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51화>
52. 일한 것만큼의 대우는 요구하세요
회의실.
김경일 대리의 TF팀 보고서는 기대 이상이었다.
제품 현황과 시장 조사, 점유율이 높은 경쟁 회사들의 현황까지 꼼꼼히 분석해 냈다. 또한, 제조사들과 미리 접촉해 사입 수량과 예산 및 재고 수량 등을 완벽히 계획했다.
위탁의 경우 마진율 12%.
사입할 경우 평균 마진율 35%.
사입 수량만 예측한다면 분명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이 분명했다.
“김 대리. 사입 조건으로 예산 잡아놔. 남양주 창고 확인해서 공간 확보하고.”
TF를 설계할 당시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위탁 판매를 생각했지만, 투자금이 확실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예산이 될까요?”
“가능할 거야. 아니, 이 정도면 무슨 수를 써서든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김 대리는 예산 걱정하지 말고 개발팀에 요청해서 오픈 일정만 맞춰. 알겠지?”
내 말에, 김경일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이면 끝나는 건가?”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고했어.”
나는 김경일 대리의 등을 쓰다듬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
식사하러 나간 직원들의 빈자리가 보였다.
하지만 특판팀은 단 한 명도 식사하러 나가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 팀장님, 식사 안 하세요?”
“이것만 끝내 놓고 가려고요. 다음 주 제품 목록 선정하는 데 좀 걸리네요.”
내 질문에, 퀭한 얼굴의 마 팀장이 답했다.
특판팀은 며칠째 야근이었다. 이는 팀 내에서 많은 일을 도맡아 하던 김경일 대리가 없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우진아! 넌 먼저 가서 밥 먹고 와.”
마 팀장의 말에, 이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 시간이면 마무리합니다.”
“나 못 믿어? 내가 마무리한다니까!”
“네 못 믿어요. 팀장님 어제 철야하셨잖아요!”
마 팀장은 어제 철야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도 점심밥까지 걸러 가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마 팀장의 모니터 뒤로 가서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 계산식 틀렸어요.”
“헛……. 네.”
“이번 TF 끝나면 꼭 인원 충원해 줄게요.”
“예. 경일이 없으니까 둘은 해 주셔야 할 겁니다.”
“알았어요.”
식사하러 내려온 1층 로비.
중년의 여성이 양손에 종이 가방을 들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마성근 팀장의 아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이 식사하러 내려온 김민정 팀장을 먼저 보내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마성근 팀장님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아니에요. 아까 전화했는데 좀 바쁜가 보네요.”
그녀가 재빨리 손사래를 치며, 불편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금방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두세요. 그것보다 이것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뭔가요?”
“속옷이랑 양말이요. 그리고 이건 팀원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좀 만들어 봤어요.”
“주세요. 전해 드리겠습니다.”
“근데 식사하러 가시는 길인데 제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팀원들 것까지 만들었으니까, 꼭 같이 드세요.”
“예. 잘 먹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 가방을 재빨리 받아 들었다.
<나이도 있는데, 좀 쉬어 가면서 하지.>
<맨날 회사 얘기네. 그렇게 회사가 재밌나?>
<하긴 팀장이니까 이제 바쁘겠지.>
마성근 팀장을 이해하고,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라가 보실래요?”
“아휴 아니에요. 괜히 올라가서 방해만 돼요. 전에도 그렇고, 정말 고마워요.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를 마 팀장의 부하 직원인 줄 알고 있는 그녀.
잠시 망설이다가 김경일 대리의 이름을 댔다.
“저……. 김경일, 김경일 대리입니다.”
“아……. 김 대리님. 그이가 가끔 얘기하는 거 들었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냥 좋은 분이시라고.”
“싸가지 없다거나 차가운 놈이라고 하셨죠? 하하.”
그러자 마 팀장의 아내는 흠칫 놀라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아니에요. 정말…….”
“안 그러셔도 됩니다. 다 압니다. 하하.”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 * *
“야! 또 재고들을 들고 오면 어떡해? 벌써 몇 번째야?”
“이번에 1인 가구들이 많아서 5L짜리 제품도…….”
“네가 보타야? 집어치워! 내일 넘어가서 수량 확보해. 알았어?”
“예…….”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가전팀.
이진성 팀장이 최병찬 대리의 앞에 브로슈어를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각 팀의 일에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는다.
그게 팀장들을 위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특판팀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자 김대성이 달려와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식사하러 가신 거 아니셨어요?”
“그랬지. 근데 로비에서 마 팀장님 형수님을 좀 만나서.”
내 말을 들은 마 팀장이 재빨리 달려왔다.
“저희 집사람이요?”
“네. 속옷이랑 양말, 음식까지 챙겨서 오셨네요.”
“하……. 이 사람이 오늘은 집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근데 가전팀은 무슨 일인가요?”
“아……. 저거요? 보타 에어프라이어를 작은 용량으로 가져왔다네요.”
“작은 용량이요?”
“네. 대형 제품 생산이 멈췄다고 하더라고요. 부장님도 최병찬 대리 아시죠?”
안다. 최병찬 대리는 착하고, 또 착하고, 착하다.
가끔은 호구처럼.
“예, 알죠.”
“병찬이가 또 호구 잡혔나 봅니다. 쟤는 상세 페이지 카피는 그렇게 그럴싸하게 뽑으면서……. 에효.”
“흠…….”
“딱 봐도 에어프라이어 업체에서 대충 재고 물량으로 때우려는 것 같은데……. 이 팀장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에어프라이어는 대용량 제품의 판매가 70% 이상이다.
그래서 공장에서 아예 처음부터 대용량만 생산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이번에는 좀 간섭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전팀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제품 브로슈어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에이마켓에 대형 돌리고 마프에는 소형만 넣어 버려.>
<에이랑 첫 거래인데 당연히 11L 제품 밀어야지.>
<마프에서 인지도 충분히 쌓았으니까, 이제 오픈마켓 위주로 돌려도 돼.>
<최 대리는 뭐 대충 둘러대면 끝인데.>
매출이 좀 나오고.
브랜드 인지도가 생기니까 더 낮은 수수료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우린 애초에 이런 분쟁을 막기 위해 미리 1년의 공급 수량을 미리 정했고, 이들의 행동은 우리와 최 대리를 기만한 것이다.
나는 브로슈어를 최병찬 대리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이번에 11L짜리 D605 제품 생산 라인이 멈췄다고 해서…….”
“계약 수량은 얼마죠?”
“12만 개입니다.”
“지금까지 납품된 수량은?”
“3만 개입니다.”
남은 계약 기간은 6개월.
이대로 두면, 대충 둘러대며 다른 커머스로 제품을 돌릴 확률이 높다.
나는 미간을 구기며, 최병찬 대리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 대리. 그쪽 담당자들 전부 들어오라고 하세요.”
“내일 넘어가서 꼭 D605 들고 오겠습니다.”
“내일?”
“네. 오늘부터 철야를 해서라도 생산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요?”
“…….”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공장이 인천이라…….”
“못 들었습니까? 비행기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진성 팀장이 내 옆으로 달려왔다.
“이 팀장님! 법무팀에 연락해서 계약서 가지고 올라오라고 하세요.”
“네?”
“가전팀은 꼭 두 번씩 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1시간이 지나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보타 쪽 직원들이 가전팀의 자리로 뛰어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들의 행동을 바라봤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최병찬 대리는 그들을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진성 팀장이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부장님, 도착했습니다.”
나는 이진성 팀장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보타 쪽 담당자들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거의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굽혔다.
“김 이사님.”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부르자, 보타의 김규민 이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인력 수급이 어려워서 생산이 좀 늦어졌습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면 D605 제품을 다시 입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제품은 인지도가 낮았고.
만약 마켓 프레시에서 판매되지 않았다면 부도가 날 수도 있는 회사였다.
그냥 계약 해지만 통보해도 그만인데.
이들을 부른 것은 최병찬 대리의 생각을 바꿔 주기 위해서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주일이라…….”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주에는 1만 개 이상 넣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 김규민 이사의 명함에서 들려왔던 기억.
<일주일만 시간을 벌자. 에이마켓 오픈하고 반응 볼 때까지만.>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려는 생각이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돌려 최병찬 대리를 불렀다.
“최 대리!”
“예. 부장님.”
“계약서 7조 2항 좀 읽어 줄래요?”
최병찬 대리는 계약서를 넘기며, 딱딱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갑이 공급 수량의 문제를 제기할 시, 을은 이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여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표정이 좋지 못한 김규민 이사를 바라봤다.
“우리의 피해액은 책정했습니다. 이 팀장님. 얼마죠?”
“창고 보관료에 반품, 운송료까지 모두 해서 2억이 조금 넘습니다.”
“그대로 배상 요구하세요.”
이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김규민 이사가 재빨리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았다.
“아……. 죄송합니다. 삼 일, 삼 일만 시간을 주시면…….”
“삼 일이면, 에이마켓에서 판매 시작하나 보죠?”
내 차가운 목소리에, 김규민 이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우리가 왜 보타의 제품을 사들였는지 아십니까? 제품도 좋지만, 그쪽 사장님의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함이 있으신 분이라면 이런 일은 만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근데 어쩌죠? 그 간절함을 믿었던 우리의 실수였네요.”
“부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린 보타와의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최 대리!”
내가 부르자, 최병찬 대리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며 답했다.
“네?”
“12조 3항 읽어요.”
“을이 계약사항을 위반할 시, 갑은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그럼 끝.”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규민 이사가 달려와 내 팔을 움켜잡았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에이마켓과의 계약은 파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파기했을 겁니다.”
“네?”
“에이마켓에도 내용증명 보냈습니다. 이 바닥에도 엄연히 상도가 있는데, 그들도 잘못한 것은 맞잖아요.”
“부장님, 저 이렇게 가면 사장님한테 죽습니다.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최병찬 대리를 불렀다.
“최 대리!”
“네?”
“우린 정당한 계약을 요구했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겁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그……. 그야.”
“어깨 펴요! 보타 제품 들고 와서 밤새도록 기획한 게 최 대리 아닙니까?”
“…….”
“내가 언제 갑질하라고 했습니까? 최 대리가 일한 것만큼의 대우는 정당하게 요구하세요!”
인지도가 떨어지는 제품을 런칭하기 위해서 MD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최 대리도 그랬을 것이다.
제품의 장점 하나하나를 살려 상품 페이지를 만들고 헤드라인 카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최병찬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나는 우리를 멍하니 보는 김 이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의 가장 큰 실수는 최 대리의 노력을 무시한 겁니다.”
“…….”
“최 대리! 뭐해요? 일 안 합니까?”
최 대리는 내 뒤를 따라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항상 착하고 또 착해서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착한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실수하는 상대에게는 냉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최 대리는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