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63화>
64. 누구 올 사람 있어?
추석 연휴.
첫날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나갔다.
화장실 갈 때만 일어났고.
배가 고파서 편의점 도시락으로 한 끼를 때운 게 전부였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돌아가신 아버지.
나는 그 흔한 형제도 없다.
친척? 그 또한 없다.
나에게 연휴는 TV나 영화, 밀린 잠을 자는 기간일 뿐.
어떤 의미도 없었다.
위층에 사는 노부부에게 손자, 손녀들이 왔나 보다.
조용하던 윗집이 아침부터 쿵쾅대기 시작했다.
보통은 시끄럽게 느껴졌겠지만, 그 쿵쾅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미소를 짓고,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
눈을 비비고 커튼을 다시 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안방 문틈 사이로 보이는 27평짜리 아파트가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였다. 어디 혼자 갈 만한 데 없나 하는 생각에 휴대폰으로 이곳저곳 검색해 봤지만, 딱히 할 게 없었다.
그때.
띵동! 띵동!
조용한 집에 초인종 소리가 가득 찼다.
잘못 누른 건가?
올 사람이 없는데…….
귀찮은 생각에 침대에 누운 상태로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벨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인터폰 화면을 보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요?”
“문 열어! 마누라가 너 가져다주란다!”
사외이사 김재열.
나를 가장 잘 알고, 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이다.
현관문을 열자.
양손에 커다란 비닐 백을 든 그가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야! 좀 받아! 무거워 죽겠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몰라. 마누라가 다 싸 주는데 일단 들고 왔어.”
나는 그의 비닐 백 하나를 받아 들었다.
<혼자 사는 집에 뭐 이렇게 많이 싸간다는 거야?>
<아주 한 살림을 차려 가네.>
가방끈에서 들려오는 생각.
또 형수님이 한 음식들을 억지로 담아 왔나 보다.
김재열 이사는 작년에도 이랬다.
집에 있는 음식들을 싸 들고 와서 그냥 놓고만 갔었다.
“자꾸 이러시면, 형수님한테 제가 혼나요.”
“아니, 형수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너 잘 생겼잖아. 그래서 좋아하는 거야.”
“형수님이 눈이 높으시군요.”
“응 아주 높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김재열 이사는 피식 웃고는 남은 비닐 백 하나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이 봐. 이 봐. 또 편의점 도시락이나 까먹고, 그리고 여기가 회사냐? 냉동에 레토르트까지 아주 골고루 사 놨네.”
“혼자 살면 다 그렇죠.”
“밥 안 먹었지? 전이랑 가져왔으니까 따뜻할 때 먹자.”
“이사님도 드시려고요?”
“집에 들어가면 뭐 하냐. 쉬면 쉰다고 뭐라고 하고, 도와주면 방해된다고 비키라고 하고. 오늘은 여기서 최대한 뻐기다 가야겠다.”
김재열 이사의 말투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요?”
“싫으면 네가 어쩔 건데?”
그는 내 목에 헤드록을 걸고, 장난을 쳤다.
그때.
띵동! 띵동!
또 울리는 벨 소리.
장난을 치던 나와 김재열 이사가 서로를 바라봤다.
“누구 올 사람 있어?”
“아뇨.”
나는 빠른 걸음으로 인터폰이 걸린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화면에는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마성근 팀장이 보였다.
현관문을 열자.
한 손에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마성근 팀장.
그리고 뒤에는 김대성과 하연두 역시,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이거 저희 마님이 가져다주랍니다.”
“국밥집 여사님이 부장님 명절에 혼자 계신다고, 이거 가져다주라네요. 곰탕이랑 김치예요.”
“저는 마 팀장님이 여기 먹을 것 많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하하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마성근 팀장은 나를 밀치고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여……. 원지훈이 좋겠는데?”
이를 뒤에서 보고 있던 김재열 이사가 씩 웃었다.
그리고 팀원들은 김재열 이사를 발견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헛, 이사님도 계셨네요?”
“네. 왔어요? 마성근 팀장님이시던가?”
“예, 맞습니다.”
“이번 명절은 좀 명절 같겠네. 빨리들 와요! 같이 먹게!”
“예! 예!”
하연두는 팔을 걷고 설거지통에 던져둔 식기들을 씻기 시작했다.
김대성은 베란다에 대충 던져둔 커다란 교자상을 가져왔고, 김재열 이사는 자신이 싸 온 반찬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냄비를 꺼내 국을 데우던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회사인 줄 알아요? 와서 좀 도우시죠?”
지금까지 이렇게 시끌벅적한 명절을 보낸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식사를 준비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씩 웃고, 가스레인지 앞에 있는 마성근 팀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커다란 상에 음식들이 놓이고.
김재열 이사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자자! 우리 집은 아니지만 와서 빨리들 들어요. 식으면 맛없어.”
“네네!”
딩동! 딩동!
또 벨 소리다.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작은 액정을 확인하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이사님?”
하얀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김지영 이사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도 역시 작은 종이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집에 혼자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녀가 건네는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혼자 살 텐데……. 명절인데, 가 볼까?>
<아니다. 그냥 말자.>
<밥은 먹나? 배달이나 시켜 먹을 텐데. 이걸 가져다 줘? 말아?>
<회사 상사가 찾아가면 불편하겠지?>
<아니지. 아니야. 오늘은 누나로 가는 거니까.>
<태하한테 같이 가자고 해 볼까?>
<그냥 이것만 주고 빨리 와야겠다.>
한참을 고민했나 보다.
그녀의 긴 망설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나는 씩 웃고, 문을 활짝 열어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에 손님 많아요. 식사 안 하셨죠?”
“응?”
그 사이 현관으로 나온 마성근 팀장과 하연두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저희도 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김지영 이사.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사이 마성근 팀장이 맨발로 현관으로 나와 김지영 이사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빨리 오세요. 국 식어요.”
“아……. 제가.”
“숟가락 하나만 놓으면 됩니다. 빨리 빨리요! 연두 씨! 이사님 밥 좀 퍼!”
마성근 팀장은 자기 집인 것처럼 손님을 맞이했다.
그렇게 우리 여섯은 다소 작아 보이는 상에 삥 둘러앉았다.
“이사님. 이거 좀 드세요. 마누라가 직접 동태살 발라서 부친 겁니다.”
로비의 달인 김재열 이사가 동태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연두 씨는 언제 왔어?”
“조금 전에 팀장님이랑 같이 왔어요. 국밥집 여사님이 부장님 곰탕이랑 김치 드리라고 해서요.”
“아. 그거 나도 알아. 이게 거기 김치지?”
“네. 어제 담근 거라서 엄청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그래?”
김지영 이사는 하연두가 가져온 김치를 입 안에 넣고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식사가 끝나고.
마성근 팀장은 종이 가방에 담아 왔던 고스톱과 국방색 담요를 꺼내왔다.
“자자! 소화도 시킬 겸 점 백으로 시작해 볼까요? 이사님들도 고스톱 하실 줄 알죠?”
마성근 팀장은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김지영 이사는 그의 시선에 마지못해 피식 웃었다.
“점 백이 뭐예요. 점 오백부터 시작하죠.”
“역시 통이 크시군요.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 별명이 신대방 아귀찜입니다.”
“팀장님은 양재천 김 여사라고 못 들어 보셨나 보군요.”
김지영 이사의 개그 코드가 마성근 팀장과 맞을 줄 꿈에도 몰랐다.
어느새 친해진 둘이었다.
마성근 팀장은 거실 가운데 담요를 깔고, 남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자자! 두 분 더 모십니다.”
“집에 안 가세요?”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이 미간을 구겼다.
“차비는 벌어 가야죠. 부장님 빨리 오세요. 빨리.”
“흠……. 저는 구경만 할게요. 제가 끼면 힘들어지실 겁니다.”
“어허! 부장님! 어디서 솟구치는 자신감입니까? 화투장에는 서열이 없는 겁니다.”
“후회하실 텐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죠. 사외이사님은 안 치세요?”
“당연히 쳐야죠. 지훈아, 나 현금 좀 빌려줘.”
그렇게 나와 김재열 이사, 김지영 이사, 마성근 팀장은 초록색 담요 위에 둘러앉았다.
이길까? 져 줄까?
나는 카드와 고스톱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쉬우니까.
가운데 탑처럼 쌓인 화투장에는 사람들의 손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기억이 들려온다.
나는 이 기억이 조금 전의 기억인지, 오래전의 기억인지만 가려내면 된다.
<한 장만 들어오면 홍단이네.>
김지영 이사의 목소리.
<헛. 똥 광이네?>
실수로 뒷장을 넘겨 본 마성근 팀장의 목소리.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똥 피를 바닥에 던지고, 가운데 쌓인 화투장을 뒤집었다.
“쪽이네. 쪽! 자자 한 장씩! 팀장님은 비 쌍피로 주시면 됩니다!”
“어째 느낌이 싸한데? 방금 제가 실수로 뒤집은 거 보셨죠?”
“제가 사실은 독심술이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습니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마성근 팀장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백두대간에 무슨 그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십니까?”
“팀장님. 백주대낮이겠죠.”
김대성이 지적하자, 마성근 팀장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거나, 그거나!”
“자자, 그러지들 마시고 한 장씩!”
나는 마성근 팀장과 김지영 이사의 앞에 놓은 피를 한 장씩 가져왔다.
김대성은 마성근 팀장의 뒤에서 훈수를 두다 한 소리 들었고, 하연두는 주방에서 과일을 썰어 와 내려놓았다.
“아 또 쌌어!”
“딱 내려 두세요. 딱! 자자, 한 장씩!”
그렇게.
텅 비었던 집이 사람들의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 * *
“잘 놀다 갑니다! 내일 라운딩이 잡혀서.”
해가 질 무렵.
김재열 이사가 먼저 일어났다.
마성근 팀장도 아내의 전화를 받고 옷을 챙겨 입으며,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얼마 따셨어요?”
“오만 원 조금 넘네요.”
그나마 몇 판 져 줘서 이 정도지.
그들은 말만 타짜였다.
아마, 마음먹고 쳤으면 몇십만 원은 거뜬했을 것이다.
“어휴. 타짜는 여기 있었네.”
“거봐요. 저랑 치면 안 된다니까요.”
“오늘부로 신대방 아귀찜은 은퇴하겠습니다.”
나는 씩 웃고, 그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월급날 한 판 더 할까요?”
“좋아요! 딱 기다리세요. 그때 이 선수 그대로 모이는 겁니다.”
“전 사양합니다.”
김지영 이사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거절의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그들이 모두 돌아가고.
텅 빈 집을 둘러봤다.
“후…….”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띵동! 띵동!
벨 소리에 벽 앞에 있는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김지영 이사.
뭘 두고 간 건가?
현관으로 나가서 문을 열자, 그녀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두고 가신 거 있으세요?”
“그게…….”
어렵게 입을 여는 그녀.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며 되물었다.
“네?”
“시끄럽다가 조용한 차에 앉으니까 적응이 안 돼서 말이야.”
“하긴 저도 그러더라고요.”
“그럼 우리 영화 하나 볼래?”
“영화요?”
“응.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모처럼 쉴 때 보려고. 피곤하면 그냥 있고. 나 혼자 가도 되니까.”
나는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외투만 가져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