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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50화 (50/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50화>

51. 친구는 가까이,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 앞.

그의 비서는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5분, 10분, 20분…….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나는 말 없이 소파에 앉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들어오시랍니다.”

차가운 비서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창밖을 보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최구열 이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만 바라봤다.

그렇게 또 무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이사님.”

내가 침묵을 참지 못하고 부르자.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 새롭게 TF를 구성해 보려고 합니다.”

“…….”

그는 자리에 앉지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장 조사와 상품 기획에 5일을 예상하고, TV 광고가 라이브 되는 시점에 맞게 새로운 카테고리를 오픈할 생각입니다. 라이브가 얼마 남지 않아 기획팀과 개발팀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이사님.”

“보고서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최구열 이사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는 여전히 나를 보지도 않고 창밖만 바라봤다.

“1차 TF 인원은 김경일 대리와 이미정 대리, 최인영 씨입니다. 그리고 가능성이 확인되면, 추가 인원을 배치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부장님!”

나는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를 최 이사를 바라봤다.

“네?”

“차 한 잔만 하고 갈래요?”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려, 내가 있는 소파로 걸어왔다. 그리고 상석이 아닌, 맞은편 자리에 앉아 인터폰으로 차를 가져다 달라는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는 한참 동안을 아무런 말 없이 테이블만 내려다봤다.

“저 이사님.”

내가 부르자, 그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봤다.

“후회 안 하십니까?”

“네?”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전혀요. 오길 잘했다는 생각뿐입니다.”

“오길 잘했다라……. 그렇군요.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잡아 둔 것 같네요. 그만 가셔도 됩니다.”

그동안은 만만했을 것이다.

나이 많은 대표이사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아들.

지주회사 회장의 딸마저도 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정우라는 거대한 적의 등장.

자신의 편이 돼주길 바라던 그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것도 임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최구열 이사의 물건을 만지지도 않고도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최구열 이사가 다시 나를 불렀다.

“부장님!”

“예?”

“김지영 이사도 보고 가실 건가요?”

이정우 이사와 김지영 이사의 컨펌도 필요하기에, 모두 보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최구열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   *   *

맞은편 이정우 이사의 사무실.

최구열 이사의 사무실과 다르게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이정우 이사의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 지금 안에 계십니다.”

“그냥 들어가면 됩니까?”

“예. 원 부장님 오시면 언제든 들어오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이정우 이사가 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나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왔어?”

“예, 이사님.”

“지훈아. 내가 어제부터 동물의 숲을 시작했거든? 너 혹시 그거 해?”

“아니요.”

“그럼 내가 한 대 사줄까? 같이 해 볼래? 이게 같이 해야 재미가 있다고 하더라고.”

“별로 생각 없습니다.”

이정우 이사는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우리 원 부장 요새 바쁜 거 같더라.”

“이사님.”

내가 부르자.

그는 내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며 자신의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지훈아. 뭐 마실래? 속 시원한 스무디 어때? 김 비서한테 빨리 받아오라고 할게.”

“아닙니다. 방금 마시고 와서 괜찮습니다.”

“난 한잔 마셔야겠다.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거 같아서 말이야.”

이정우 이사는 문밖에 있는 자신의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 상석에 앉아,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인트라넷은 확인하셨나요?”

“응, 아까 봤어. 보고 역시 원지훈이라고 생각했지. 사람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동물의 먹거리까지 책임진다라……. 멋있어. 그리고 아주 괜찮아.”

“마케팅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래. 내가 태석이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뭐든 마음껏 시켜.”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인가?

다른 사업부의 요구를 자세히 듣지도 않고 허락하다니…….

마케팅사업부 김태석 부장.

많이 바빴겠구나.

CF 촬영 당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배너 구좌 몇 자리만 확정 지으면 됩니다.”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너 메기 효과라는 말 알지?”

메기 효과.

정체된 생태계에 메기 같은 강력한 포식자가 나타나면 개체들이 생존을 위해 활력을 띄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때문에 새벽 배송 시장에 뛰어든 대형 물류 업체들.

온라인에서 식품 판매량이 늘자 수수료를 낮춘 오픈마켓들.

신선식품 판매대에 공을 들이는 오프라인 마트들까지.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예.”

“어쩌다 보니까, 우리가 대한민국 커머스의 시장에서 아주 거대한 포식자가 되어 버렸어. 겨우 400억으로 시작한 회사가 말이야. 반려동물, 좋지. 요즘 개 끌고 산책 나오는 사람들 많잖아. 그리고 조만간 다른 카테고리들도 하나씩 늘려 갈 준비를 해야 할 거야. 포식자는 포식자답게 움직여야 앞서가야 하니까.”

어쩌다?

틀렸다. 우린 거대한 포식자가 되기 위해 피와 땀을 쏟아 냈다.

이정우 이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

팔걸이 옆에 있는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 앞으로 지원은 걱정하지 마. 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주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그림에 너도 꼭 필요하니까 잊지 말고.”

지는 해와 뜨는 해.

최 이사와 이 이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정우 이사는 전자 담배를 몇 모금 더 빨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생각해 봤어?”

최구열 이사의 약점을 찾아달라던 그 말을 묻는 것이다.

“아니요. 아직 못 해 봤습니다.”

“그래. 뭐 바빴으니까. 근데 아직도 담배 피우나?”

“네.”

이정우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전자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뿜었다.

“후……. 전략기획부에 양 부장 알지? 그 친구도 얼마 전에 나 따라서 전자 담배로 갈아탔어. 이게 냄새도 안 나고 얼마나 좋은데. 나 남는 기계 있는데, 하나 줄까?”

양주영 부장이 이정우 이사에게?

그는 최구열 이사의 오른팔 같은 사람인데…….

“양 부장이요?”

“응. 알고 보니까 그 친구 나랑 동갑이더라고. 똑똑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것 같고. 주말에 우리 집으로 불러서 간단하게 샴페인 한잔했어. 너도 부를까 했는데, 그 친구가 어색하다고 하더라고.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래? 지훈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뭔지 알아?”

“…….”

“친구는 가까이,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둬라. 캬……. 어때? 멋지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지금 자신에게 줄을 서라는 협박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이사님. 전자 담배 안 쓰시면 저 주시겠습니까?”

“아 그래. 한번 해 봐. 요새 전담이 대세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낡은 듯한 전자 담배를 내게 건넸다.

“코일 다 갈아놨으니까, 그냥 액상만 넣으면 돼. 여기 길 건너에 전자 담배 가게 알지? 거기 가서 액상만 사면 돼.”

나는 그의 말을 대충 듣고, 전자 담배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무조건 투자 박아야지. 상장만 하면 다 돌아오는 건데 뭐.>

<캬……. 이 아줌마들 돈 좀 있네.>

<사모펀드를 더 끌어들이면 500억 정도는 가능하겠어.>

<이번에 CF 터트리면 무조건 돈 들고 오겠지.>

사모펀드.

오로지 투자에 대한 생각뿐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마켓 프레시의 몸집 부풀리기에만 신경을 쓰는구나.

그가 오래 쓰던 물건인가?

전자 담배에서는 그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아니 뭘 그 정도로. 일단 그거 해 보고, 마음에 들면 말해. 내가 새로 사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정우 이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다시 전자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리고 야릇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언제든 시간 나면 놀러 와.”

*   *   *

“왔어? 외근 갔다 와서 좀 늦게 봤어.”

마지막으로 들린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내가 올린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보고서를 꼼꼼히 살피던 그녀는 나를 힐끔 보고 미소를 지었다.

“좋네. TV 광고 일정에 맞춘다고? 가능하겠어?”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 원 부장이 알아서 잘하겠지. 차 한 잔 줄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소파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네. 주세요.”

이곳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떤 강요나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일에 대해서만 물었고, 친구처럼, 때론 누나처럼 대해 줬다.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김지영 이사는 차를 들이켜며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김경일 대리가 저번에 나한테 왔던 그 친구 맞지?”

맞다.

정진택 팀장의 고구마 큐브 사던 때, 김지영 이사를 창고로 데려온 것이 바로 김경일 대리였다.

“네 맞아요.”

“그래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 똑똑한 거 같더라. 네슬레 출신이라고?”

“네.”

“동물 심리학이라……. 공부도 꽤 했나 보네.”

“네, 저도 몰랐습니다. 이사님.”

“응?”

“만약 TF에서 성과가 나오면…….”

김지영 이사는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어 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당장 외부에서 인력을 끌어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성과만 나온다면 네 생각처럼 될 거야.”

인사부의 수장인 김지영 이사.

그녀는 이미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TF를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훈아. 최구열 이사 만나고 왔어?”

“예.”

“음, 별말 안 해?”

“네. 별말 없던데요?”

“흠……. 그렇구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니야.”

서둘러 말을 끊어 내는 김지영 이사.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나는 남은 차를 마시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김지영 이사는 내 눈을 뚫어지게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최구열 이사가 돈을 끌어오려고 하고 있어. 나한테 아버지를 좀 설득해 달라고 하더라고.”

“회장님을요?”

“응. 마켓 프레시만으로는 받아 내기 힘드니까, BO푸드에게 공증을 서달라고 요구한 거야.”

“얼마나요?”

“2천억.”

2천억.

BO푸드가 공증만 선다면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다.

그리고 이는 이정우 이사가 꿈도 꾸지 못하는 금액이기도 하다.

최구열…….

이정우의 생각을 알고 같은 방법으로 역전을 노리고 있었구나.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난 아직 모르겠어.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들의 사내 정치질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냥 이정우 이사와 최구열 이사가 끌어들이는 돈이 필요할 뿐이다.

다른 온라인 커머스, 물류, 유통, 배송, 오프라인 대형 마트들.

시장이 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앞서가려면.

더 많은 인재와 더 많은 시설, 그리고 더 많은 시스템이 필요하다.

차라리 고맙다.

그들의 경쟁에 내 목표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으니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가까이,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하더군요. 둘 다 가까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대신 TV CF가 나가고 일주일 후에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지영 이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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