업부가 만들어진 것도 모르는 건가?

“바론에 온라인 사업부 만들어진 거 모르세요?”

“온라인 사업부?”

팅!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던 이정우 이사가 실수로 테이블 위의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그는 새로운 숟가락을 꺼냈고.

나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숟가락을 움켜잡았다.

<온라인 사업부는 또 어떻게 안 거야?>

<설마……. 그냥 소문만 들은 거겠지.>

이정우 이사의 조금 전 기억.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그의 기억들을 들어 봐야 한다.

나는 간이 의자에 올려져 있는 그의 가방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가방 이거 명품이죠?”

“오, 원지훈이 가방 볼 줄 아는데?”

가방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항상 들고 다니고 가장 많이 만지는 물건이 필요하다.

“이사님. 전자 담배 전에 주신 거 잃어버렸어요.”

“그래? 하나 사줄까?”

“아뇨. 제가 사야죠. 이사님 담배랑 똑같은 거로 사려고 하는데, 좀 봐도 될까요?”

“하긴, 이게 폼이 좀 나지.”

이정우 이사가 건네는 전자 담배를 오른손으로 받아 들었다.

<최구열 이 늙은 여우 새끼…….>

<어떻게 해야 하나. 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지분 넘기고 빠질까?>

<아니야. 지금 넘기긴 너무 아까워. 좀 있으면 상장인데.>

<그냥 쥐죽은 듯이 상장 때 한몫 잡고 빠지는 거야.>

돈, 돈, 돈.

머릿속에는 돈과 정치에 대한 것뿐이구나.

그리고.

<양유종 회장은 당연히 상장을 당길 수 있겠지. 그래…….>

바론의 양유종 회장?

설마 그에게 투자를 받아서 다시 최구열 이사와 싸워 보려는 것인가?

아니…….

상장을 당길 수 있다는 말이라면 이건 투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럼 설마?

“이사님.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뭔데?”

“바론 계열사가 총 일곱 개죠?”

“응. 잘 아네?”

“당연히 알죠. 기업을 2년 만에 상장시키는 귀신 같은 양유종 회장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정우 이사는 내 눈을 피하고, 빈자리를 보며 술잔을 비웠다.

“그런가?”

“BO가 아니라 바론에서 시작했다면, 참 쉬웠을 텐데.”

“……!”

이정우 이사의 놀란 표장을 보고.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씩 웃으며 빈 술병을 허공에 올리고 흔들었다.

“사장님! 여기 이즈백으로 두 병이요!”

그는 술을 주문하고.

고개를 돌려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바라봤다.

“원지훈. 그 말 진심이야?”

“뭐요?”

“양 회장님이면 쉬었을 것이라는 그 말.”

이젠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최구열 그리고 이정우.

이 둘이 손을 잡고 바론에 회사를 넘기려 한다는 것을.

나는 술잔에 반쯤 남은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고, 미소를 지었다.

“크으……. 돈이 참 좋죠?”

“…….”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아요. 일하는 사람, 돈 주워 가는 사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갈라놓는지.”

“원지훈. 말에 가시가 있구나.”

이정우 이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해는 해요. 하지만 용서는 못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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