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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64화 (64/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64화>

65. 첫 단추를 채우는 데 의미를 두자고

명절마다 하는 가족 코미디 영화.

300만이나 본 영화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다.

김지영 이사는 자리가 불편했는지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 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재미없지?”

귓가를 스치는 그녀의 숨소리와 짙은 향수 냄새.

나는 몸을 살짝 비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가서 가볍게 커피 한잔 어때?”

“그래요. 그게 더 좋겠네요.”

우린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나오자마자 기지개를 켜며, 김지영 이사에게 말했다.

“커피 말고 맥주는 어때요?”

“차 가져왔잖아. 오늘 같은 날 대리 기사님 부르기도 미안하고…….”

보통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항상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했다.

“그럼 저는 맥주, 이사님은 음료수로 하시죠.”

“맥주가 마시고 싶었구나?”

“네. 느끼한 것들만 먹었더니. 좀 그러네요.”

“그래. 그럼 가자.”

우린 극장 근처에 문을 연 포차로 들어섰다.

연휴 기간, 문을 열지 않은 집이 많아서 그런지 포차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간단한 안주와 음료를 주문하고, 김지영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휴 끝나면, 티켓 사업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올 거야.”

“네. 그러겠죠.”

“지훈아. 너 이정우 이사님이랑은 친하지?”

“아뇨. 그렇게 친하진 않습니다.”

“그래…….”

김지영 이사는 자신의 잔에 콜라를 따르고 내게 내밀었다.

“자, 기분이라도 내야지. 짠.”

나는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사님. 근데 이정우 이사는 왜요?”

“연휴 전에 잠깐 얘기를 했거든.”

“어떤 얘기요?”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자신이 총알이자 총알받이가 됐다면서 말이야. 솔직히 앞에 나서서 거들먹거릴 때는 좀 보기 그랬는데……. 막상 그렇게 말하니까 미안하더라고.”

“음…….”

최구열 이사는 2천억 펀딩에 성공한 이후, 회사 내의 입지가 완전히 변했다. 그리고 그 펀딩은 김지영 이사가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 점이 미안했나 보다.

“사실, 내가 이정우 이사님을 힘들게 만든 거잖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그나저나 넌 티켓 사업 어떻게 생각해?”

“문화 공연은 언제든 변수가 생길 수 있어요. 재고가 없다는 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기간 안에 판매 못 하면 전량 폐기니까요.”

“흠……. 그래. 위험하지. 그래서 나도 고민 중이야. 솔직히 최구열 이사님이 티켓 사업을 제시하실 줄은 몰랐어.”

“MD 사업부에 고 부장을 집어넣을 기회니까요. 최구열 이사는 티켓이 안 돼도 어떤 카테고리라도 사이트에 꽂아 넣으려 할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것보다 연휴 끝나면 바로 바론이랑 미팅 있어요.”

“바론?”

주식회사 바론.

BO푸드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식품회사 중 하나로 마켓 프레시에 입점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냉동, 통조림, 레토르트, 라면, 제과, 스낵 등.

그들이 취급하는 제품은 BO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실 말이 좋아서 3대 식품회사지, 그들의 시장 점유율은 언제나 40% 이상이었다.

“네. 이번엔 꼭 받아야 하는데…….”

김지영 이사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일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별로 재미도 없다.”

“네. 그래요.”

김지영 이사는 자세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지훈아. 너 전에 봤던 뮤지컬 배우 있잖아.”

“누구요?”

“얘가 알면서 이러네? 진아 씨 말이야! 그 이후로 만나 봤어?”

“아뇨. 제가 왜요?”

“에이,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눈웃음을 짓는 김지영 이사.

나는 그녀의 지금과 같은 눈웃음이 참 좋다.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변하고, 눈가의 주름들마저 예쁘게 자리 잡혀 있다. 또한, 코를 찡긋하는 것은 귀여웠으며,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표정이다.

“숨기긴 뭘요? 진짜예요.”

“정말?”

“네, 정말이요.”

“그럼 내가 다리 놔줄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잔인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알아서 해요. 누나나 빨리 좋은 남자 만나요!”

실수였다.

누나……. 김태하가 그 단어는 절대 쓰지 말라고 했는데.

김지영 이사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자신의 얼굴을 내 코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누나……. 그 말 오랜만이네.”

왜 갑자기 심장이 뛰는 걸까?

그녀를 이렇게 가까이 대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럴까?

나는 재빨리 뒤로 몸을 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누나…….”

“왜? 난 듣기 좋은데? 예전 너 코찔찔이 때의 기억도 나고 참 좋네.”

“내가 언제요?”

“앞으로 둘이 있을 때는 꼭 그렇게 불러. 알았지?”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죠.”

“그래.”

*   *   *

“연휴 기간에 판매량, 재고량 확인해서 올려!”

“네. 마켓 프레시입니다. 네네. 확인하고 메일 보내 드릴게요.”

“남양주에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첫날.

부서원들은 쉬는 동안 밀렸던 업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절반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외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차장님! 제안서 준비하셨죠?”

“예. 전부 다 출력해 놨습니다.”

“알겠습니다. 제 차로 가시죠.”

“예!”

나와 박대영 차장은 상의를 걸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명함과 휴대전화, 다이어리, 볼펜, 노트북 등을 하나씩 점검했다.

그때.

“부장님!”

마성근 팀장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네?”

“저 잠시 이거 좀.”

종이 문서를 내미는 마성근 팀장.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는 그를 잡아당겨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바빠서 내려가면서 좀 볼게요.”

마성근 팀장이 내민 문서는 특판팀 다음 주 판매 리스트였고, 내 서명이 있어야지만 진행이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젖병 소독기는 단가가 너무 높네요.”

“인터넷 최저가보다 5%는 낮춘 겁니다.”

“이건 수량도 많이 안 나갈 텐데, 제조사에 확인하고 단가 낮출 수 있으면 더 낮추세요. 유아동쪽 타겟 상품들은 분유나 이유식이니까 그쪽에 포커스를 더 맞추고요.”

“네 알겠습니다.”

“수정한 단가들 인트라넷에 올려 주시면, 이동하면서 모바일로 서명해 둘게요.”

“옙. 그리고 부장님……. 바론이요. 그쪽에서 먼저 연락 온 거죠?”

“네. 우리가 그렇게 요청할 때는 대꾸도 없더니, 추석 전날에 뜬금없이 메일 한 통이 왔더라고요.”

마성근 팀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이상하네요.”

“일단 부딪쳐 봐야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서고.

마성근 팀장은 다시 17층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부장님, 차장님 화이팅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 박대영 차장과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잠실 바론의 사옥 앞.

내가 옷매무새를 만지는 사이, 박대영 차장이 전화를 걸어 약속을 확인했다.

“가시죠.”

“네.”

안내를 받아 도착한 커다란 회의실.

우린 노트북을 열고, 미팅을 준비했다.

잠시 후, 40대 남자 둘과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우린 가장 앞장서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원지훈, 박대영 잘들 있었어?”

마켓 프레시에서 안 좋게 나간 차기영 부장.

이전보다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는 우리를 차례로 끌어안았다.

“차 부장님?”

“그래. 이렇게 다시 보니까 아주 반갑네. 마프는 별일 없지? 최충연이랑 이진성이도 잘 지내지?”

“네. 모두 잘 지냅니다.”

“난 대영이가 부장 달 줄 알았는데, 지훈이가 올라갔구나. 하하하.”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내가 고개를 숙이자.

차기영 부장은 고개를 돌려 박대영 차장을 바라봤다.

“대영아, 제수씨랑 애들은 잘 있지? 추석 때 연락할까 하다가 너도 바쁠까 봐 안 했어.”

“아닙니다. 연락 주시죠.”

“하하하 그래. 우리 미팅 끝나고 오래간만에 한잔할까?”

“저야 언제든 좋죠.”

박대영 차장은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오랫동안 자신이 모셔 왔던 사수를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린 회의실의 들어온 나머지 둘과 형식적인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받은 명함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정리하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갑자기 마켓 프레시는 왜?>

<마프 거기 BO잖아?>

처음 보는 사람들의 기억.

그리고.

<지가 어쩔 건데?>

마지막 차기영 부장의 기억.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먼저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눠드린 자료에는 저희 커머스의 월별 판매량과 회원 수, 재구매율 등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차기영 부장과 바론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준비한 자료를 확인했다.

나는 그들에게 잠깐의 시간을 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마켓 프레시는 사입 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류와 배송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잠깐!”

차기영 부장이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출력한 자료를 들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요?”

“재고 말이야. 어떻게 재고를 3% 이하로 맞췄지? 사입 정책을 고수하면서 말이야.”

그가 회사에 있을 당시는 재고가 20%에 육박했다.

“빅 데이터를 활용해, 제품의 특성에 맞게 사입 수량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호 그거 재미있네.”

“예. 다음 장의 바론 쪽 제품별 1차 납품 물량도 빅 데이터로 예측한 것입니다.”

차기영 부장은 파일을 넘겨보고, 미간을 구겼다.

“그럼 이게 예상 판매치라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럼 완전히 틀렸는데?”

“네?”

“우리 쪽 스낵의 예상 판매치가 오픈마켓 판매 수량의 반도 안 돼.”

“기존의 회원성향을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본부장님도 아시겠지만, 마켓 프레시는 신선이나 냉동 제품들의 비중이 높아서요.”

“그래도 그렇지. 바론 제품인데 설마 겨우 이 정도겠어? 수량을 조금 늘리는 건 어때?”

수량을 늘리자는 건, 재고가 많다는 말이다.

“재고가 많습니까?”

“아니. 재고가 어디 있어? 내가 특별히 마켓 프레시에만 더 물량을 주려는 거야.”

“왜죠?”

“왜긴? 당연히 내 손을 탔던 커머스인데 그러고 싶은 게 당연하지!”

차기영 부장은 나와 갖은 마지막 술자리에서 회사의 불만을 쏟아 냈었다.

그리고 이렇게 호의를 베풀 인물도 아니다.

“유통기한은 얼마나 남은 재고입니까?”

“재고 아니라니까! 일단 스낵은 40여 종이 들어갈 거야. 유통기한도 4개월 이상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스낵류의 유통기한은 평균 6개월 정도.

4개월이 남았다고 하면, 이는 두어 군데 돌다가 팔리지 않은 재고가 맞다.

“4개월이면 재고 아닙니까?”

“그럼 동네 슈퍼에서 파는 것도 다 재고게? 지훈아,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마.”

차기영 부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 사이 바론의 여직원은 출력한 문서를 들고 와 나와 박대영 차장에게 건넸다.

고개를 숙여, 문서를 내려다봤다.

스낵류의 사입 요청 단가를 적어 둔 표.

생각보다 비싸다.

일반 오프라인 마트의 공급가보다 10%는 많게 들어와 있다.

그것도 유통기한이 2개월이나 지난 제품으로.

“첫 거래는 그래도 다음에는 오프라인 마트 가격에 맞춰 줄게.”

“사입 단가는 저희가 정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하면 어때? 일단 첫 단추를 채우는 데 의미를 두자고.”

이런 계약은 필요 없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우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뿐이다.

나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조건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우린 첫 단추를 잘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지훈!”

차기영 부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눅이 든 표정으로 앉아 있던 박대영 차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기영 본부장님! 우린 부하 직원이 아니라 협력사입니다. 예의를 갖춰 주세요!”

“뭐?”

“원지훈이 아니고 원지훈 부장님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박대영 차장.

그는 꼭지가 돌면 미친개로 돌변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금 내 편을 든 것인가?

오랜 기간 자신의 사수였던 차기영 부장이 아니고?

나는 고개를 돌려, 박대영 차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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