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43화>
44. 원 부장이 원하는 만큼
이정우 이사가 출근한 지는 겨우 일주일.
그는 마켓 프레시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했고,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공감을 샀다.
발표가 거의 끝날 무렵.
스크린을 보던 임원들이 입을 닫지 못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여기서 정이나 모르시는 분 계신가요?”
정이나.
얼마 전에 결혼한 여배우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일 것이다.
아니, 간첩도 알 만한 배우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그녀가 촬영한 CF까지 화제가 됐다.
또한, 개념 있는 발언으로 안티가 없는 여배우로 유명했다.
이 이사는 임원들을 둘러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정이나를 만났는데, 그녀도 마켓 프레시에서 신선식품을 구매하는 회원이랍니다.”
“이사님, 그럼 정이나 씨와 협의를 할 수 있습니까?”
김지영 이사가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정우 이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협의가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끝났습니다.”
기업이 모델을 고르듯, 모델도 브랜드를 판단한다.
특히 정이나와 같은 대형 스타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스타트업의 광고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만약 회사가 잘못된다면.
모델도 타격을 받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김지영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끝나요?”
“계약 기간은 1년. 모델료는 10억입니다. 또한, TV, 라디오, 지면, 제품 포장지까지, 모두 그녀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활용할 생각입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의 톱스타가 CF에 출연한다.
그것도 창업한 지 1년도 안 된 스타트업 기업에.
그리고 제품 포장에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쓰는 것을 허락한 것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정우 이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모델을 써도, 광고가 많이 나가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코바코(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3년간 70%의 광고비를 지원받기로 했습니다.”
코바코에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70%라…….
이렇게 많은 지원을 받는 업체가 있었을까?
대박이다. 정말 대박이다.
“광고 예산은 얼마나 잡으셨습니까?”
최구열 이사의 질문에 이정우 이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3년간 300억. 이 중 70%의 지원이 들어오니 우린 90억 정도의 예산만 잡으면 됩니다.”
조금 전까지 15억에 죽일 듯이 달려들던 최구열 이사.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이나를 모델로 300억 규모의 광고를 30% 비용만으로 가능하다는 것.
이 자체가 얼마나 큰일인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정근영 대표가 박수를 보냈고.
다른 임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정우 이사는 임원들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날렸다.
“전 꿈이 큽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것은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아마존을 꿈꾼다고요? 그럼 한국에서 1등 커머스라는 타이틀 먼저 따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해야 합니다. 더 큰 자본과 더 훌륭한 시스템. 이것만이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줄 수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이정우 이사는 사무실로 돌아가는 나를 붙잡았다.
“원 부장님.”
“예?”
“나 좀 잠깐 봅시다. 급한 일 없으시면 커피나 한잔하시죠.”
“알겠습니다.”
* * *
이정우 이사의 사무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강렬한 메탈 음악을 크게 틀었다.
사무실 곳곳에 달린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소파 상석에 앉은 후, 나에게도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난 사람을 많이 가립니다. 저기 밖에 있는 비서들도 최 이사나 김 이사의 사람들일 테니까요. 이해하죠?”
“이해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내 답에, 이 이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그나저나 오늘 좀 놀랐죠? 최구열 이사가 데려온 사람이 그를 물어뜯으니까.”
사실 가장 궁금했던 점이다.
이정우 이사는 최구열 이사가 데려온 사람.
당연히 둘이 손을 잡을 줄 알았는데…….
“예. 좀 놀랐습니다. 최 이사님과 친분이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미국에서 그룹폰 광고를 의뢰해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키도 크고, 코도 큰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빛이 났으니까. 근데, 여기 와서 한 일주일 지켜보니까 별거 없더라고.”
“……!”
“얼마 전에 전략기획부서에 대리 하나 나갔죠? 최 이사가 매정하게 꼬리를 잘라 내는데, 아마 그쪽 사람들 절반은 마음이 변했을 겁니다. 내 말이 틀려요?”
맞다.
요 며칠, 최 이사와 전략기획부 양 부장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보였다. 또한, 최구열 이사의 라인인 커피/음료팀의 장선영 팀장도 예전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정우 이사는 내 표정을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옆에 있는 냉장고에서 생수 두 병을 꺼내, 한 병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원 부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아홉입니다.”
“젊네. 그 나이에 벌써 부장 달고, 제법 성공한 인생인데?”
“감사합니다.”
“그럼 내가 편하게 해도 되지?”
“이미 편하신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이정우 이사는 뒤로 기대앉아 히죽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가 건넨 생수병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들었다.
<얘만 잡으면 되는 건가?>
<간단하네. 잘하면 1년도 안 걸리겠어.>
1년도 안 걸릴 것이라…….
그리고 얘는 나를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 것이라면 틀렸다.
나와 MD 사업부 직원들은 이들의 치킨 게임에 들러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시끄러운 음악 때문인지, 모든 기억이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작은 생각을 듣기 위해 미간을 구겼고, 이를 본 이정우 이사가 내 눈앞에 한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왜? 그냥 존댓말로 할까?”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하세요.”
“미안. 내가 원래 이래. 그리고 난 누구처럼 돌려서 말 못 해. 원지훈 부장. 내 사람이 되는 거 어때? 내가 확실히 밀어줄 테니까.”
빨리 답을 달라는 표정의 이정우 이사.
그는 내가 고맙다면서 넙죽 받을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와 다른 답을 했다.
“어디까지 밀어주실 수 있습니까?”
“원 부장이 원하는 만큼.”
“제가 원하는 게 좀 많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내 답을 들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이 회사에는 총 400억의 자본금이 들어갔어. 처음 100억은 BO푸드의 김상만 회장이 자신의 둘째 딸을 이사에 앉히면서 넣은 돈이야. 그러니까 정근영 대표가 질 수 없다면서 100억을 들고 온 거야. 그리고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최구열 이사에게 100억을 넣으라고 했지.”
“…….”
“근데 재미있는 건 여기서부터야. 최구열 이사가 정 대표의 손을 잡지 않고, 욕심을 내기 시작한 거야. 마켓 프레시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최구열의 작품이라고 언론에서 하도 떠드니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뭐 충분히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최 이사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그룹폰이 혼자 만든 거야? 아니지. 절대 아니야. 수많은 직원이 피땀을 흘려서 만든 거야. 그걸 최 이사가 가로챈 거고.”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사람이 다 있구나.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이정우 이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100억. 내가 들고 온 돈. 최 이사도 이 치킨 게임에서 조금씩 밀리니까 나를 끌어들인 거지. 처음에는 그냥 최 이사 손을 잡고, 쉽게 가려고 했어. 근데 들어와서 일주일 있어 보니까, 왜 최 이사가 나를 끌어들였는지 알겠더라고.”
“왜죠?”
“원지훈. 자네 때문이었어. 커머스는 MD가 절반이라면서? 정작 중요한 MD 사업부를 가져가지 못하니까 초조해진 거지.”
이정우 이사는 생수를 따서 벌컥벌컥 마시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어때?”
“글쎄요. 다른 사람들과 뭐가 다르죠?”
“최 이사는 원 부장을 밀어내려 했고, 난 원 부장을 인정하잖아. 또한, 김지영 이사보다는 능력 있고, 정근택 대표보다는 젊잖아. 돈은 얼마든지 댈 수 있어. 지금 마켓 프레시에 돈 넣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줄을 서 있으니까. 자네도 알지?”
그의 말이 사실이다.
식품 제조 회사 사장이나, 대형 벤더들을 만나면 마켓 프레시의 지분을 사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저에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명분을 가져와. 최 이사를 몰아낼 수 있는 명분을.”
그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계획을 했을 것이다.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하고.
더 많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할 생각을.
나는 사방에 달린 스피커를 둘러보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잘 안 들리네요.”
“응?”
“노래가 너무 커서 잘 안 들리네요. 오늘 하신 말씀 중 절반은 못 들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이거 나도 한 방 먹었는데?”
이정우 이사는 허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정우 이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빼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지. 그때는 좋은 소식 들고 오길 기대할게.”
스타트업은 누구든 주인이 될 수 있다.
작은 자본금으로 시작했기에.
더 많은 자본과 사람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최구열 이사와 김지영 이사가 주인의 자리를 얻기 위해, 조용히 힘을 겨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변할 것이다.
욕심이 있고, 그 욕심을 대놓고 드러낸 이정우 이사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 * *
17층 MD 사업부 사무실.
MD 사업부 직원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벌써부터 시끌벅적했다.
마성근 팀장이 내 옆으로 달려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이나? 정이나를 모델로 쓴다고요?”
“네. 그런답니다.”
“와, 새로운 이정우 이사님이 대단한 분이시긴 한가 보네요.”
“뭐. 그런 것도 같고요.”
마 팀장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사님과 따로 자리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자기 라인 타라는 말 안 합니까?”
“글쎄요. 뭐라고 하는지 하도 시끄러워서 못 들었네요.”
“부장님. 이건 완전 꽃길입니다. 지금 당장 올라타야 하는 거라고요. 제 촉이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팀장님.”
“네?”
“제가 며칠 전에 영화를 봤는데요. 주인공이 막 설치고 다니니까, 주변 인물들이 다 죽더라고요.”
“그게 무슨…….”
“너무 설치는 사람의 주변에 있으면 다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 상황을 보시죠. 그리고 다음 주 특판 일정 밀렸던데, 또 늦게 주실 겁니까?”
“아 맞다. 금방 올리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메신저에게 알림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 원 부장. 나 좀 잠깐 보지.
김지영 이사였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정우 이사 어떤 거 같아?”
김지영 이사의 질문에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답을 했다.
“글쎄요. 꿈도 크고, 야망도 큰 사람 같네요.”
“흠……. 그래 나도 그래서 고민이야. 물론 정이나 씨가 CF를 찍어만 준다면야 고맙지. 그리고 70% 지원금도 아무나 받아 오는 거 아니잖아.”
“네. 능력은 있는 분 같습니다.”
“근데. 난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 건방진 태도와 말투 너무 거슬려. 지훈아, 혹시 너한테 뭐라고 하디?”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와달랍니다.”
“그래서?”
“도와줘야죠. 능력 있으신 분인데, 도와서 일해야죠.”
“그게 끝이야?”
“네. 그럼 뭐가 더 있을까요?”
“난 너랑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네 속을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별생각 없습니다. 그냥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제품을 보고, 더 구매하고, 덜 반품할지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이런 치킨 게임은 이사님들이나 즐기는 거지, 우리는 오늘 당장 산더미 같은 미팅과 일을 하기에 바쁩니다.”
김지영 이사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구나. 그래. 뭐 필요한 건 없어?”
“날씨도 선선해졌는데, 워크숍 좀 다녀와도 될까요?”
“워크숍?”
“네. 부서원들이 좀 지친 거 같아서요. 사업부 전체가 비우긴 그러니, 두 팀으로 나눠서 갈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결정되면 말해 주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