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42화 (42/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42화>

43. 한 방 제대로 먹으셨는데요?

임원 회의실.

정근영 대표 이하, 마켓 프레시의 모든 임원이 모였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크게 세 가지.

회계팀의 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보고.

MD 사업부의 새로운 콜드 체인 시스템 제안.

마케팅 사업부에 합류한 이정우 이사의 마케팅 플랜.

먼저 시작한 회계팀의 분기 수익 보고는 길고, 지루했다.

30분이나 이어진 딱딱한 프레젠테이션에 몇몇 사람들은 눈을 비비며 잠들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그렇게 회계팀의 보고가 끝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원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기존과 같은 PPT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준비를 마쳤다.

“MD 사업부의 원지훈입니다. 얼마 전 냉장 시스템 오류로 현지에서 운송하던 굴을 전량 폐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보험사의 빠른 배상으로 금전적인 손실은 없지만, 제품 출고일이 하루 늦어져 일부 회원들이 클레임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MD 사업부에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새로운 콜드 체인을 준비해 봤습니다.”

노트북의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노트북의 화면이 그대로 대형 스크린에 전달됐다.

- 안녕하십니까! 존경하는 대표님, 이사님, 부장님. MD 사업부 특판팀의 마성근 팀장입니다!

대형 스크린에 나타난 마성근 팀장.

다들 딱딱한 PPT를 예상했는데, 마 팀장의 큼지막한 얼굴이 나오자 매우 놀라는 듯했다.

어제 있었던 MD 사업부 회의.

마 팀장은 딱딱한 PT 대신 실시간 라이브 방송으로 설명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IOT 설비가 장착된 냉동칸 안으로 들어가 온도의 변화를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물론 나는 반대했다.

하지만 다른 팀장들의 반응은 달랐다.

괜찮겠다던 김태하 팀장.

신박한 생각이라고 극찬하던 정진택 팀장.

미국에서도 이런 PT로 펀딩을 유치했다던 김민정 팀장.

천재라고 침을 튀겨 가며 흥분했던 이진성 팀장까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를 찬성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자리에서 서서 팀장들이 만들어 준 대본을 읽기로 했다.

“IOT를 설명해 드리기에는 조금 딱딱하고 어려워서, 직접 시스템이 구현되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아닌 마성근 팀장의 아이디어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마 팀장의 아이디어라는 건 그가 꼭 추가해 달라는 말이다.

나는 말을 마치고, 휴대폰을 꺼내 마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팀장님 지금 어딥니까?”

- 지금 이곳은 IOT 콜드 체인이 설치된 차량의 안입니다.

“현재 온도는 어떻게 됩니까?”

- 37도입니다. 문을 다 닫으니까 매우 덥군요.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마 팀장은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일단 밖의 상온과 마찬가지로 17도 정도로 내려 보겠습니다. 팀장님은 차 내부에서 나오는 냉기를 체크해 주세요.”

노트북에 프로그램을 열고, 설정 온도를 17도로 낮췄다.

그러자 마 팀장은 냉기가 나오는 한쪽 벽으로 다가가 상의를 벌려 찬 바람을 몸 안에 넣기 시작했다.

- 좋네요! 아주 시원합니다. 실내 온도를 측정해 보겠습니다.

마 팀장이 주머니에 있던 휴대용 전자 온도계를 화면에 비췄다.

31도, 30도, 29도.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없으니까, 냉장 온도인 영상 2도에 맞춰보겠습니다.”

다시 프로그램에 설정 온도를 2도로 입력하자.

차량 안의 온도가 더 빨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 팀장은 언제 준비했는지, 한쪽에 있던 오리털 점퍼를 입으며 이를 덜덜 떠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의 익살스러운 연기에 하나둘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마 팀장님. 이제 영하로 온도를 낮출 건데, 버티기 힘드시면 바로 나오셔야 합니다.”

- 물론 그래야죠. 사고 나도 산재 처리 안 해 주신다면서요?

이건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다.

“상황 설명이나 하시죠.”

- 온도 떨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농담 좀 했는데, 뭐 그렇게 정색을 하십니까? 밖에 특판팀 식구들하고 튜나월드 전문가들이 대기 중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임원들을 둘러보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영하 30도로 낮춰보도록 하겠습니다. 밖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 말에, 정근영 대표가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프로그램에 영하 30도를 입력하고, 마성근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 냉기가 확실히 다릅니다. 이 시스템이 정확하다면, 앞으로 2분 안에 영하 30도로 내려갈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곳에 전자 온도계를 걸어 두고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마 팀장은 냉동 차량 안에 전자 온도계를 걸어 두고 밖으로 나갔다.

영하 17도, 18도, 20도

온도가 점점 떨어지고, 정말 2분 만에 영하 30도까지 떨어졌다.

“지금 보신 것처럼 IOT 시스템을 이용해, 각 차량의 온도를 외부에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설정 온도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담당자의 휴대폰으로 SMS가 전송되도록 설정할 수 있습니다.”

김지영 이사는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좋은 시스템이네요. 설비 비용은 얼마나 들어갑니까?”

“현재 저희 차량 모두 설치할 경우 15억 정도의 비용이 예상됩니다.”

최구열 이사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15억이요?”

“마켓 프레시의 대표상품은 신선식품들입니다. 냉장, 냉동 설비들의 확충은…….”

그는 한 손을 올려 내 말을 끊어 냈고, 미간을 구겼다.

“부장님. 우린 물류 회사가 아닌, 이커머스입니다. 부장님의 제안 덕분에 냉장, 냉동 차량 설비를 추가하는 데만 30억이 넘게 들어갔습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MD는 제품을 바잉하고, 세일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한국은 미국과 다릅니다. 커머스를 하기 위해서는 배송, 배송을 위해서는 물류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글쎄요. 한국처럼 배송과 물류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나라가 세계 어디 있겠습니까? 부장님은 왜 남들이 수십 년간 걸쳐서 만들어 둔 시스템을 거부하려는 겁니까? 우린 그냥 그 시스템을 활용하고 좋은 제품을 싼값에 공급하면 그만입니다.”

“10년 전, 가격 비교 사이트들이 나오면서 최저가 비교가 쉬워졌고 누구나 같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도록 변했습니다. 그리고 품질, 포인트 전쟁이 치러졌고, 이제는 누가 더 빨리 배송하는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최구열 이사는 내가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상한 것처럼.

옅은 미소와 함께 다시 반박을 시작했다.

“그건 자본이 많은 회사 얘기죠. 우린 다른 이들과 배송 전쟁을 할 만큼 자본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히, 식품을 다루는 우리는 더 많은 물류 비용이 들어갑니다. 한국 속담에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죠. 지금 저희가 딱 그 모양이 아닐까요?”

“옛말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돈, 빽, 깡 셋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요. 우린 다른 커머스에 비해 자본이 없습니다. 빽? 그런 거 당연히 없습니다. 그럼 깡이라도 있어야죠. 우리가 적은 자본으로 다른 커머스들과 경쟁할 수 있는 부분은 배송이 유일합니다.”

최 이사는 고개를 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부장님은 달빛 배송이 오래갈 거라 보십니까? 이는 기존에 물류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는 모델입니다. 심지어, 롯트 물류에서는 테스트를 마치고 조만간 새벽 배송을 오픈하겠다고 한 상태입니다.”

“대기업이 왜 우리를 따라 할까요? 그건 우리가 옳았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인프라가 충분한 롯트는 언젠간 우리보다 더 훌륭한 물류 시스템을 갖추겠죠. 그때 우린 새로운 아이템, 새로운 시스템으로 한발 앞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최 이사님이 적어 주신 자서전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최구열 이사.

아마 그의 자서전에서 배웠다는 이 말이 언쟁을 멈추게 한 것 같았다.

그때.

짝짝짝!

한쪽 구석에서 울리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고.

회의실의 모든 임원이 그쪽을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이정우.

그는 이번에 새롭게 영입된 마케팅 사업부의 이사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남다른 패션 감각.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피부를 가진 그는, 누가 보면 연예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와우. 최 이사님 한 방 제대로 먹으셨는데요?”

가볍고 버릇이 없는 듯한 말투다.

한국 광고계에서 유명한 이정신 이사의 친동생 이정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광고 기획 회사에서 10년 이상 근무했고, 다수의 히트 광고를 찍은 CF 감독이기도 했다.

“뭐요?”

최 이사가 그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아니요. 재미있어서요. 원지훈 부장님이라고 했죠?”

“예. 맞습니다.”

“그룹폰의 성공 신화, 최구열 이사님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다 하시고.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

나를 혼내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려서 최구열 이사를 조롱하는 것인가?

겉으로 보이는 표정으로는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IOT 콜드 체인이라. 저거 하나만으로 광고를 때려도 먹히겠네요. 조금 전 크리에이티브한 영상도 매우 좋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5초도 안 걸린 것 같군요. 대표님은 어떠셨습니까?”

임원들의 시선이 모두 정근영 대표에게로 향했다.

이에 정 대표는 마이크를 자신의 앞으로 당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 부장님. 저 시스템을 모든 차량에 적용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

“3주 정도 걸릴 것이라 예상합니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 보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계약 후 3년간은 무상으로 관리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3년 후에는요?”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지만, 연간 오천만 원 이하로 부담이 가지 않는 수준입니다.”

정근영 대표가 고민했고.

이를 지켜보던 이정우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고민하시니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스템의 효율 그런 걸 다 떠나서 마케팅의 꼭지로 삼기에는 참 좋네요.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말이 많은데, 배송 과정에 이를 잘 유지한다라……. 써먹기 참 좋겠습니다.”

“이정우 이사님! 15억입니다. 무려 15억이라는 설비 비용이 들어갑니다!”

최구열 이사가 소리치자.

이정우 이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준비한 플랜을 보면 놀라시겠군요. 전 100억 이상의 예산을 요구할 예정인데요?”

“……!”

“소비자는 갈수록 신선하고 안심할 수 있는 먹거리를 요구해 왔습니다. 이 시스템은 그에 분명 도움이 될 거로 보입니다. 원 부장님 끝나셨으면 제가 좀 보태도 될까요?”

이정우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으로 걸어와 한쪽 눈을 찡긋하고 노트북에 자신의 USB를 꼽았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여러분과 한솥밥을 먹게 된 이정우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최구열 이사와 이렇게 맞서는 사람이 있었나?

정근영 대표, 김지영 이사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주회사인 BO푸드의 김상만 회장도 최구열 이사에게는 함부로 못 했다.

그나마 내가 대립각을 세웠지만.

지금의 이정우 이사처럼은 하지 못했다.

경력, 나이, 직위, 사회적 인지도 등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까.

근데 이정우라는 이 사람…….

몸에 밴 자신감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어색함이 없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것처럼 너무도 당당하다.

나는 그의 옆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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