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60화>
61. 가장 힘든 일은 그들과 싸우는 일이다
“대충 쓰다 버리는 패라는 건가?”
이정우 이사의 사무실.
그는 소파에 앉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회의가 끝나고 반강제로 끌려 온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앞에 있는 커피를 마셨다.
“원 부장.”
한참을 떠들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이정우 이사.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네.”
“아까 회의 때 고동수……. 그 새끼 표정 봤지?”
“…….”
“그 새끼가 처 웃는데, 아주 돌아 버리겠더라고. 그리고 최구열은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를 끌어들인 거였어. 늙은 여우 새끼가…….”
“…….”
“회장님, 대표님도 마찬가지야. 딱 봐도 리스크 클 사업인데, 그것도 모르고 앉아서 박수나 치고 있고.”
“이 사업을 발의한 것이 최구열 이사님이니까 그렇겠죠.”
미국에서의 큰 성공과 2천억이라는 돈을 끌어온 최구열 이사.
회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로, 그가 진행하는 사업이라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임원들이 기대했을 것이다.
“최구열은 무슨 신이야? 뭔데 그놈이 말하는 건 다 해야 하는 거야?”
“소리 좀 낮추시죠.”
“뭐? 어쩌라고? 들으라지 뭐! 하나도 겁 안나!”
이정우 이사는 분한 마음에 최구열 이사에 대한 불만을 늘어놨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 싸움은 관심이 없었다.
지금 내 걱정은 오직.
비를 맞으며 과일을 따는 신선식품 팀원들과 인턴들뿐이었다.
“방법은 있으세요?”
“없지. 그러니까 이렇게 분해하는 거잖아!”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기획하고 상품 찾는 데까지는 최소,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이사님은 그동안 리스크에 대해서 대표님께 어필해 보세요.”
“그래서 되겠어? 네 말대로 최구열이가 발의한 사업인데?”
“그거 말고는 지금 뾰족한 방법도 없잖아요.”
이정우 이사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도와줄 거지?”
위탁이 아닌 티켓 사업.
잘하면 돈을 많은 벌 수 있겠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지금은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야지, 위험한 도박을 할 때는 아니다.
“네. 저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네.”
“그럼,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내려가 보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정우 이사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원지훈. 너도 안심하지 마. 이번엔 나지만, 다음은 MD 사업부일 테니까.”
이정우 이사의 말이 맞다.
최구열 이사는 MD 사업부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할 것이다.
“네. 그래야죠.”
이정우 이사는 내 표정을 살피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 카드나 고스톱 같은 거 잘 치지?”
뜬금없는 질문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너 지금 완전 포커페이스잖아. 가끔은 네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거든.”
“들어오셔도 별거 없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팀장님. 끝났습니까?”
- 예. 이제 마무리 짓고 애들 퇴근시키려고 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다친 사람은 없죠?”
- 네. 다들 사우나라도 가라고, 용돈까지 쥐여 줘서 보냈습니다.
“네, 잘하셨어요. 비용은 경비처리 하시면 승인해 드릴게요.”
-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좀 이따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들어오시려고요? 그냥 퇴근하시지.”
-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요. 그리고 야근하실 거면, 저녁 드시지 마세요.
“네?”
- 여기 유명한 만둣집이 있어서 좀 많이 사 가니까요.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MD 사업부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며칠 후 MD 사업부 사무실.
흥분한 부서원들이 모니터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오! 대박!”
“이거 완전 대박인데?”
“자동으로 할인 들어가도록 세팅 완료했습니다.”
도재문 대리와 개발팀이 진행한 빅 데이터 프로젝트.
오전부터 MD 사업부의 팀장들이 달라붙어 테스트를 진행했고, 오후 3시에 드디어 서버에 반영할 수 있었다.
재고 관리와 할인 이벤트 관리.
사입할 수량 예측과 예상 매출까지.
새롭게 개발된 시스템은 MD 사업부의 일을 절반으로 줄여 줄 수 있는, 혁신과도 같은 일이었다.
“와, 이거 진짜 보면 볼수록 죽이네요.”
마성근 팀장은 파티션 위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가장 신이 난 것은 신선식품팀의 정진택 팀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팀원인 도재문 대리와 함께 각 팀을 돌며 자랑하기 바빴다.
“부장님! 부장님!”
“예?”
“어때요? 완벽하죠? 우리 신선식품팀이 만든 시스템. 정말 완벽 그 자체 아닙니까?”
흥분한 표정의 정진택 팀장과 수줍은 표정의 도재문 대리.
나는 평소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던, 그들을 보며 씩 웃었다.
“네. 두 분 다 수고했어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우리 도재문이랑 부장님이 다 했지.”
정진택 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따르릉! 따르릉!
나는 한 손을 올려, 정진택 팀장을 조용히 시키고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MD 사업부 원지훈입니다.”
- 1층 로비의 최신익입니다. 해진 택배의 이명진이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올라가시도록 할까요?
“해진 택배요?”
- 네. 막무가내로 부장님을 만나야 한다고 해서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드렸습니다.
해진 택배는 마켓 프레시의 인천 쪽 개별 배송을 담당하는 회사.
이명진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데스크 앞에서 기다리시라고 할게요.
“네.”
전화를 끊자, 가만 보고 있던 정진택 팀장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해진 택배에서 택배 기사가 왔다네요.”
“직접 내려가시려고요? 그냥 올라오라고 하시지?”
“네. 올라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요.”
택배 기사가 왔다는 것은 배송 사고가 터졌다는 말.
그가 올라오면 아마 사무실 전체가 소란스러워질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는 정진택 팀장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아무나 하나 내려보내서 돌려보내세요. 또 배송 사고 가지고 징징대는 거겠죠.”
“그러기엔 좀 이상해서요.”
“뭐가요?”
“요즘 배송 사고 거의 없었잖아요.”
“흠 그건 그렇죠.”
“이렇게 본사로 찾아올 정도면 뭔가 큰일인 것 같은데. 일단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안팀의 데스크 앞에서 파란 택배사 조끼를 입은 남자를 확인했다.
“해진 택배에서 오셨죠?”
내가 말하자, 남자는 초조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 손을 꽉 움켜잡았다.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다짜고짜 억울하다는 남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자 남자는 더욱 애절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잡고 매달렸다.
“전 제대로 배송했고, 반품 물건도 제대로 들고 왔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잠시만요. 좀 차분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남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혹시 크기가 이만한 인덕션 기억하세요?”
자신의 어깨너비만큼 손을 벌려 제품을 설명하는 남자.
기억한다.
특판팀에서 진행했던 독일 명품 인덕션.
100개 한정 판매로, 소비자가 300만 원이 넘는 제품에 100만 원짜리 휴대용 2구 인덕션을 포함했다.
휴대용 2구 인덕션은 독일 본사에서 이번 프로모션을 위해 특별히 생산한 제품으로 사고 싶어도 함부로 살 수 없는 제품이기도 했다.
“기억합니다. 근데 그건 왜요?”
“사은품으로 같이 나간 휴대용 인덕션이 사라졌다네요.”
“사은품이요?”
“네. 저는 분명히 제품을 반품한다고 해서 고객에게 받은 제품을 창고로 넘겼습니다. 근데 창고 쪽에서 사은품으로 같이 나간 제품이 없어졌다면서 저에게 손해 배상을 하라고…….”
커머스에는 참 많은 종류의 회원들이 있다.
일명 블랙 컨슈머.
제품에 일부러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을 집어넣거나.
이미 반쯤 먹은 제품을 맛이 없다며 환불을 요청하거나.
그리고 지금처럼 특별한 사은품만 빼고 반품을 신청하는 회원도 다수 있었다.
“상자 열어서 확인하셨나요?”
“아니요. 그게……. 바빠서……. 고객이 포장해 둔 상태로 그대로 받아만 왔어요.”
“확인하셨어야죠.”
“저는 그게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라서.”
택배 기사들은 제품의 가격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회원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정작 회원이 사은품을 받지 못했거나, 반품 때 같이 보냈다고 오리발을 내밀면 대응하기가 힘들다.
“일단 남양주 센터에 연락해 보겠습니다.”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받은 제품 그대로 가져만 왔습니다.”
“기사님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내 말에 남자는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내게 건넸다.
그의 명함을 잡자.
<뭔 놈의 사은품이 100만 원이나 해?>
<지난달에 번 돈이 100도 안 되는데 무슨 100을…….>
<내가 그걸 왜 가져가겠어? 분명 뜯지도 않았다고…….>
나는 그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확인해 보고, 내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토닥이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바로 마성근 팀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팀장님. 며칠 전에 인덕션 판매한 거 기억하시죠?”
“혹시 반품 때문에 그러세요?”
“네. 맞아요. 따로 연락받은 거 있으세요?”
내 질문에 마성근 팀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죽겠습니다. 반품이 3건이나 들어왔어요.”
“사은품은 다 있어요?”
“아니요. 그래서 죽겠다는 거죠.”
본 제품보다 사은품이 강할 경우,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100개 중의 3개나 사은품이 분실됐다는 것은 분명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남양주에 확인해 보셨어요?”
“네. 남양주에서는 분명 제품 나가기 전에 확인하고 보냈다고 하거든요. 사진까지 제가 확인했어요.”
블랙 컨슈머.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그들과 싸우는 일이다.
그래서 창고와 택배사는 가끔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서로 힘 싸움을 한다.
그리고.
택배 기사가 제품값을 물어 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제품 자체가 고가이기에, 택배 기사가 이를 배상하기는 어렵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의 얘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하연두에게 물었다.
“연두 씨, 그거 설치 제품 아니야?”
“네 맞아요. 설치기사가 따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근데 왜 택배로 나간 거지?”
“ocjide님은 집이 인테리어 중이라 미리 사 둔다고 했고, cuted님은 선물용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더 들어 봤자 소용없다.
나는 한 손을 올려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성근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생각은 어때요?”
“보나 마나 뻔하죠. 처음부터 2구짜리 휴대용 제품만 노리고 했겠죠. 근데,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증거가…….”
“바쁘세요?”
“네?”
“안 바쁘시면, 같이 남양주로 가죠. 일단 전화해서 반품 들어온 제품들 그대로 두라고 하세요.”
“어쩌시려고요?”
“이대로 두면 택배 기사들이 물어 줘야 하는 판인데. 이번에는 잡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