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58화>
59. 오늘의 숙제
인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회사에 적응했다.
포차를 운영했던 최문식은 새로운 팀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고, 레크리에이션 강사였던 박선호는 화려한 언변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쇼핑몰을 운영했던 최지섭은 새로운 생산자와 계약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옥상 흡연실.
우리는 둘 이상 모이면 새로 온 인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그리고 이는 나와 김경일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안나 씨는 좀 어때?”
“습관이 무서운가 봅니다.”
“습관?”
“네. 오픈마켓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네요.”
오픈마켓은 다양한 상품을 진열하고, 소비자가 직접 원하는 상품을 찾아 구매하도록 한다. 또한, 광고비를 많이 낸 순으로 진열 순서를 정하기에 재고나 마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재고와 마진을 계산한 MD가 제품의 정렬 순서를 고민하고, 상품 등록까지 직접 해야 한다.
“그래?”
“제품 등록부터 하나씩 가르치고 있는데, 백지상태에서 배우는 박기현이나 구석호보다 느립니다.”
김경일 팀장에게는 특별히 인턴 셋을 배정해 줬다.
TF를 통해 만들어진 팀이라, 업무량에 비해 인원이 적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턴 중 에이스로 꼽히는 이안나까지 보내 줬는데…….
“좀 의외네. 가능성은 있어 보여?”
“이제 5일 지났는데요. 뭐. 본인이 놓친 사소한 부분에서 매출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해 줄 생각입니다.”
“그래. 경일 팀장이 잘하겠지.”
“또 무거운 짐을 주시는군요.”
“글쎄. 그건 경일 팀장이 하기 나름이지. 사람은 말이야. 누구나…….”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고 우린 그들이 잘하는 것을 찾아서 배치를 해 주는 사람이다.”
김경일 팀장은 내가 자주 하는 말을 아예 외우고 있었다.
나는 씩 웃고 남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난간에 등을 기대, 멀찍이 서 있는 부서원 둘을 가리켰다.
“저기 저 친구들은 뭐 하는 거지?”
김경일 팀장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음료팀의 강성준 대리가 껄껄대며 웃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외제차 딜러로 일했던 김혁진이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떠들고 있었다.
“저 친구 좀 유별나더라고요.”
“누구?”
“음료팀의 김혁진 씨요. 사교력이 만렙입니다. 그리고 인턴 중에서 대장 짓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대장? 벌써 대장이 생긴 거야? 그거 재밌네.”
“이번 인턴들은 평범하지 않은 애들투성이예요. 처음부터 의도하신 거죠?”
“우린 그동안 너무 평범하게 살아 왔잖아. 새로운 사람에게서 새로운 기획이 나오는 거야.”
김경일 팀장이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 부장님답네요.”
“내가 뭘?”
김경일 팀장은 마시던 일회용 컵을 휴지통에 구겨서 버렸다.
“안 내려가세요?”
“먼저 내려가. 난 담배 하나만 피고 내려갈게.”
“예. 그러세요.”
나는 김경일 팀장이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까톡! 까톡! 까톡!
곧바로 울리는 메신저 알림 소리.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 부장님, 시간 괜찮으세요?
- 인사 좀 드리고 싶은데 괜찮죠?
- 그리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달빛에 묻혀.
처음 보는 아이디다.
또한, 회사에서는 사내 메신저를 쓰지, 카톡을 쓰지 않는다.
아마 이를 잘 모르는 인턴인 것 같은데…….
그때.
“안녕하십니까?”
휴대폰을 보는 사이.
내 앞으로 다가온 김혁진이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혁진 씨가 달빛에 묻혀 인가요?”
“예. 접니다. 부장님께는 따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성준 대리는요?”
“급한 전화가 와서 먼저 내려갔습니다.”
“혁진 씨. 회사에서는 사내 메신저를 쓰고, 카톡은 자제해 주세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친한 척을 했다.
“저 부장님. MD 사업부 인턴들 회식하는데,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지?
이놈은 뭔데 이렇게 막힘이 없는 거지?
“처음 들었는데, 회식해요?”
“정확히는 회식이 아니고, 그냥 저희끼리 뭉치기로 했습니다.”
다른 인턴들은 나를 피해 다니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혁진은 달랐다.
공손하고 깍듯했으며, 말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가 섞여 있었다.
“제가 가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텐데요?”
“아닙니다! 다들 부장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달빛 배송과 콜드 체인도 다 부장님 작품이라는 말 듣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하하핫.”
“비행기 태우는 건가?”
“아니요. 비행기라뇨. 진짜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입니다.”
나는 피우던 담배를 끄고, 건성으로 답했다.
“이따 시간 나면 가 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한 번만 톡을 좀 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아 그리고 이거.”
나는 지갑에서 법인 카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걸로 맛있는 거 먹어요.”
김혁진은 두 손으로 법인 카드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마프의 부장님 법인 카드를 제가 만져 보는군요.”
* * *
사무실 안.
특판팀의 김대성이 자신의 앞에 인턴을 세워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범준 씨 천재야?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해?”
“죄송합니다.”
“내가 주소 메모하라고 했지?”
특판팀의 인턴 박범준.
그는 특별하지 않은 스펙에 무난한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히죽거리고 있는 마성근 팀장의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범준이는 생활이 개그예요. 이번에 매남유업에 보내야 하는 계약서를 엉뚱한 곳에 보냈나 봐요.”
“어디 보냈는데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퀵 기사랑 연락돼서 돌아오고 있으니까요.”
박범준은 실수가 잦았다.
어깨를 펴지 못하는 그는 자신이 없어 보였고, 다른 인턴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오후 6시.
“원 부장, 퇴근 안 해?”
김태하 팀장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응. 아직 업무가 좀 남아서. 먼저 들어가.”
“그래. 내일 봐.”
그는 손을 흔들고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참 동안 업무를 보다, 믹스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문을 열자.
안에서 종이를 파쇄하던 박범준이 고개를 숙였다.
“범준 씨 퇴근 안 했어요?”
“예. 아직 업무가 남아서요.”
“오늘 인턴들끼리 뭉친다고 하던데, 안 갔어요?”
박범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보다 지금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요.”
박범준은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려, 남은 문서들을 파쇄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믹스 커피를 타고, 탕비실 구석의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파쇄를 마친 박범준은 내게 다시 고개를 숙이고 탕비실 밖으로 나갔다.
급한 일이라…….
특판팀의 사람들이 일정을 놓고 닦달하지는 않을 텐데.
커피를 마시며 생각하는 사이, 김혁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부장님! 1차로 삼겹살 배불리 먹었습니다. 2차는 건너편 맥주 창고로 갈 생각인데, 시간 되시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세요.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파쇄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파쇄기를 열어 안에 있는 파쇄된 종이들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파쇄하고, 인보이스 넣고……. 후……. 서둘러야겠다.>
<내가 복사랑 파쇄나 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한 줄 알아?>
<또 심부름이야?>
<정신없네. 도대체 다들 이 짓을 어떻게 해 온 거야?>
<또 창고야? 맨날 창고, 창고, 창고…….>
최근에 파쇄기를 사용한 인턴들의 기억이 들렸다.
나는 박범준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잘린 종이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내가 주부라면 추석에 뭐가 필요할까?>
박범준의 조금 전 생각.
2주 정도 남은 추석에 대한 것이다.
추석 선물 세트를 고민하나?
이미 특판팀의 상품들은 다 결정이 났는데, 왜 이걸 고민하는 거지?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고, 밖으로 나와 그의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의 모니터 화면을 바라봤다.
추석 선물 세트 기획서를 만드는 박범준.
그는 내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PPT에 내용을 적어넣었다.
“오. 이거 신선한데?”
그제야 내 목소리를 들은 박범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 부장님.”
“나 그거 좀 봐도 될까요?”
“예?”
“지금 만들고 있는 PPT 말이야.”
“아직 다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만 봐도 돼요. 잠깐만.”
나는 허리를 숙여, 박범준이 잡았던 마우스를 잡고 PPT 화면을 넘겨봤다.
그의 제안서 내용은 과일이나 육류, 통조림 등의 선물 세트가 아닌, 소고기 뭇국, 토란국, 도가니탕, 짬뽕 등의 레토르트 선물 세트였다.
그리고 마우스에서 들려오는 기억들.
<전이나 갈비 같은 음식은 직접 해야겠지. 근데 국물 음식들을 레토르트로 대체한다면? 그래, 이거 충분히 승산이 있다.>
<소고기 뭇국은 재고 수량이 많아. 이번 기회에 소진해야지.>
다른 제조사들의 레토르트 제품들을 번들로 구성해 놨다.
그리고 이는 우리와 같은 커머스에서만 팔 수 있는 제품이다.
또한, 추석 음식들과 배합이 잘 맞는 제품과 재고 수량을 생각해서 남들이 하지 못한 새로운 큐레이션으로 상품을 구성했다.
신선했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인데,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만 만들 수 있는 선물 세트를 놓친 것이다.
“범준 씨.”
“네?”
“이거 언제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어요?”
“저……. 아직 이게…….”
“여기서 하나만 더, 특판팀 사입 단가표 받은 거 있죠?”
“네. 있습니다.”
“진도 곰탕 하나만 추가해 보죠. 그게 이번에 다 쳐 내야 하는 제품이거든.”
“아……. 네네 알겠습니다.”
“소비자가는 만 원, 삼만 원, 오만 원으로 구성하고, 같은 브랜드 제품은 넣지 마세요. 아 참, 내일 오전에 신선식품팀 상온 제품 리스트까지 전달해 줄게요. 넣을 수 있는 상품 있으면 같이 구성해 봐요.”
“제가요?”
박범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누가 해?”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찾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박범준은 꼼꼼하지 못해 실수가 잦지만, 상품을 기획하거나 구성하는 것은 다른 인턴들보다 월등해 보였다.
“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나랑 같이 갑시다.”
“아……. 저는 오늘 이걸 마무리하고.”
“MD는 말이죠. 내가 만족하는 상품을 기획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만족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람을 알아야 상품을 기획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
“자, 오늘의 숙제. 인턴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김혁진이 살 것 같은 세트를 구성해 보는 겁니다. 할 수 있죠?”
“혁진 씨요?”
“김혁진 그 친구는 사람을 잘 설득시키잖아. 그래서 나도 설득돼서 저 친구에게 법인 카드를 내줬고.”
박범준은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