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35화>
36. 라면 좀 끓여 주라
라면 받침이라…….
그래서 이 안에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이 생각들은 정말 횡령과 관련이 있을까?
토막의 생각을 무조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쩌면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기억일 수도 있다.
나는 결재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우 싱거워. 물이 너무 많았나?>
<제안서만 마무리하고 가자.>
이 결재판을 사용한 사람이 얼마 없나 보다.
많은 사람의 생각이 담겨 있지는 않았고, 횡령에 관한 기억 또한 더는 들리지 않았다.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박승하입니다.
“예 팀장님.”
- 유모차가 판매된 중고 거래 사이트를 찾았습니다.
유모차를 찾았다는 것은 익명의 제보가 사실이라는 말.
누군가 진짜 돈을 받고, 고가의 제품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정말 김민정 팀장이 그랬을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도 엉성하다.
그럼 결재판에서 들려왔던 생각은 누구의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거래자가 누군지 찾으셨습니까?”
- 일단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 아이디 조회를 요청해 놨습니다.
“언제쯤 결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 내일이면 답이 올 겁니다.
“저 팀장님! 혹시 제보자를 찾을 방법은 없을까요?”
- 로그 데이터에서 게시판 작성한 아이피와 회원 접속 아이피를 찾아 달라고 개발팀에 요청해 놨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 그것도 내일 오전에 나올 것 같습니다.
제보자라도 찾으면 속이 후련할 텐데.
“알겠습니다.”
결재판은 탕비실에 있었다고 했다.
그럼 그곳에 다른 생각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탕비실로 향했다.
하지만 안에서 잠가 놨는지, 문고리를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쿵쿵쿵!
“안에 누구 있습니까?”
내가 소리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얼굴이 상기된 김태하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를 무시하고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이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태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희 아직도 여기서 연애하냐?”
“하……. 진짜.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
“일부러 소리친 거잖아!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아니. 전혀 관심 없거든. 비켜 봐!”
나는 김태하를 밀어내고, 안에 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만지기 시작했다.
<커피 떨어졌네?>
<맞다. 오늘 해정식품 발주 넣어야지?>
<정근택 이 바보 같은 놈.>
<오늘까지 판매 못 하면 재고 생기는데…….>
<3시부터 할인 때려야겠다.>
탕비실을 이용한 MD 사업부 직원들의 생각들.
하지만 어떤 물건에서도 결재판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른 물건들을 계속해서 만져 나갔다.
그러다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탕비실에 라면을 끓였을까?
탕비실에서 전자레인지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화재의 위험 때문에 화기는 들이지 못하도록 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멀뚱멀뚱 서 있는 김태하를 불렀다.
“태하야!”
“응?”
“나 라면 좀 끓여 주라.”
“라면?”
“응. 어떻게 끓여?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지는 않을 거 아냐!”
“내가 하다 하다 부장님 라면 심부름이나 하고 어휴……. 진짜 회사를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김태하는 툴툴대며, 탕비실 구석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내 왔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휴대용 버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잠깐!”
“또 뭐? 깍두기라도 담가 주랴? 자기야 봤지? 내가 이렇게 살아. 저 원지훈이 악마 같은 놈이 나를…….”
“버너가 여기 왜 있어?”
“몰랐어? 최 팀장이 가져다 놨잖아.”
“최 팀장이?”
“그래 전에 몰래 가져다 놓고, 다시 안 가져간 거야. 근데 왜?”
나는 김태하를 밀치고.
그가 꺼낸 버너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달걀 좀 사 올걸.>
<라면은 역시 진라면이지.>
<손흥민 경기 시작하겠다.>
<야무지게 먹어야지!>
그리고 버너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마성근, 이 꼰대 새끼가 일부러 뺑이 돌리나 본데? 두고 보자. 내가 너 가만 안 둔다.>
같은 목소리다.
현금으로 요구해야겠다던 그 목소리가 맞다.
마 팀장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특판팀 사람들의 목소리는 아닌데…….
“태하야. 여기서 라면 끓여 먹는 사람 많아?”
“왜? 라면 끓인 사람 집합이라도 시키려고?”
“장난치지 말고. 여기 버너 있는 거 아는 사람이 몇이나 돼?”
“아마 얼마 없을 거야. 나랑 최 팀장이랑, 이 팀장, 그리고 음…….”
김태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뭔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에 전략기획부 TF로 올라왔을 때, 알려 줬었어. 밥도 안 먹고 창고 돌았다고 해서.”
“전략기획부 누구?”
“최진영 대리. 걔가 배고픈 건 못 참거든.”
전략기획부 최진영 대리.
맞다. 결재판에서 들린 목소리는 탁하고 끈적한 그의 것이 분명하다.
나는 라면을 끓이는 김태하를 밀치고 탕비실 밖으로 나갔다.
“야! 어디 가? 어디 가냐고? 라면은?”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 * *
15층 전략기획부 사무실.
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최진영 대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최 대리. 나 좀 잠깐 보지!”
“네?”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잠깐 따라와.”
“여기서 하시죠?”
“괜찮겠어? 감당하기 힘들 텐데.”
최진영 대리는 심상치 않은 내 반응에, 자리에서 일어나 상의를 걸쳤다. 그리고 나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왔다.
“담배 피우나?”
“안 핍니다.”
“그래? 그럼 나는 좀 필게.”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내 정신 좀 봐. 휴대폰을 두고 왔네. 최 대리 혹시 휴대폰 가져왔어?”
“네.”
“그럼 나 전화 한 통만 써도 될까?”
최진영 대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에이, 패턴도 풀어 줘야지.”
최 대리는 휴대폰의 패턴을 풀어 나에게 다시 건넸다.
사실 패턴을 풀 필요는 없다.
나는 이 휴대폰으로 전화가 아닌, 그의 기억을 읽고자 했으니까.
<양 부장, 이 새끼는 맨날 나한테만 지랄이야.>
<또 야근이야? 에효.>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 그만두든가 해야지.>
항상 주인에게 붙어 있는 휴대폰.
이 안에는 많은 생각이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남의 휴대폰은 만지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엔 다르다.
횡령이다. 그리고 어쩌면 김민정 팀장이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나는 김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는 휴대폰을 최대한 오래 만지며, 최 대리의 생각들을 모두 듣기 위함이었다.
“김 팀장!”
- 누구? 원지훈? 최진영 대리 전화기 아니야?
“어 나야 나. 해창물산에서 온 벤더는 어떻게 했어?
- 해창물산? 그게 누군데? 누가 와?
“아……. 잡았어야지. 단가 잘 후려치면 잡았을 거 아냐?”
-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라면 안 먹을 거지? 은지 씨랑 내가 먹었으니까, 먹고 싶으면 직접 끓여 먹어.
“그래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근데 말이야. 삼정은 연락 없고?”
- 삼정? 걔네가 라면도 만들어?
“몰랐어? 아 이렇게 소식이 늦어서 어떻게 일을 해?”
나는 김태하와 통화하는 시늉을 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최 대리의 휴대폰에서 확실한 단서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MD 사업부로 간다고 할걸. 괜히 양 부장 따라와서 개고생이네.>
<전복? 이 새끼 돈 좀 있겠는데? 빨대 한번 꽂아 봐?>
<김민정 네가 나를 까? 내가 그동안 도와준 게 얼만데?>
<정진택한테 다이렉트로 가 볼까?>
<아 정진택이한테 어떻게 접근을 하지? 김태하한테 소개해 달라고 할까?>
이제 대충 감이 온다.
최진영.
돈을 이미 받아 놓고,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아 그래? 그럼 전략기획부에 협조 요청할 필요 없겠네?”
- 무슨 요청을 해? 아까부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약은 먹고 다니냐?
“그래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최 대리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최 대리 미안.”
“네?”
“최 대리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MD 사업부 김태하 팀장 알지? 그 친구가 다 처리했다고 하네.”
“뭘요?”
“그런 게 있어. 내일 말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나는 최 대리의 어깨를 툭 치고 곧바로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김민정 팀장을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팀장님. 시간이 없으니까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전략기획부 최진영 대리에게 청탁받은 제품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그냥 컨택만…….”
“소개요?”
“네. 최진영 대리는 그룹폰 전 직장이 한국의 키즈몰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업체들을 많이 알아서 자주 소개를 받았습니다. 제가 한국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요. 키즈 카테고리를 맡아 놓고선 아는 업체 하나도 없다는 게 부끄럽더라고요.”
지속적인 소개라…….
설마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닌가?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클 수도 있겠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최 대리에게 소개받은 업체들 제품들을 판매하셨나요?”
“예. 괜찮은 제품들은 판매했습니다. 물론 매출도 괜찮았고요.”
“팀장님. 최 대리가 리베이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리……. 리베이트요?”
김민정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어쩌면 이전부터 지속해서 받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지……. 지, 속? 그게 무슨 뜻이죠?”
김미영 팀장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말을 아직 잘 못한다.
“continuous, always 뭐 그런 뜻입니다. 하여간 그것보다 내일 감사팀에서 올라올 겁니다. 그쪽에서는 팀장님을 의심하고 있어요.”
“……!”
“최진영 대리가 이번에 챙긴 돈만 4천만 원가량 됩니다. 유아동이 아닌, 신선식품 쪽에 상위 노출과 특판까지 약속한 것 같더군요.”
“신선식품이요?”
“네. 뭐 짚이시는 거 있으세요?”
김민정 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얼마 전에 최 대리가 괜찮은 전복이 있다면서 신선식품팀의 정진택 팀장님을 소개해 달라고 했었어요.”
“그래서요?”
“제품 샘플 먼저 받아보겠다고 했는데, 상태가 좋지 못해서 정 팀장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혹시 유모차를 선물 받은 적은 없으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얼마 전에 고가의 유모차를 선물해 준다고 해서 거절했습니다. 아무리 친해도 받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최진영……. 이 새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요. 정말 거절하신 거 맞죠?”
“네. 하늘에 맹세코 절대 그런 짓 안 합니다.”
김민정 팀장은 단호한 표정으로 답을 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감사팀 박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찾았습니다.”
- 예?
“전략기획사업부 최진영 대리입니다.”
- 잠시만요. MD 사업부가 아니고 전략기획부라고요?
“네. 만나서 얘기하시죠. 어디십니까?”
-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완도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완도요? 혹시 제보자를 찾은 겁니까?”
-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보자가 완도에 있다는 걸?
“일단 다녀오시고, 내일 말씀하시죠. 어쩌면 생각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네요.”
-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