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46화 (46/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46화>

47. CF 촬영하는 날이잖아

다음 날.

청년고기에서 1차 날인한 계약서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나는 노란 봉투 안에서 계약서를 꺼내, 고재익 대표의 기억을 들었다.

<이 기회를 꼭 잡아야 해.>

<마진을 제로로 가져가더라도 마켓 프레시 유지를 우선으로 하자.>

<성진환……. 반드시 잡는다.>

이렇게까지 욕심이 있는 줄 몰랐다.

그냥 잘 웃는 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려 정진택 팀장을 불렀다.

“정 팀장님!”

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의 나를 바라봤다.

“예. 부장님.”

“청년고기, 이번 달 사입 비용으로 20억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20억 전부 다요?”

MD 사업부 부장이 최대로 쓸 수 있는 사입비는 20억.

물론, 권한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사입 비용은 한 달 이내로 50% 이상의 금액이 매출로 들어와야만 한다.

“네. 전부 다요.”

“괜찮으시겠어요?”

“우선 우리의 믿음을 보여 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정 팀장님은…….”

정 팀장은 내 말을 끊어 내며, 한 손을 흔들었다.

“알아요. 알아! 생색 이만큼 내겠습니다. 아주 부담스러워할 만큼이요.”

양팔을 크게 벌리는 정진택 팀장.

그도 이제 내 생각을 잘 안다.

그러고 보면, 정 팀장이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다.

눈치도 빠르고, 가끔은 생산자에게 어깃장을 놓으며 좋은 단가를 받아오기도 했으니까.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잘 아시네.”

나는 고개를 돌려, 특판팀의 자리를 바라봤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하연두.

그녀는 그날의 악몽을 모두 잊은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   *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사무실.

- 6층 BO푸드 제품 전시실로 와.

이정우 이사의 사내 메신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부장님!”

김태하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왜?”

“부장님은 날 보면 왜밖에 할 말이 없어?”

“내가 그랬나?”

“어디가? 혹시 6층 가는 거야?”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는 김태하 팀장.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 웃음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왜?”

“이거 봐 또 왜잖아!”

“우리 팀장님께 무슨 이유가 있으실까요? 이제 됐냐?”

“나도 데려가면 안 될까?”

“그러니까 너를 왜?”

“오늘 정이나 오는 거 몰라? CF 촬영하는 날이잖아.”

촬영일을 들었는데, 오늘인 줄은 까먹고 있었다.

“아, 그래? 몰랐네. 근데 너 정이나 팬이었어?”

“여기 있는 남자 중에 정이나 팬 아닌 사람이 있어?”

“은지 씨는?”

“그야…….”

“은지 씨도 알지? 네가 정이나 팬이고, 신이 나서 달려간다는 거 말이야.”

“이건 비즈니스야. 엄연히 회사를 위해서라고!”

“핑계로 성공한 건 김건모밖에 없어.”

김태하 팀장은 입을 삐죽 내밀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번만 눈 좀 감아 줘라. 친구끼리 정말 이럴 거야?”

나는 진지한 김태하 팀장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어 보였다.

“알았다. 네 본능을 존중해 주지.”

“부장님. 사랑합니다.”

김태하 팀장은 재빨리 차려 자세를 하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그는 재빨리 엘리베이터의 문을 한 손으로 막아서며, 나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6층의 제품 전시실.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BO푸드의 제품 진열장은 모두 치워졌고, 그 위치에 보라색 아파트 현관 모양의 세트가 지어져 있었다.

스태프들의 위치를 잡던 이정우 이사는 나와 김태하 팀장을 보고 손짓했다.

“원 부장!”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그는 옆에 있는 김태하를 보고 물었다.

“가공식품 팀장님이시지?”

“예. 김태하입니다.”

김태하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정우 이사는 대충 인사를 받고, 나에게 두꺼운 파일철 하나를 건넸다.

“필요한 사진 컷들 정리한 거니까, 보고 추가할 거 있으면 추가해.”

“예,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시간 뺀 거니까, 빠진 것 없이 꼼꼼히 봐야 해!”

“예.”

“그리고 김태하 팀장은 미국에서 왔지?”

이정우 이사는 라인과 출신에 대해 참 철저했다.

“예.”

김태하의 대답을 들은 이 이사는 건성으로 손짓했다.

“알았으니까 저쪽으로 가봐.”

나는 김태하 팀장과 함께 큰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마케팅 사업부의 김태석 부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바쁘시죠?”

김 부장은 내 물음에 그냥 억지스러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꼼꼼한 이정우 이사가 얼마나 달달 볶을지를…….

잠시 후.

전략기획부의 양주영 부장이 근처로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김태하 팀장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김태하 팀장의 옆에 앉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태하 오랜만이네.”

미국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그들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잘 지내셨어요?”

“뭐……. 그렇지.”

최진영 대리 사건 이후로 완전 변방으로 몰려난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진영이는 연락해 보셨어요?”

참 거침이 없는 김태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양 부장에게 물었다.

“아……. 아니.”

“비록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양 부장님 새끼였잖아요. 많이 아끼던 애 아니었어요?”

“내가 언제?”

“에이……. 전에 최진영이는 전략기획부에 꼭 데려간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랬다고? 흠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빠르게 꼬리를 잘라 내는 양 부장.

최구열 이사로부터 배운 건가?

양 부장이 이렇게 나올 줄은 진작 알았다.

“정이나 씨 왔어?”

이정우 이사의 말에 모두가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봤다.

일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촬영팀도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검은 맨투맨 티셔츠.

딱 붙은 청바지.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그녀는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와……. 여신님의 실물을 영접하네. 출세했네. 김태하 출세했어.”

김태하 팀장이 눈에서 하트를 쏟아 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임원들과 남자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이나는 부담스러운 시선들에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이정우 이사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이정우 이사가 재빨리 캠핑용 의자를 펼쳐 줬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곳에 앉았다. 자리가 멀어서 그런지,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때, 김태하 팀장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이 주먹만 하네. 그지?”

나는 이 이사가 준 파일을 넘겨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먹만 하네.”

“평범한 옷인데 어쩜 저렇게 빛이 날까?”

“그래. 아이 눈부셔.”

“아까 걸을 때 봤어? 완전 모델 워킹이었어.”

“모델 아니었어?”

“머릿결 진짜 좋아 보이네.”

“그러게. 태하야, 이제 그만하고 이거 좀 봐봐.”

김태하 팀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이 이사가 건네준 파일을 넘겨 보며,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잠시 후.

정이나가 의상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이정우 이사가 나를 불렀다.

“어때? 추가할 동작이나 사진 컷은 없어?”

“제품 이미지에 쓰려면 포크나 젓가락을 들고 있는 컷들을 좀 찍었으면 합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은 포토숍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이요.”

“그래. 그거 좋겠네. 정이나 씨 처음 보지?”

“예.”

“인사할래?”

그의 말에, 내 옆에 붙어 있던 김태하가 어깨를 들이밀며 소리쳤다.

“정말요?”

“아니 너 말고, 원 부장.”

“저는 안 됩니까? 제가 정이나 씨 완전 팬이라서요.”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한 표정을 짓는 김태하.

이정우 이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 잠깐만 있어 봐.”

잠시 후.

보라색 잠옷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친 정이나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이 의상 너무 내추럴한 거 아니에요? 나 진짜 이거 입어요?”

그녀의 질문에 이정우 이사는 평소 친분을 과시하는 말투로 답했다.

“이나 씨는 뭘 입어도 빛나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 박시한 거 같은데?”

“아니야. 느낌 있어. 딱 좋아.”

“근데 감독님. 다른 출연자는 안 와요?”

“이나 씨 1차 촬영분 끝나고 촬영하니까, 두 시 반까지 오라고 했어.”

2시 10분 전.

아직 촬영도 시작 안 했는데…….

두 시 반까지 오라는 것은 와서 대기하라는 소리다.

“겹치는 씬은 없어요?”

“없어. 그리고 여긴 우리 회사 MD 사업부에 원지훈 부장.”

이정우 이사가 나를 소개하자.

정이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영화에서 보던 그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정이나입니다.”

“예. 원지훈입니다.”

“젊은 부장님이시네요. 전 이런 회사 부장님이시면 저기 계신 분처럼 나이가 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멀찍이 있는 양 부장을 가리켰다.

“원 부장님의 능력이 출중하셔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태하 팀장입니다.”

내 뒤에 있던 김태하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정이나는 손을 살짝 잡아 주자, 김태하는 입이 찢어질 것처럼 웃어 보였다.

“정말 팬입니다. 달에서 온 그대. 100번은 봤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저 손 좀…….”

잡은 손을 놓지 않던 김태하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고.

그녀는 당당하고 다양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 내내 힘든 요구가 있었는데,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모든 일을 척척 해냈다. 나는 촬영장에 김태하 팀장을 남기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   *   *

“어때요?”

마성근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일단 20억 사입 계약서 보냈고요. 팀장님은 고 대표한테 전화해서 다른 일들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해 주세요.”

“그거 말고요.”

“그럼 뭐요?”

“정이나요. 예뻐요?”

남자의 질문은 예뻐요로 시작해서 예뻐요로 끝난다.

“네. 예쁩니다. 아주, 아주 예쁩니다. 됐죠?”

나는 마 팀장의 등을 쓰다듬고, 고개를 돌려 정진택 팀장을 불렀다.

“정 팀장님!”

오후 2시.

오늘 나는 정근택 팀장과 여주의 표고버섯 농장에 가기로 했다. 정 팀장은 가방 안에 준비한 파일들을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준비 마쳤습니다.”

“제 차로 움직여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1층 주차장.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중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쿵!

남자는 입에 거품을 물었고.

순식간에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재빨리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목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구경만 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119! 빨리 119 불러요.”

꺽꺽대며 숨을 쉬지 못하는 남자.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나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옷에서 들려오는 기억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진택 팀장이 전화를 걸었고.

사람들은 지켜만 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때.

“비켜요!”

20대의 여자가 나를 밀쳐 내고, 남자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맨손으로 남자가 쏟아 낸 거품을 닦아내며 입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말린 혓바닥.

여자는 침착하게 혓바닥을 펴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남자가 정상적으로 호흡했지만, 여전히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 많이 막히죠?”

여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당황한 정진택 팀장이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네…….”

“여기서 병원 멀어요?”

“저기……. 성모병원이 가깝긴 한데.”

여자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쭈그려 앉아 남자의 양팔을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업으려는 것인가?

이렇게 나약해 보이는 여자가?

그녀는 끙끙대며, 남자를 일으키려 했다.

병원까지는 300여 미터.

막히는 길을 뚫고 가는 것보다는 업고 뛰는 것이 빠르다.

“제가 업겠습니다.”

내가 등을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쓰러진 남자를 내게 업히도록 했다.

나와 정진택 팀장.

그리고 자신의 하이힐을 양손에 든 여자가 병원을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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