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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38화 (38/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38화>

39. 들어와서 직접 설명하세요

나는 주말에 잠을 몰아 잔다.

토요일 오후 2시.

간신히 눈을 떴다.

침대 옆의 시계를 보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 세 통과 한 통의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전화는 김태하.

메일은 신선식품팀의 도재문 대리였다.

먼저 메일을 확인했다.

보낸 시간은 새벽 4시 32분.

이때까지 작업한 것인가?

태블릿으로 메일 내용을 확인하며 김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 보통 사람이라면 여보세요나 무슨 일이야 하고 묻지 않을까?

“그래. 알았어.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 잘하네. 앞으로 전화할 때는 그렇게 해.

“그래 그러면 끊을게.”

- 야! 야 원지훈!

전화를 끊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태하를 놀려 먹는 것은 요즘 내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일이다.

그는 항상 도전을 해 오지만, 번번이 당하기만 했다.

“왜?”

- 아니, 후……. 오늘 시간 되면 잠깐 볼까? 오랜만에 밥도 먹고 옷도 좀 사려고.

“네 여친은?”

-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와. 그래서 오랜만에 친구 좀 챙기려고.

“가면 뭐 해 줄 건데?”

- 싫으면 오지 말든가.

가끔은 밀고 당기기를 해 줘야 한다.

너무 놀려먹기만 하면, 진짜로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김태하에게 말했다.

“5시. 괜찮아?”

- 응. 그럼 이따 아웃렛에서 보자.

“아웃렛? 데리러 안 오고?”

- 후……. 알았어. 데리러 갈 테니까. 전화하면 빨리 내려오기나 해.

“오케이.”

전화를 끊고 도재문 대리가 보낸 첨부 파일을 열었다.

그의 제안서는 한 명의 MD가 모든 상품을 관리할 수 없으니, 엑셀로 계산식을 만들어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유통기한을 기준으로 노출 순위와 할인 이벤트의 진행.

같은 상품군의 판매 수량 예측.

제품의 사입 시기 예측.

심지어 회원의 구매와 페이지 이동 예상까지.

이 데이터를 응용하면 할 수 있는 게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안서에 추가할 내용을 적어 놓고, 엑셀 파일을 열었다.

엑셀의 신인가?

도 대리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데이터를 직접 만들어 놨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계산식들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와……. 이거 물건이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엑셀의 내용은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다.

현재 마켓 프레시의 신선식품 폐기율은 7~10%.

일반 대형 마트의 폐기율은 2~3%로 상당히 큰 수준이다. 이는 100% 사입 정책 때문이지만, 소비자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사입 정책을 포기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보완하기 위해 빅 데이터를 통해 판매를 조정하고.

사입 수량을 예측한다라…….

나는 침대에 엎드려, 그가 만든 제안서 파일을 보완했다.

어느덧 4시 30분.

김태하의 전화를 받고 태블릿을 든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드라마 보냐?”

“…….”

나는 그의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고,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김태하는 내가 보는 태블릿 화면을 힐끔 보고 미간을 구겼다.

“미쳤네. 미쳤어. 주말에도 일이야?”

“이게 좀 재미있어서. 너 신선식품팀에 도재문 대리 알지?”

“새까맣고 키 작은 친구?”

“응. 그 친구가 보내온 제안서랑 데이터인데, 이거 정말 신선하네.”

“신선식품팀이니까 신선하겠지. 간다!”

김태하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액셀을 힘껏 밟았다.

토요일 아웃렛은 지옥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기 일쑤였고, 명품관에는 길게 줄이 서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네.”

내 탄식에, 김태하는 나를 잡아당기며 신이 난 표정으로 답했다.

“코리아 세일 페스타 하잖아.”

“그래?”

“너는 코트나 점퍼 하나 안 사? 쌀 때 빨리 장만해 놔야지.”

“입을 거 많아.”

“태블릿 좀 집어넣고! 야, 일단 저기 먼저 가보자!”

김태하와 쇼핑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평소 옷을 잘 입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패션에 민감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고 또 입고.

다른 매장으로 가서 또 입어 보며 보통의 여자들보다 심했다.

나는 김태하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틈틈이 도재문 대리의 파일을 수정했다. 옷걸이에 옷을 꺼내 앞뒤로 살펴보던 김태하가 물었다.

“이거 어때?”

“좋아.”

“이건?”

“더 좋아.”

“그럼 이건?”

“더더더 좋아.”

“보지도 않고 뭐가 좋아? 저걸 그냥.”

나는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그에게 질문했다.

“태하야. 우리 회원 로그에 몇 달까지 구매 데이터 저장하는지 알아?”

“글쎄, 한 6개월?”

“6개월이라……. 음. 그 이상은 무리일까?”

“그건 나 말고 개발팀에 물어봐야지.”

“장바구니나 찜하기 같은 건 얼마나 저장할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거 잘하면 DA도 회원에 맞게 노출할 수 있겠는데? 어때? 괜찮겠지?”

김태하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네이비색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입어 봐, 너 네이비 잘 어울리잖아.”

“잠깐만. 수정한 거 저장만 하고.”

“태블릿 내려놓고!”

김태하는 내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가로채고, 내 손에 코트를 쥐여 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코트를 대충 걸쳐 입고 태블릿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태하는 고개를 좌우로 틀면서 보다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셔츠 한 장을 꺼냈다.

“이거랑 같이 입어 봐. 맨투맨이랑 전혀 매칭이 안 되잖아.”

“태블릿 내놔!”

“입고 오면 줄게.”

나는 셔츠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팀장님?”

“연두 씨가 여긴 웬일이야?”

“아빠 생신 선물 좀 사려고요.”

“아 그래? 지훈이, 아니 원 부장도 왔는데.”

“그래요? 그럼 부장님한테 아빠 셔츠 좀 골라 달라고 해야겠네요.”

“걔가 옷을 골라줘? 연두 씨.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왜요?”

나는 김태하가 골라준 옷을 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하연두가 고개를 숙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응 연두 씨, 아버지 선물 고른다고?”

“네. 부장님 그 코트 잘 어울려요.”

“이거? 아……. 그래 고마워. 연두 씨, 여기 태하 팀장도 옷 사러 왔거든, 같이 다니면서 아버님 선물 골라 달라고 해 봐. 얘가 패션 리더라서 잘 골라 줄 거야.”

“네?”

“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태하야, 잘할 수 있지?”

나는 탈의실로 들어가 입고 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김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디 가게?”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가로채서, 옆구리에 꼈다.

“미안. 급한 일이 갑자기 생겨서.”

“무슨 급한 일?”

“내가 궁금한 건 못 참잖아. 알지? 미안 연두 씨! 김태하, 잘 골라줘야 한다! 알았지?”

나는 멍한 표정의 둘에게 손을 흔들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도재문 대리! 어디예요? 집인가?”

- 아니요. 사무실입니다.

“사무실? 주말인데 왜?”

- 일이 좀 있어서요.

“마침 잘됐네. 몇 시까지 있을 건가요?”

- 글쎄요. 하는 데까지 해 봐야죠.

“식사는? 내가 물어볼 게 좀 있어서 그런데. 같이 밥 먹을까요?”

- 네?

“지금 갈게요. 초밥 괜찮나? 아니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 초밥 좋아합니다.

“오케이 지금 갑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   *   *

조용한 사무실.

도재문 대리는 홀로 앉아 엑셀과 씨름 중이었다. 나는 초밥을 그의 책상 구석에 내려놓고 옆에 있는 의자를 꺼내 앉았다.

“오셨어요?”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도재문 대리.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머리는 감지 않은 것처럼 부스스했다.

심한 거북목 때문인가?

그는 항상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옥상에 정 팀장에게 혼이 날 때도 그랬고, 어제와 오늘 나를 봤을 때도 그랬다.

나는 한 손을 올려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 그가 작업하던 모니터를 바라봤다.

빽빽이 숫자들이 적힌 엑셀 문서.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와, 숫자들이 뭐 이렇게 많아? 일단 먹고 해요.”

“잘 먹겠습니다.”

“아 참, 도 대리가 보내 준 파일 보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는데. 상품군별로 예상 판매 수량 뽑아냈잖아요. 이건 우리 데이터만 가지고 계산한 건가?”

“네. 맞습니다.”

“오픈 초기랑 지금이랑 회원 패턴이 많이 다르잖아. 이건 어떻게 계산했어요?”

“초기 데이터를 현재 데이터랑 비교해서 똑같은 비율로 계산해 봤습니다.”

“오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이건 어떻게 잡은 거예요?”

내 질문에, 도 대리는 신이 나서 답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가 낸 의견에 박수를 치며 맞장구를 쳤고,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도재문 대리가 슬슬 피곤해하는 것이 보였다.

“언제 나왔어요?”

“사실……. 안 들어갔습니다.”

“그럼 금요일부터 계속?”

“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요.”

씁쓸한 표정으로 웃는 도재문 대리.

나는 주머니에 있는 카드를 꺼내, 그의 키보드 위에 올려놨다.

그때, 도재문 대리의 생각이 들려왔다.

<후……. 또 까였네.>

<맞다. 능이 유통기한 이틀 남았지? 단가 빨리 낮춰야겠다.>

<홍매실 기한 체크해야지.>

<할인 컨펌받아야 하는데, 팀장님 어디 가셨지?>

<난 좋기만 한데……. 팀장님은 왜 그러실까?>

<이번 제안서는 컨펌받을 수 있을까?>

<정말 읽어 보셨을까?>

잠깐 키보드를 스쳐서 들은 생각들이 이 정도인가?

매번 팀장에게 컨펌을 받아야 하는 현재의 시스템.

이는 잘못된 시스템이다.

팀장이 자리를 비우거나 컨펌이 늦어지면, 손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도 대리에게 말했다.

“이걸로 택시 타고 들어가요.”

도 대리는 신용카드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개인 카드인데……. 잘못 주신 거 같은데요?”

“그걸로 타고 가요. 주말에 법인카드 긁히면 좀 그래서.”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그냥 타고 가요.”

“…….”

내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도 대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굶지 않으니깐 걱정하지 말고요. 그럼 먼저 갑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 뒤로.

“고맙습니다. 부장님!”

도재문 대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   *

월요일 오전.

일찍 출근한 도재문 대리가 내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카드를 꺼내 놨다.

“감사합니다.”

“집이 많이 머나 보네요?”

토요일 밤에 온 문자 메시지, 3만 8천 원.

도재문 대리는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씩 웃고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토요일에 그가 했던 생각들이 들려왔다.

<팀장님이 봐 주실까?>

<범준이랑 동현이 상품들도 체크해 줘야 하는데.>

<엑셀 계산식만 만들어놔도 다들 편하게 쓸 수 있겠지. 일단 팀원들만 돌려야겠다.>

그의 목표는 계산식을 만들어 둔 엑셀로 팀 동료들이 편하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다.

모든 데이터를 자동으로 집계하고, 시스템이 알아서 움직이길 원한다.

나는 씩 웃으며, 만들어 둔 제안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좀 수정했는데, PPT 좀 확인해 줘요.”

“네?”

“이따 3시에 사업부 회의할 거니까. 들어와서 직접 설명하세요.”

“제가요?”

“그럼 내가 할까? 아니면 내용도 잘 모르는 정 팀장님한테 하라고 할까요?”

“아……. 아닙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도 대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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