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41화>
42. 강 중 약, 어느 단계로 갈까요?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
운전대를 잡은 정진택 팀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장님은 믿으세요?”
“뭐를요?”
“아침에 점검했다는, 그 기사 말이요.”
기사의 모자에 담긴 기억에서 분명 들었다.
아침에 점검하고, 세차까지 해서 말끔해졌다는 기억을.
나는 창밖을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믿습니다. 팀장님은요?”
“저는 솔직히 못 믿겠습니다. 저희 쪽 차량이었다면 믿겠는데, 사고가 난 차량은 개인 차량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시한 수준의 콜드 체인(냉동, 냉장 시스템)을 개인이 관리할 수 있었을까요?”
회사에서는 개인이 관리하는 콜드 체인을 믿지 못했고, 회사 차량을 운행하는 것을 권장했다. 이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회사 차량을 이용했는데, 오늘 그 기사만 개인 차량을 운행한 것이었다.
“그래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왜 개인 차량을 고집해서 끌고 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유류대랑 간식 비용은 나오잖아요.”
“겨우 십만 원이요? 그것도 기름 넣으면 삼만 원 정도 남는 거잖아요.”
다른 회사는 자신의 차량을 운행하면 일당을 더 많이 지급하지만, 우리는 유류대와 간식 비용만 별도로 지급된다. 이는 회사 차량을 운행하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팀장님에게 삼만 원이 적은 돈일 수는 있지만, 그분에게는 큰돈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삼만 원 때문에 이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잖아요. 다른 기사들도 그래서 다 회사 차량을 끌고 나가는데, 왜 굳이…….”
말끝을 흐리는 정진택 팀장.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미선 과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천득만 기사님은 개인 사정이 있어서, 쭉 개인 차량만을 운행하셨어요. 관리도 잘하셨고, 이런 사고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시는 분이세요?”
“조금요. 사모님은 병원에 계시고, 현재 딸이랑 둘이 살고 계세요. 원래 크게 사업을 하셨는데, 사모님 병원비 때문에 사업도 접고, 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분에게는 삼만 원이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의 기억에서 들렸던 미역국.
그것은 아마 딸의 생일이었나 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부장님, 보험에서 보상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예. 우리 쪽 과실이 없으니 나올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조수석 옆 백미러로 이미선 과장의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 겁니다. 그리고 기사님에게도 전화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이런 일 정말 잘하시는 분이 대기 중에 계시니까.”
1시간 정도를 달린 차가 사옥 1층에 멈춰 섰다.
나는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와 박대영 차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박 차장은 나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신 일은 잘됐습니까?”
“아니요.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요?”
“네. 보험사 측에서 자꾸 회피하려는 게 보여서요. 이거 생각보다 까다롭게 나오네요.”
“어딘데요?”
“TC 손보요.”
박대영 차장의 특기 중 하나가 독촉이다.
사실 말이 좋아 독촉이지, 진상이나 미친개에 가깝다.
일전에 지식인에 악성 글이 달렸을 때는 직접 고객 센터를 찾아가 난동을 부렸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회원에게 찾아가 고소장을 내밀기도 했다.
“하……. TC? 이것들이 또 내 안에 있는 미친개의 본성을 깨우네요. 예전에 체인마켓 때도 얘들이랑 한바탕했거든요.”
“그래요?”
“강 중 약, 어느 단계로 갈까요?”
“마음껏 능력을 발휘해 주세요.”
“오호라. 그거 가장 듣기 좋은 답이군요. 아침에 마누라랑 한바탕했는데, 오랜만에 스트레스나 좀 풀어야겠습니다.”
박 차장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힐끔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하다.
5분마다 어떻게 됐느냐고 전화로 묻고.
보험사 대표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청와대에 청원을 올리고.
지역구 의원 홈페이지에 게시글을 도배하고.
네이트 판, SNS, 맘 카페에 댓글까지…….
상대방이 성문에 백기를 걸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거다.
“요즘 녹취 뜨니까, 욕은 하지 마시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건 제가 더 잘 압니다. 예전 차 부장님이 계실 때부터, 이건 제 몫이었거든요.”
자신감에 가득 찬 박대영 차장.
든든했다.
이런 사람을 같은 편으로 둔 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박 차장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보험 조사관 명함 받으신 거 있으세요?”
설계가 끝났구나.
나는 주머니에 있던 이종열 과장의 명함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고맙죠. 요즘 스트레스가 넘쳐 흘렀는데.”
박대영 차장은 뒷짐을 지고, 콧노래까지 부르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것도 부서원들 자리와 가장 먼 회의실로.
* * *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이런 사고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콜드 체인 업체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홈페이지 내용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똑똑. 바쁘십니까?”
마성근 팀장이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아까 중얼거리실 때부터요.”
“제가 중얼거렸어요?”
“네. 콜드, 콜드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거 찾으시는 줄 알고…….”
마 팀장은 주스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뭐예요?”
“콜드요.”
“아…….”
“쏘우 콜드.”
마 팀장은 양손을 모으고 장풍을 쏘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갑자기 확 추워지네요.”
“근데 갑자기 콜드 체인은 왜요? 이번 석화 때문에요?”
“네. 보험사로 받는 건 받는 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죠.”
“얼마 전에 박람회 갔다가 신기한 콜드 체인 기술을 봤는데…….”
“뭔데요?”
“사무실에 실시간으로 차량 온도를 보내 주도록 만들었다네요. 아이스 뭐였나? 아로 시작했는데?”
“IOT(사물에 센서를 부착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를 활용한 건가 보죠?”
“네. 아이……. 그거 맞아요. 실시간으로 온도를 알려 주고, 조절할 수 있으며, 고장이 나면 문자 메시지도 보내 준대요. 세상 참 좋아졌죠?”
맞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시스템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는 업체예요?”
“아뇨. 참치 유통하는 애들이라고 들었는데, 제 친구가 그쪽 팀장을 안다고 해서요. 다리는 놔 드릴 수 있습니다.”
“업체 이름이 뭡니까?”
“튜나월드요.”
튜나월드 김종환?
오늘 우연히 만난 그가, IOT 기반의 콜드 체인을 만든 사람이라고?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마 팀장에게 되물었다.
“튜나월드요?”
“네. 생각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바로 사람 섭외해서 미팅 자리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니요. 저도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네요.”
나는 씩 웃고, 주머니에 있는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마켓 프레시의 원지훈입니다.”
- 아, 원 부장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 뭘요?
“아까 점심 먹을 때 귀띔이라도 좀 해 주시지. 제가 대표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겠습니까?”
- 무슨 얘기를 들으셨길래?
“제 스타일대로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튜나월드에서 개발한 콜드 체인 시스템을 저희에게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할까요?”
- 우리 시스템을요?
“네. 얼굴 보고 말씀하시죠. 당장 가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그리고 큰 눈을 껌뻑이며 나를 보고 있는 이진성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 팀장님 바빠요?”
“아뇨. 괜찮습니다.”
“잘됐네. 저랑 미팅 좀 가요.”
“예?”
“콜드 체인 업체인데 가서 얘기 좀 들어 보려고요. 괜찮죠?”
“네. 그야 뭐…….”
이 팀장은 옷걸이에 걸린 옷을 입고 책상 위의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가 운전하는 사이, 가져온 태블릿으로 튜나월드의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홈페이지에는 오직 참치에 관한 얘기뿐.
콜드 체인에 대한 언급한 한 줄도 없었다.
운전을 하던 이 팀장이 태블릿의 화면을 보고 물었다.
“콜드 체인 업체 가신다면서, 왜 참치를 보세요?”
“같은 업체라네요.”
“혹시 점심에 봤던 그분이요?”
“네. 맞아요.”
“와, 세상 좁네.”
“오늘 점심에 만나지 못했어도, 어차피 만났을 겁니다. 서로 필요한 게 있을 테니까요.”
* * *
영등포에 허름한 3층 건물 앞.
오래된 슬레이트로 대충 담을 두르고, 벽에는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했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나는 창문 밖을 둘러보며 이 팀장에게 물었다.
“여기 맞아요?”
“네. 주소는 여기가 맞아요. 밤에는 귀신 나오겠는데요?”
“낮에도 나오겠네요. 일단 가보죠.”
차에서 내려, 김종환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원지훈입니다.”
그러자.
건물 2층의 창문이 열리고 김종환 대표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 올라오세요!
“네. 올라가겠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언제 청소를 했는지, 음식점 전단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여긴 청소 안 하나?”
이 팀장이 툴툴댔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2층 김종환의 사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나를 발견한 김종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누추하죠?”
“바쁘시면 그러실 수 있죠.”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라 그래요. 일단 앉으세요.”
그는 가죽이 닳아 누렇게 변한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와 이 팀장이 자리에 앉자, 정수기에 물을 받아 믹스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커피 괜찮죠?”
스냅백에 힙한 스타일.
그의 스타일만 보면 노출 콘크리트의 세련된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일할 줄 알았는데…….
“네. 좋습니다.”
직접 커피를 타온 김종환은 맞은편에 앉아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콜드 체인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네.”
“흠……. 근데 좋은 답을 드리지 못하겠군요. 사실은 저희도 아직 적용을 못 하고 있어서요.”
“왜죠?”
“비용 때문입니다. 영하 30도 이하까지 버텨주는 아두이노 카트는 꽤 비싸더라고요. 다른 보급형 칩들을 써봤는데 3시간도 버티지 못합니다. 외관을 보강하자니 제대로 된 온도를 측정할 수 없고…….”
“예산은 얼마나 잡으면 될까요?”
“차 한 대당 750만 원 정도는 잡아야 할 겁니다.”
마켓 프레시의 1톤, 5톤, 8톤 차량은 대략 240여 대.
전부 다 설치한다면 비용은 20억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잘만 설득하면 충분히 받아 낼 수 있는 정도이다.
나는 김종환이 건넸던 종이컵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들었다.
<콜드 체인에 관심 있는 업체가 다 있네.>
<유지보수비를 받아서 고정적으로 뽑아낼까?>
<그러다 거절하면?>
<대출 이자도 내기 빡빡한데.>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도 팔지 못했구나.
하긴, 대부분은 보험사나 운송 기사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트럭 한 대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할 회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씩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전 최종 결정권자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좋은 제안을 주시면 그걸로 윗분들을 설득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
“어떤 업체가 IOT 콜드 체인에 관심을 가질까요? 3PL? 아니면 에이마켓? 이미 대표님도 많이 알아보셨잖아요.”
트럭 한 대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할 회사가 있을까?
아니, 없다.
대부분이 보험사나 운송 기사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훌륭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쓰지 못하는 김종환.
그에게 난 어둠을 벗어날 유일한 동아줄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김종환은 종이컵을 내려놓고, 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를 꼈다.
“원 부장님 많이 변하셨네.”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좋습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든 600 이하로 맞춰 보겠습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