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52화 (52/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52화>

53. 잘 어울리네

[마켓 프레시. 신선을 주문하는 시간 마켓 프레시.]

대한민국 톱스타 정이나와 보라색 마켓 프레시의 로고.

TV CF는 정이나로 시작해서 정이나로 끝이 났다. 아쉽게도 진아라는 여자가 나오는 부분은 통편집이 된 상태였다.

오후 6시.

MD 사업부의 직원들은 퇴근 시간을 잊은 듯했다.

“트래픽 확인해!”

“재고 확인하고 싹 다 풀어 버려! 박치연이 창고 넘어갔어?”

“참푸드 콘도그, 재고 다 떨어졌답니다.”

“김 대리! 주문 더 올라오기 전에 전복 품절 때리고 노출 순서 바꿔!”

“미온 이유식 긴급 발주 넣어요! 빨리!”

전화는 불이 났고.

사이트의 트래픽 그래프를 보는 직원들도 흥분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대로 두면 모두가 퇴근을 못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부서원들을 둘러보고, 각 팀의 팀장들을 회의실로 모았다.

회의실 안.

흥분한 표정의 팀장들이 내가 말하길 기다렸다.

“일단 지금 추이에 맞춰서 재고 물량들 확인하고 부족한 상품은 내리세요. 상단에는 재고 확실한 제품만 올립니다.”

“네, 물론이죠. 물 들어올 때 재빨리 노 저어야죠!”

마 팀장이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팀장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팀별로 두 명씩만 남아서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부다 불금에 남아서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저희 팀은 저랑 오 과장이 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정민이는 창고에서 바로 퇴근시키겠습니다.”

우리는 회의를 짧게 끝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오후 10시.

팀별로 두 명씩만 남아서 상황을 지켜봤다.

광고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각 방송사의 주요 프로그램들이 시작하기 전 광고로, 평소 10배가 넘는 방문자가 접속했다. 다행히 개발팀은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여 서버를 충분히 확장해 둔 상태였고, 사이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때.

“아직 퇴근 안 했어?”

김지영 이사와 그녀의 비서가 MD 사업부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니터를 보던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고,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원 부장. 트래픽은 체크하고 왔는데, 판매량은 좀 어때?”

“매출은 평소의 3배가 조금 넘는 것 같습니다.”

“좋네.”

“생각보다 효과가 큽니다.”

“그래. 수고했어.”

김지영 이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상의 주머니에 있던 두툼한 봉투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직원들이랑 야식이라도 시켜 먹고, 집에 갈 때 꼭 택시비들 나눠 줘.”

“법인 카드 있습니다.”

“그거랑은 다르지. 이건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다들 불금에 이렇게 수고하는데…….”

“고맙습니다.”

그녀가 돌아가고, 봉투를 열어 봤다.

하얀 종이로 묶여 있는 오만 원권 100장.

정확히 500이다.

나는 돈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김지영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너무 많습니다.”

- 아니야. 다들 불금에 수고하는데……. 그리고 지훈아.

“네?”

김지영 이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 혹시 토요일 저녁에 시간 돼?

“걱정하지 마세요. 토요일에도 광고 일정이 빽빽해서, 집에서 확인할 생각이었습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무슨 생각인지.

그녀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이번에 캣츠 뮤지컬팀이 CF 촬영했잖아. 그래서……. 공연 티켓을 선물 받았는데, 가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근데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일이 좀 생겨서…….

캣츠 뮤지컬.

어쩌면 진아라는 그 여자도 출연할지도 모른다.

“그럼 친구분 대신 제가 가도 될까요?”

- 괜찮겠어? 그럼 나야 고맙지.

“네. 제가 갈게요. 꼭 보고 싶었거든요.”

뮤지컬이 아닌, 진아라는 그 여자가…….

혹시나 그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토요일 오후 해 오름 국립극장 앞.

약속한 시간보다 20분 먼저 도착했다.

“왔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김지영 이사.

그녀는 깔끔한 흰색 정장을 입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 내 옆구리 사이로 자신의 팔을 밀어 넣으며 가볍게 팔짱을 꼈다.

“가자. 나 이거 꼭 보고 싶었거든.”

“아……. 네.”

공연장 복도에는 뮤지컬 사진과 장식들이 벽면에 가득했다. 나는 입구에 진열된 브로슈어를 꺼내, 출연진의 이름을 확인했다.

럼펠티저(Rumpelteazer): 채진아.

채 씨였구나.

그녀의 이름과 고양이 분장한 사진을 보고 씩 웃었다.

“아는 사람이야?”

옆에서 브로슈어를 함께 보던 김지영 이사가 물었다.

“네 CF 촬영할 때 잠깐 봤어요.”

“럼펠티저 역이구나?”

“네. 그런가 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지영 이사와 함께 공연장 안으로 들어섰다.

뮤지컬은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에 조금의 감흥도 오지 않았다.

나는 쏟아지는 하품을 참으며 채진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김지영 이사는 공연에 완전히 집중한 것 같았다.

그렇게 긴 공연이 끝나고.

깜깜했던 공연장에 불이 켜졌다.

김지영 이사는 가방에 있던 파운데이션을 꺼내 화장을 고쳤고, 나는 벗어 놨던 신발을 다시 신었다.

“같이 갈래?”

“어디를요?”

“배우 대기실. 배우들 보러 가려고.”

“갈 수 있어요?”

“응. CF도 그렇고, 고마워서 꽃이랑 도시락 좀 보냈더니, 단장이 잠깐 와도 된다고 했어.”

채진아를 다시 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그럼 가 보죠.”

김지영 이사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배우 대기실.

조금 전에 공연을 마친 배우들은 아직 분장을 다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김지영 이사가 보낸 도시락들과 꽃다발들이 곳곳이 널려 있었다.

김지영 이사가 극단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배우들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장 구석에 있는 채진아를 찾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어색한 내 인사에.

휴대폰을 가로로 돌려서 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때 병원?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오늘 공연 잘 봤습니다. 너무 재미있던데요?”

“고맙습니다.”

할 말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준비를 하고 올걸…….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고개를 돌려 휴대폰의 영상에 몰두했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그녀가 보는 영상을 힐끔 보고 물었다.

“먹방 좋아하세요?”

“네. 이거 보면 스트레스가 풀려서요.”

“BJ 미쭈죠?”

“네. 이 사람 재미있더라고요. 제품 리뷰도 잘하고, ASMR도 참 잘해요.”

채진아가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쭈라는 BJ는 많이 먹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제품이 있으면 다른 BJ들보다 먼저 먹어 보는 사람이었다. MD 사업부에서도 그가 먹는 제품이나 리뷰를 보고 상품을 기획할 때가 많아서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번에 갈비탕 레토르트 보셨어요?”

“네. 그거 마프에서 판매하는 제품이죠? 얼마나 맛있게 먹던지, 저도 10팩이나 구매했어요.”

“네. 수원에 본점이 있거든요. 거기 사장님이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그래요?”

“언제 같이 가실래요?”

잘한 건가?

너무 빨리 들이댄 것인가?

내가 고전하고 있는 사이, 단장과 대화를 마친 김지영 이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채진아와 나를 번갈아 본 후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마켓 프레시의 김지영 이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채진아입니다.”

“럼펠티저 역을 맡으셨죠? 노래도 잘하시고 연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분 잘 어울리시네요.”

나와 김지영 이사를 연인으로 착각한 것인가?

내가 답하려 하는 순간.

김지영 이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내 어깨를 감쌌다.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친동생의 친구예요.”

“그래요?”

“네. 우리 10살이나 차이 나요.”

“어머. 정말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에이 설마요. 근데 지훈이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에요?”

“지훈 씨군요. 사실 이름도 몰랐어요.”

채진아는 나와 만났던 이야기를 짧게 설명했다.

김지영 이사는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 하셨네요.”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오늘 끝나고 회식 가시죠?”

“네.”

“단장님과 얘기했는데, 오늘 회식은 특별히 제가 대접하기로 했어요.”

“네? 이사님이요?”

“CF에서 편집된 것도 그렇고……. 죄송해서요. 이렇게라도 해야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요. 지훈아, 너도 갈 거지?”

김지영 이사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따 봬요.”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 옆구리를 찌르며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사람 같더라. 잘해 봐.”

“네?”

“너 진아 씨한테 마음 있잖아.”

“아니에요. 제가 무슨…….”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귀여워. 둘 다 어려서 좋겠다.”

“정말 아니에요.”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줄 테니까 잘해 봐. 주말에 트래픽이나 보면서 일하지 말고.”

“아니라니까요!”

“하하하. 그래 아니면 아닌 거고. 근데 왜 얼굴은 빨개졌어?”

그녀는 나를 두고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화장실 앞으로 걸어가 내게 손짓을 했다.

“지훈아 나 정말 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해 줄 거지?”

“뭔데요?”

“저기 남자들 보면, 여자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가방 들고 있잖아. 나도 그거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자!”

김지영 이사는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 목에 걸어 줬다. 나는 씩 웃고, 그녀가 걸어 준 핸드백을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가방에 현금 많아요?”

“아니. 들고 튀어 봤자 소용없을 거야. 카드밖에 없거든.”

내 장난에 그녀가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이런……. 뭐 재벌이 이래? 일단 다녀오세요.”

“응. 고마워.”

<뭐 입고 가지? 이거 괜찮을까? 아니, 이게 더 어려 보일 거 같은데?>

<끝나고 와인 마시자고 할까? 거절하면 어떡하지?>

<이게 뭐라고 떨리냐.>

그녀의 핸드백에서 들려오는 생각들.

뮤지컬을 보기 전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잘 어울리네.>

<그럼 그렇지. 10살이나 어린 애한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실망한 목소리.

이건 방금 배우들의 대기실에 있을 때의 기억일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모르는 것이 좋았을 텐데…….

그녀의 가방을 한 손으로 들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김지영 이사에게 너무 잔인했던 건 아닐까?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온 김지영 이사에게 가방을 건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걱정돼서요. 상품들 재고도 점검해야 하고, 올라간 제품들 확인 좀 하려고요. 제가 원래 마음이 불편하면 아무것도 못 하거든요.”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실망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부터,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남의 마음은 들으면서, 정작 내 마음은 모르다니…….

나는 김지영 이사를 보고,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지 말고 진아 씨랑 잘 엮어 줄 테니까, 이 누나만 믿고 따라와.”

“아닙니다. 정말 관심 없어요.”

“진짜?”

“네. 정말이에요. 그냥 반가워서 그런 겁니다.”

김지영 이사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고, 내 옆으로 바짝 붙어 다시 팔짱을 꼈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가자. 주차장까지 데려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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