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34화>
35. 아는 분과 이름이 같네요
작은 회의실.
나는 김경일 대리와 나란히 앉아, 수원 왕 갈비탕의 벤더인 김재열 이사와 마주했다.
“이사님은 제가 아는 분과 이름이 같네요.”
원스몰의 대표였고, 마켓 프레시의 사외이사인 김재열 이사.
우연인지 몰라도, 둘은 이름과 직함까지 같았다.
“그래요? 제 이름이 워낙 흔해서요. 그분은 좋은 분인가요?”
“네. 아주 좋은 분입니다.”
“하하하 다행이군요.”
“얘기 들었습니다. BO푸드 연구팀이랑 새로운 레토르트를 개발하신다고요? 문제는 없으시죠?”
김 대리는 수원 왕 갈비탕 레토르트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그 결과 BO푸드 식품 연구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약간의 내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가 준비한 문서가 워낙 출중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김재열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예. 대리님이랑 부장님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뭐라고 하세요?”
“좋아하시죠. 이번엔 제대로 만들어질 것 같다면서, 기대가 크십니다.”
김경일 대리는 자신의 앞에 있던 제안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문제는 생산 수량입니다. 에이마켓처럼 일일 100개 한정으로 판매할 거라면 이런 제안도 안 드렸을 겁니다.”
“예. 물론이죠.”
“제안서 보시면, 이번 3분기에는 15만, 4분기에는 50만 팩 이상이 필요합니다.”
“50만이요?”
“네. 갈비탕 같은 제품은 4분기와 내년 1분기에 몰아쳐야 합니다.”
갈비탕과 같은 부류의 제품은 겨울철에 판매가 늘어난다.
그래서 김 대리가 더 재촉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재열 이사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제안서를 대충 넘겨 보며 자신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참……. 생각보다 쉽지가 않네요. 저희도 갈빗대 공급을 늘려 보려고 하는데…….”
“왜요?”
“어머니가 국내산만 고집하셔서요. 아시잖아요. 국내산 갈빗대 구하기 힘들다는 거요.”
레토르트에 값비싼 국내산을 쓰는 곳이 있을까?
아니, 아마 없을 것이다.
“흠……. 이거 난처하네요.”
“네. 수입해 와도 양념 발라 놓으면 비슷한데, 왜 그렇게 고집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음식을 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고집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믿고 응원해 줘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갈빗대 말고, 다른 재료들은 문제없나요?”
“월계수 잎의 단가가 좀 올랐더라고요. 소량으로 매입할 때는 몰랐는데, 대량으로 주문하려니까 너무 부담되네요.”
“식재료들은 어디서 가져오세요?”
“어머니가 10년 넘게 거래 중인 곳이 있어요. 몇 군데 알아봤는데, 거기가 물건도 좋고 단가도 괜찮더라고요.”
식당을 상대하는 곳과 공장을 상대하는 곳은 다르다.
벤더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그는 아직 제대로 재료 공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김 대리를 바라봤다.
“김 대리. 이사님한테 식재료 단가들 받아서 확인해 봐요. 국내산 갈빗대는 제가 알아볼게요.”
“아닙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딱 맞는 분이 있어서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김재열 이사에게 말했다.
“김 대리랑 같이 식자재 회사들 좀 찾아보겠습니다. 괜찮죠?”
“그래 주시면야 저야 감사하죠. 죄송합니다. 괜한 고집 때문에…….”
“이사님. 그건 괜한 고집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의견을 따르고 존중해 주세요. 그래야 제대로 된 제품이 나오게 됩니다.”
김재열 이사는 멀뚱멀뚱 나를 바라봤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 편을 들 줄은 몰랐나 보다.
그가 회의실을 나가고.
김 대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갈빗대는 어디서 구하시게요? 기존에 유통되던 게 있어서 갑자기 대량으로 구하시긴 힘들 텐데…….”
“참 우연인지, 인연인지 몰라도 육류 쪽에서 잘 나갔던 사람이 있어요.”
둘이 동명이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기억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재열 사외이사는 몸에 밴 고기 냄새를 뺀다며, 고기의 고도 꺼내지 못하게 했으니까.
“네?”
“김재열 사외이사님이 육류 유통을 크게 하셨던 분이거든요.”
“그래요?”
“그래서 원스몰이 처음 오픈했을 때, 육류만 깔아놨었죠. 일단 전화 좀 해 볼게요.”
“네.”
나는 자리로 돌아와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어디세요?”
- 응, 라운딩 중이야. 길어? 길면 이따 통화하고.
“아뇨 짧아요.”
- 뭔데?
“국내산 갈빗대 좀 구하려고 하는데. 아시는 분 있죠?”
- 야! 내가 고기의 고도 꺼내지 말라고 했지?
“초도 물량은 15톤 정도면 됩니다.”
- 야 원지훈! 뭐 어쩌라고?
“단가는 아직 정하지 못했고요. 역제안 받고 싶습니다. 아시죠? 마켓 프레시는 무조건 싸고 좋은 것만 취급하는 거?”
- 아 새끼. 진짜 한결같네. 몰라. 나 모르니까 알아서 해! 사장님 나이스 샷! 이번 퍼팅 진짜 예술이었습니다!
뚜우, 뚜우
전화가 끊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어떻게든 구해 올 것임을.
다음 날 오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김재열 사외이사는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힌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문자의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재열 이사님 소개로 연락드린 원지훈이라고 합니다. 최이성 사장님이시죠?”
- 얘기 들었습니다. 15톤이죠?
안 듣는 척하더니, 다 듣고 있었구나.
이게 김재열 사외이사의 스타일이다. 무심한 척 툭 던지는데, 연락을 해 보면 거의 다 메이드를 해 둔 상태다.
“네. 이번 달만 그렇고 다음 달부터는 늘어날 겁니다.”
- 그것도 들었어요.
“그럼 단가도 얘기 들으셨나요?”
단가 얘기를 하자,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 그 미친놈은 뭐 그렇게 단가를 후려칩니까? 부장님이 시킨 건가요?
“아뇨. 제가 어떻게 이사님을 시킵니까?”
- 하여간 그거 팔아서 얼마 남는다고……. 갈빗대 샘플 3킬로 퀵으로 보내니까 확인해 봐요.
“저희 주소는 아세요?”
- 강남구 삼성동이죠? 밤늦게 재열이 놈이 적어 놓고 갔어요.
밤늦게 직접 찾아가서 부탁까지 했구나.
대충 감이 왔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알아보고 뛰어다녔는지를…….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고, 곧바로 김재열 사외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 야! 끊어! 나 바빠!
“고맙다고요.”
- 간지러우니까. 그런 인사는 나중에 몰아서 해. 끊는다!
“알겠습니다. 좀 더 쌓이면 그때 몰아서 할게요.”
- 그래.
동명이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억이 났을까?
나는 미소를 짓고,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한쪽에 올려놨다.
* * *
늦은 오후.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원 부장님!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내부 감사팀의 박승하 팀장.
그와는 임원 회의 때 잠깐 인사를 한 것이 전부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시죠.”
나는 그를 따라 감사팀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방음벽의 회의실.
디지털카메라가 삼발이 위에 올려져 있었고, 작은 테이블 앞에 두 개의 철제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박승하 팀장은 카메라의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대쪽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놨다.
“뭡니까?”
“직접 보시죠.”
고개를 숙여 내용을 확인했다.
사이트의 게시판을 프린트한 내용으로, 아마 제보나 신고 쪽의 게시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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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김민정 팀장의 지속적인 요구에 어쩔 수 없이 2천만 원을 인출해 줬습니다.
상위 노출까지 약속했지만, 김 팀장은 돈을 받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현재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줄스 유모차 20대를 협찬하면 특판까지 지원하겠다 해서, 유모차 사입 비용만 3천만 원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특판은커녕, 아직 제품이 마켓 프레시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꼭 김민정 팀장에게 들어간 돈을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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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커머스의 MD는 3년 안에 강북에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래전 얘기다.
지금은 작은 선물이라도 받으면 난리가 난다. 심지어 회사에서는 제품의 샘플도 법인카드로 구매하라고 말할 정도다.
아버지의 얘기 같은데…….
왜 익명으로 제보한 것일까?
그리고 아버지는 왜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일까?
나는 내용을 모두 읽고, 고개를 들어 박승하 팀장을 바라봤다.
“왜 익명으로 제보한 걸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보 내용만 일방적으로 믿을 수 없어서 혹시 비슷한 얘기를 듣거나, 이번 일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 여쭤보려 했습니다.”
유아동 카테고리의 김민정 팀장은 최구열 이사의 라인이다.
그리고 미국 그룹폰 출신으로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한 사람이기도 하다. 성격 또한 조용해서,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과연 김 팀장이 뇌물과 3천만 원이 넘는 제품 협찬을 요구했을까?
익명의 제보 내용만 보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그럼, 줄스 유모차를 경품으로 사용하신 적 있습니까?”
“그 정도 고가의 제품이라면 기억해야 하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MD라면 횡령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잘 알 겁니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걸요. 근데 자기 이름을 보이며, 직접 횡령을 했다는 것이…….”
“그럼 이게 허위 제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 제보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흠…….”
잠시 고민을 하던 박승하 팀장.
그는 결심했는지, 내가 보고 있던 종이를 가방 안에 다시 넣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 팀원들은 중고 장터들이나 맘 카페들을 뒤져 보고 있습니다. 분명 고가의 유모차니 현금화한 근거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군요.”
박승하 팀장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다른 팀장들이나 내가 관여되어 있는지를 의심했고, 김민정 팀장의 부정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나.
박 팀장은 디지털카메라의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MD 사업부 사무실.
고개를 돌려, 유아동팀의 자리를 바라봤다.
수화기를 든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김민정 팀장.
그녀가 정말 횡령을 했을까?
그것도 바보처럼 자기 이름으로 직접?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
“부장님! 이번에 냉동 사입 건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아! 깜짝이야!”
마 팀장이 갑자기 검은색 결재판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결재판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안 주셔도 되는데.”
“네?”
“관리자 페이지에 올려 주시며, 전자 서명으로 바로 해 드릴게요.”
“아……. 그래요? 전 그래도 부장님께는 서면으로 보고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똑같아요. 이전처럼 관리자에 올려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마 팀장이 검은 결재판을 가져가려는 것을 재빨리 움켜잡았다.
“팀장님! 출력하셨으니까 일단 주세요.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하하.”
그리고 그때.
<매형 계좌로 받을까?>
<아니. 현금으로 요구해야겠다. 그게 안전하지.>
마 팀장이나 김 대리, 특판팀 직원들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리고 김민정 팀장의 목소리도 아니다.
탁한 남자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나는 뒤돌아 가는 마 팀장을 불렀다.
“마 팀장님!”
“예?”
“이 결재판 어디서 난 겁니까? 처음 보는 물건인데?”
“아……. 그거요? 탕비실 비품 중에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아무도 안 쓰는 거 같아서요.”
“그래요?”
MD 사업부는 전자 서명으로 모든 일을 진행한다.
이런 구닥다리 결재판을 회사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어떻게 이 결재판에 기억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목소리는 누굴까?
나는 검은 결재판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
“원 부장님. 탕비실에서 라면 드셨어요? 나 빼고 드셔서 맛있으셨어요?”
김태하 팀장이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라면? 그게 무슨 말이야?”
“받침은 다음 사람도 쓰게 좀 두고 오지, 그걸 그냥 가져오냐?”
“라면 받침?”
나는 내 손에 쥐고 있는 검은 결재판을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