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62화>
63. 어설픈 동정은 하지 마
“특판 상품 마감입니다!”
“그러지 말고, 선물 세트 물량 좀 더 풀어 줘요!”
“당일 아침에도 잘 팔리니까, 동태전이랑 고기 산적은 할인 넣지 마!”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오늘.
MD 사업부는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오늘은 하필이면 목요일.
연휴 전에 조금 일찍 퇴근하는 것이 관례지만, 오후에 잡힌 신제품 미팅들 때문에 우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딴 회사들은 일찍 끝낸다는데……. 이게 뭐야?”
김태하 팀장은 내 책상에 걸터앉아, 불만을 토로했다.
“오늘 몇 팀이나 미팅 잡혀 있어?”
“가공식품 쪽만 17팀. 나랑 이 과장, 최 과장이 찢어져서 미팅할 거야.”
“그래. 연휴라고 대충하지 말고!”
“알았다.”
“너 저번에도 대충 보내던데, 또 그러면 가만 안 둔다.”
“알았어. 부장님 제발 1절만 하시죠?”
“이게 1절로 끝날 일이야?”
“알았어. 내가 다시 그러면 성을 간다! 됐냐?”
나는 씩 웃고, 자리에 앉았다.
낮 12시.
신제품 품평회가 시작됐다.
제품과 조리 기구를 든 제조사와 과일과 수산물을 든 생산자들이 준비된 회의실로 흩어졌다.
나는 자리에 앉아.
카테고리별 예상 판매량과 재고 현황 등을 점검했다. 그리고 도재문 대리가 만든 시스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후…….”
긴 한숨을 내쉬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회의실 앞에 길게 서 있는 줄을 바라봤다.
절실한 표정의 판매자들.
제품 개발에 큰 비용이 들어간 그들은 마켓 프레시의 사입 정책이 마지막 희망인 경우도 많았다.
그때.
“원 팀장님!”
신선식품팀의 회의실 앞에 줄 서 있는 백발의 남자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다선식품의 김만식 이사.
그는 원스몰에서 헬스 도시락을 판매했었던 인물이었다.
“이사님!”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그는 양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 샘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에게 두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저희야 뭐 맨날 똑같죠. 그나저나 원스몰 얘기는 들었는데, 팀장님도 마켓 프레시로 넘어오신 건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내가 팀장님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원스몰에서도 열심히 하셨잖아요!”
“고맙습니다. 근데 신제품 나왔어요?”
내가 바닥에 내려놓은 도시락을 가리키자.
그는 제품을 힐끔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 이번에 나물 반찬들을 많이 추가해 봤습니다.”
나는 자리에 쭈그려 앉아, 도시락 안의 반찬들을 확인했다.
겉절이, 취나물, 오징어 볶음, 고등어 양념구이, 부추전 등등.
손이 많이 가는 반찬들이 가득했다.
“이거 손은 무지 가겠네요.”
“네. 그리고 여기 채소들이 전부 유기농입니다. 그래서 원산지 표시도 큼지막하게 박아 놨습니다.”
김만식 이사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편의점 쪽은 들어가 보셨어요?”
“네. 거긴 시원하게 까였습니다. 생산 원가가 비싸서요. 하핫.”
“하긴……. 유기농 채소들이 이렇게 많은데, 당연히 비싸겠죠.”
“그래서 마켓 프레시랑은 잘 어울릴 거로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네요. 그럼, 좋은 소식 있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김만식 이사는 내 팔을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
“저……. 팀장님은 어느 팀인가요?”
때마침 내 뒤를 지나가던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들이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팀장님이 아니고, MD 사업부 부장님이십니다.”
“네?”
“부장님이시라고요.”
사회 경험이 많은 김만식 이사는 급하게 허리를 굽히며, 조금 전과는 다른 말투로 말했다.
“아, 이거…….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재빨리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러지 마세요. 팀장이나 부장이나 다 똑같죠.”
“아니요! 마켓 프레시 부장님이시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어디 우리 인연이 하루 이틀입니까? 하하하.”
그의 말에.
뒤로 줄지어 서 있던 제조사의 담당자들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사님.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네?”
“저희는 담당 MD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제가 조금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시스템입니다.”
인턴들이 추가되면서, MD 사업부의 직원은 총 87명.
마켓 프레시는 국내 식품 커머스 중 가장 많은 MD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온라인 판매를 하는 일부 제조사들은 우리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 그런가요?”
“네. 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네요. 그럼 미팅 잘하고 돌아가십쇼.”
이런 청탁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지금과 똑같은 답을 했다.
내가 흔들리면, 다른 사람들도 흔들리는 법.
상품은 담당하는 팀과 담당하는 MD가 직접 판단하는 것이 맞다.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옆에 서 있던 김태하 팀장이 내 옆구리를 콕 찌르고, 할 말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사무실 구석으로 가자, 그는 주변을 살피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님. 나 대신 한 군데만 들어가 주라.”
“왜?”
“태종에서 급한 전화가 와서 말이야. 이것만 처리하고 다음 미팅부터는 내가 들어갈게.”
“안에 누구 있는데?”
“준위밖에 없어.”
“그래 알았다.”
* * *
신선식품팀이 미팅 중인 회의실.
회의실 문에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제품을 조리하고 있는 50대의 남자와 40대의 여자.
그 앞에는 새로 온 인턴 김준위가 엉덩이를 반쯤 들고,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원지훈입니다.”
“따숨의 박창민입니다.”
나는 조리를 하는 제조사 쪽 사람들에게 명함을 건네고, 그들의 명함을 받았다.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이번에도 입점 못 하면 정말 끝이다. 끝>
“사장님이 직접 오셨네요.”
내 질문에.
50대 남자가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답했다.
“마켓 프레시인데 당연히 직접 와야죠.”
나는 휴대용 버너 3대에서 펄펄 끓고 있는 제품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준비하신 레토르트는 어떤 제품인가요?”
“순두부, 육개장, 설렁탕입니다.”
이미 많은 제조사가 판매 중인 평범한 제품군.
그리고 가장 잘 팔리는 제품군이기도 하다.
나는 반쯤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는 김준위의 옆에 앉았다.
“준위 씨는 앉은 거야? 일어선 거야? 왜 이러고 있어?”
“아……. 그……. 그게.”
아마 나이가 있는 판매자가 직접 제조하니, 아들뻘인 그가 미안했던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한쪽에 쌓여 있는 뚝배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뚝배기는 직접 가져오신 건가요?”
“예. 저희 제품이랑 같이 묶어서 판매해 보려고 합니다. 혼자 먹는 사람들도 제대로 갖추고 먹길 원하니까요.”
“그거 괜찮네요.”
내가 뚝배기에 관심을 보이자.
남자가 재빨리 뚝배기를 내게 건넸다.
“이거 저희가 직접 생산하는 제품입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사이즈는 제조가 620원 정도에 맞췄습니다.”
검은색 직화용 뚝배기.
620원이면 꽤 괜찮은 값이다.
“단가는 훌륭하네요.”
뚝배기에 관해 대화하는 사이.
여자는 팔팔 끓고 있는 제품들을 다른 뚝배기에 담아 줬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먼저 국물의 맛을 확인했다.
“음…….”
별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제품만의 특색이 전혀 없다.
어디서 먹어 본 것처럼 평범하고.
그냥 한 끼를 때웠다는 기분이 들 정도의 제품이었다.
하지만 김준위는 달랐다.
그는 연신 숟가락으로 국물과 건더기를 떠먹으며, 맛있다는 극찬을 퍼부었다.
“와, 이거 순두부 시골에서 먹던 맛이네요. 구수한 게 참 좋아요.”
“그래요?”
“네. 좋아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요즘 매운 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육개장은 딱 맞춤인 것 같습니다.”
김준위는 한참을 칭찬하다가 고개를 돌려 나에게도 물었다.
“부장님은 어떠세요?”
“글쎄.”
“괜찮지 않으세요? BO나 청림 제품들처럼 맛이 깔끔하잖아요.”
“준위 씨. 나 좀 잠깐 볼까?”
나는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내 자리 근처로 걸어가 주변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아는 분이야?”
“네?”
“방금 회의실에 있던 사장님 말이야.”
“아닙니다.”
“근데 왜 그래?”
“그게……. 연세도 있으신데 아들 뻔인 저한테 직접 조리해 주시고……. 회사도 좀…….”
“그게 무슨 상관인데?”
“…….”
“어울리지도 않는 어설픈 동정은 하지 마. 제품은 소비자가 평가하는 거지, 준위 씨는 그럴 위치도,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야. 그냥 페이퍼와 제품만 봐. 그게 더 저분들을 도와주는 거니까.”
김준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50대 남자는 우리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부장님. 저희 제품은 어떤가요?”
“진실 모드로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매너 모드로 말씀드릴까요?”
내 답에, 남자는 멀뚱멀뚱 서서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럼 진실 모드로 말씀드리죠.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평범합니다. 포장지 디자인이나 뚝배기를 같이 판매하는 마케팅 말고는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고춧가루는 중국산인가요? 캡사이신도 넣으셨죠?”
“그게…….”
“육개장은 억지로 맵게 만드신 것 같은데, 이건 다시 손대기 힘든 수준입니다. 고기도 너무 얇게 펴 놔서 끓는 국물에 다 녹아 버렸어요.”
“죄송합니다.”
“다음, 해물 순두부에 해물은 어디 있나요? 설마 건새우 몇 마리로 해물이라고 표현하신 건가요? 참기름도 너무 많이 들어갔습니다. 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아요.”
내가 냉정하게 평가하자.
제품을 조리하던 남자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까지 온 제조사들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커머스들은 브랜드를 먼저 보니까 저희밖에 접근할 곳이 없었겠죠.”
“살려 주십쇼. 저희 직원들 밀린 임금이라도 좀 처리할 수 있도록…….”
남자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네요.”
“부장님……. 제발……. 이번이 저희 마지막입니다. 이미 생산해 둔 제품들 다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많은 양을 찍어 놨구나.
하지만 이건 방법이 없다.
모든 제품은 소비자가 판단하는 법.
사정이 딱하다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저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제발……. 제발.”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앉아 있던 김준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장님. 방법이 없을까요?”
인맥이나 인정에 매달리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다.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건만…….
김준위의 간절한 표정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놨다.
“없어.”
“후…….”
“내가 왜 도와야 하는지 준위 씨가 설명해 봐. 들어 보고 타당하면 생각해 볼 테니까.”
“정말요?”
김준위는 내 표정을 살피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노력입니다. 한 기업의 사장님이 직접 조리하신다는 것은…….”
“아니. 그런 분들 많아.”
“이 제품들은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해썹 인증도 받았고…….”
“그건 당연한 거야.”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분들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준위 씨가 왜? 그리고 돕는 것 자체가 특혜 아닌가?”
“준 만큼 받겠습니다. 비록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장님처럼 무기를 갖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핸들링할 수 있는 업체들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꽤 이기적인데?”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답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간절한 표정의 남자와 여자에게 말했다.
“레토르트는 못 받습니다. 대신 뚝배기의 재질, 구성, 크기, 중금속 안전 시험 검사서, 열강도 시험성적서 등 정확한 정보를 보내 주세요.”
“네?”
“제품에 문제가 없다면, 저희 레토르트 제품들 옆에 뚝배기를 같이 옵션으로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레토르트를 다시 생산하시려면, 그때도 정식으로 등록하고 찾아주세요. 그럼 여기 준위 씨가 조금의 립서비스 없이 평가해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아니라 준위 씨에게 고마워하셔야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김준위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