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36화>
37. 지가 만질 사이즈가 아니잖아!
이른 아침.
사무실로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노인과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
그들의 옆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박승하 팀장이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아이는 우리 사무실이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이리저리 둘러봤다.
“누구죠?”
마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박승하 팀장이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난 그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익명의 제보자와 아버지.
완도에서 전복을 양식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딸.
나는 마 팀장에게 따로 답하지 않고.
입구에 서 있는 박승하 팀장에게로 걸어갔다.
“전략기획부에는 다녀오셨습니까?”
“아니요. 그전에 본인의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먼저 데려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아이는 김민정 팀장의 이름이 박힌 자리로 가서 한참을 서 있었다.
김민정 팀장은 아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누구시죠?”
“김민정 팀장님이세요?”
“네. 제가 김민정인데요?”
“정말 김민정 팀장님이 맞으세요?”
“네. 맞아요.”
“정말……. 정말이죠?”
아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버티기 힘들었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노인.
그는 아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영문도 모르는 이들의 행동에 부서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나는 그들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이 아닌.
허공에 손짓하기 시작했다.
“어……. 어…….”
그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허공에 대고 손짓했지만, 우린 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의 움직임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최진영.
이런 상대에게 사기를 친 것인가?
힘없고 나약한 이들에게 돈을 요구한 것인가?
멍하니 서 있는 내 옆으로 박승하 팀장이 다가왔다. 그리고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아이의 교복 치마 위로 덮어 줬다.
“유정 양.”
낮게 깔린 박승하 팀장의 목소리.
아이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사무실을 떠나고.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허리를 굽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대충 흘겨 쓴 글씨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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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생물로 팔기는 어려우니까 냉동 먼저 갑시다.
무조건 상단 노출하면 3일 만에 완판이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마켓 프레시 유아동 파트 팀장인데 잘 안 되면 죽이나 이유식 회사에 한 방에 넘겨드릴게.
따님한테 물어봐요. 마켓 프레시가 얼마나 잘나가는데.
요즘 한국에서 마켓 프레시 모르면 간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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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는 일방적인 답변만 적혀 있다.
아마 말을 하지 못하는 노인과 대화하기 위해 최진영 대리가 종이에 글을 쓴 것 같았다. 그리고 노인은 이를 계약서처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종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유정이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이번에 거래를 트면, 내년, 후년에도 쭉 간다 했으니까. 우리 유정이 대학도 보내고, 시집도 보낼 수 있어.>
<유정아 아부지가 다 알아봤어. 이번엔 정말 믿어도 돼.>
<괜히 팀장님 난처하게 하면 안 돼. 얼마나 좋은 분인데.>
<늦어지나? 냉동 보관비도 비싼데.>
몸이 부르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이들에게 지난 시간은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그때, 김민정 팀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분들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런 분들한테…….”
나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복 샘플 받은 게 언제입니까?”
“일주일 전이요.”
“냉동이었죠?”
“네.”
전복을 냉장으로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5일.
그것도 좋은 냉장 시설에서나 가능하다.
5일이 지나면, 냉동으로 보관해야 하며 가격도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얼마나 된다고 들었습니까?”
“10톤입니다.”
“……!”
“10톤. 확실합니다. 너무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복은 양식의 과정에서 벤더들과 미리 계약하곤 한다.
이는 냉동이 아닌, 생물의 상태로 파는 것이 가장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김민정 팀장이 확인한 전복은 냉동이었고.
최진영 대리의 글에도 냉동에 신경 쓰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는 최고가로 팔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냉동 보관 기간은 최소 7일.
그것보다는 제품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나는 가공식품팀의 파티션 안으로 들어가, 김태하 팀장을 불렀다.
“태하야.”
“응?”
“나 좀 도와줘야겠다. 같이 가자.”
김태하는 내 표정을 보고, 아무런 말 없이 옷걸이에 걸어 둔 상의를 걸쳤다.
그리고 나를 따라서 15층 전략기획부 사무실로 들어섰다.
* * *
전략기획부 사무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최 대리의 책상에 있던 집기들이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고, 양 부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옆에서 서성대기만 했다.
“무슨 일이야?”
영문을 모르는 김태하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물었다.
“최진영이가 김민정 팀장을 사칭했어.”
“사칭?”
“저 노인에게 팔아주겠다고 접근해서, 돈을 뜯어낸 것 같아.”
“이런 미친. 요즘이 어떤 시댄데? 후……. 저 개새끼를 내가 진짜!”
김태하는 주먹을 올리며, 휘두를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나는 한 손을 내밀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 마.”
“놔! 내가 저 새끼를 그냥!”
“너만 화가 풀린다고 끝이야? 그건 감사팀에 맡기고 우린 우리식대로 정리 좀 하자.”
김태하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며 주먹을 내려놨다.
“무슨 정리?”
“죽 프랜차이즈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지?”
“응. 그쪽 BM(브랜드 매니저)이랑 동호회에서 자주 만나. 너 설마?”
“맞아. 그쪽에 냉동 전복 좀 확인해 줘. 들어갈 구멍이 있는지.”
“상태는?”
“이제 확인해 봐야지.”
“그럼 물량은 얼마나 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10톤 정도는 되는 거 같아.”
김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10톤? 최진영 저 새끼가 미쳤네. 미쳤어. 지가 만질 사이즈가 아니잖아!”
“얼마나 받아줄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줘.”
“그래. 일단 확인해 볼게.”
“그리고 정 팀장한테 말해서 팀원 중 한 명 완도로 내려보낼 준비 하라고 전해 줘. 최대한 빨리.”
“알았어.”
김태하는 말을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안절부절못하는 양 부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양 부장님.”
내가 온 것도 못 봤나 보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이요.”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체크했어야 하는데.”
“그건 저 부녀에게 말씀하시고, 다른 일을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다른 일이요?”
“미국이나 캐나다 쪽에 전복 수출이 가능한 곳이 있는지 찾아봐 주세요.”
“제가요?”
“미안하다고 말로만 사과하지 마시고, 미안하면 직접 행동으로 보이셔야죠.”
“그……. 그야.”
“시간이 없습니다. 제조, 유통, 커머스…….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일단 가능한 수량과 일정 잡아 주세요. 제품 상태와 판매가는 내일 오전 중으로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팀 직원들이 최진영 대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범인을 연행하는 것처럼 데려갔다.
이를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양 부장.
나는 그를 무시하고, 조금 전 주웠던 종이를 박승하 팀장에게 내밀었다. 박 팀장은 내가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뭡니까?”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박승하 팀장은 말없이 종이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팀장님. 잠깐 저 부녀와 대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지금이요?”
“네.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는 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
“내가 아버지한테 뭔가 말을 좀 하고 싶은데, 전해 줄 수 있어?”
“그냥 얘기하세요. 아부지도 입 모양을 보고 알아요.”
“그래. 그럼 아버지의 말을 좀 전달해 줄 수 있겠어?”
“누구세요?”
“이 회사 다니는 사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에게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하기 시작했다.
“전복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상태는 어느 정도입니까?”
내 입 모양을 물끄러미 보던 노인이 손짓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물을 훔치고, 노인의 수화를 내게 전해 줬다.
“냉동 들어간 지 한 달이 좀 지났고요. 크기는 6미에서 12미까지 다양해요. 12미 제품들은 생물 때 팔 수 있었는데, 수협 담당자와 얘기하다가 늦어졌어요.”
“그래서 전부 냉동으로 돌린 겁니까?”
“예. 맞아요.”
“창고는 어디에 있습니까?”
“수협 창고를 임대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수협의 창고라면 매일 들어가는 임대료는 비쌌겠지만, 제품은 잘 보관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정이 맞지?”
“네.”
“아저씨랑 아저씨 친구들이 뒷일은 어떻게든 해 볼게. 유정이는 아버지 모시고 돌아가서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
나는 주머니에 있는 명함을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 줬다.
“아저씨가 맨날 전화할게.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 그렇게 할 수 있지?”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팀장님!”
내가 사무실로 올라가려고 할 때, 박승하 팀장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네?”
“도와주시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여긴…….”
“회사라고요?”
“네.”
“그냥 공짜로 도와주겠다는 거 아닙니다. 우리도 정당한 마진 붙여서 판매할 겁니다.”
“…….”
“MD 사업부는 돈이 안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박승하 팀장의 어깨를 툭 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 * *
며칠이 지나.
최진영 대리에게 구속 영장이 떨어졌다.
그는 그동안 받아왔던 리베이트와 이번 부녀의 리베이트 건에 대해 모두 시인했다. 회사는 그를 해고했고, 검찰은 다른 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며, 구속 수사를 이어 갔다.
회사는 충격에 빠졌지만, MD 사업부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샘플 보내놨고, 죽 프랜차이즈에서 최대 2톤까지 받아 주기로 했어.”
김태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나마 내장 분리하고, 슬라이스 쳐놔서 다행이야.”
“단가는?”
“내가 누구야? 이거 메이드 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힘들게 키워 온 전복이 폐기 직전까지 가자,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복 손질을 도와줬다고 했다.
- 원 부장님! 캐나다에 3톤 정도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지금 계약서 초본이 들어왔고, 컨펌만 떨어지면 내일 당장 배 태울 수 있습니다.
양 부장의 메시지.
그는 이번 일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무래도 자기 부서에서 생긴 일이라, 어떻게든 해결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다른 팀장들은 그동안 거래해 왔던 제조 회사들에 나머지 물량을 조금씩 나눠서 납품하기로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서류들을 점검하고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유정아. 아저씨 얘기 잘 들어. 내일부터 3일 동안 수협 창고로 차량이 들어갈 거야. 아버지 모시고, 꼭 제품 나가는 거 확인해야 해. 우리 쪽에서 직원 한 명이 내려갈 건데. 그래도 꼭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전해 드려.”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미안해. 아저씨가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 저…….
“응?”
- 아저씨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보내드려도 될까요?
“안 돼. MD건 벤더건 그런 거 받으면 난리 나. 혹시나 다른 사람이 요구해도 절대 주지 말고.”
- 알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저씨 명함에 주소로 보내드릴게요.
며칠 후.
유정이에게서 온 택배 상자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뭐야? 빨리 뜯어 봐!”
김태하가 재촉했고, 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내 전화번호와 여자아이의 얼굴이 새겨진 십자수.
문방구에서 샀을까?
아주 오래전 유행했던 그 모양이다.
“예쁘네. 아주! 아주 예쁘네. 색감도 좋고. 덕분에 우리 부장님 차가 아주 고급스러워지겠어. 하핫.”
“…….”
“아이 정성을 생각해서 꼭 운전석에 붙여 놓고 다녀. 내가 자주 확인하고 없으면 유정이한테 바로 전화한다!”
김태하는 키득거리며, 내 엉덩이를 툭 치고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