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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30화 (30/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30화>

31.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

“직접 골라 볼래?”

“네?”

“입고 싶은 거 입으라고, 여기 있는 거 다 새것이고, 아마 너한테도 맞을 거야.”

“그래도 돼요?”

“어차피 입을 사람도 없는데 뭐. 마음에 드는 거 입고 나와 봐. 어울리면 선물로 줄게.”

김지영 이사는 드레스 룸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옷장에 걸린 남자 옷들을 하나씩 만졌다.

그리고 옷장 안쪽의 옷들을 만질 때 그녀의 생각들이 들려왔다.

<이건 정말 잘 어울리겠다.>

<얼굴이 밝아서 원색이 더 잘 어울릴 거야.>

<허리는 28 정도 되려나?>

누군가를 생각하고 산 옷들인가?

바깥쪽에 걸린 옷들과 달리.

안쪽에 걸린 옷들에서는 김지영 이사의 생각이 담겨 있다.

나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옷걸이의 옷들을 하나씩 스쳐 갔다.

그리고.

<10살이나 어린 애 데리고 무슨 생각하는 거야? 어휴 다 늙어서 주책이네.>

설마……

그리고 마지막에 걸린 베이지색 슈트를 만지자.

<지훈이 걔는 이런 거 입으면 확 살 텐데. 맨날 어두운 것만 입고.>

<이사할 때 도와 달라고 할까? 내가 뭐 하는 거지? 그런 꼰대 짓이나 생각하고. 아니지. 이건 그냥 친구로 하는 부탁이잖아. 그래도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얼굴이 밝은, 10살 차이, 28인치 허리.

그건 나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의 옷은 나를 생각하고 산 것이다.

허겁지겁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생각을 더 읽는 것은 왠지 실례인 것만 같아서 그랬다.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나도?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를 좋은 누나, 직장 상사로만 생각해 왔다.

가끔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김 이사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 입었어?”

문밖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뇨!”

“그래. 천천히 하고 와.”

나는 가장 어두운색의 티셔츠를 대충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똑똑!

열린 문 사이로 노크하는 하연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 손에 커다란 선물용 휴지를 들고 있었다.

“연두 씨?”

“이사님이 이사하시는데, 그냥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이사님이 이사하시는?

라임이 절묘하다.

덕분에 긴장이 풀리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스웩이 넘치는 몸짓으로 옷걸이에 걸린 스카프를 하나 풀어냈다. 그리고 하연두의 목에 걸어 주며 씩 웃었다.

“라임이 좋네요. 합격입니다.”

하연두는 목에 멘 스카프를 풀어내며, 눈을 크게 떴다.

“뭐 하세요?”

나와 하연두의 목소리를 듣고, 주방에 있던 김 이사가 다가왔다.

“어머, 연두 씨라고 했죠?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까 25층이라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고생하시는데 그냥 집에 있기 그래서요.”

“주말인데 그냥 쉬지.”

“아니요. 뭐라도 도와드려야죠. 들어가도 될까요?”

“그럼요.”

하연두는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내려놓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여긴 펜트하우스라 엄청 크네요.”

“연두 씨는 몇 층인데요?”

“13층이요. 저희 집은 여기 10분의 1도 안 될 거예요.”

“잘 왔어요. 이따 점심이나 함께하고 가요.”

“예. 사 주신다면 맛있게 먹겠습니다.”

하연두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그냥 팀의 막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김지영 이사는 내가 갈아입은 티셔츠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에이……. 밝은색을 입지? 왜 그걸 입었어?”

“이게 좋아서요.”

“넌 밝은색이 잘 어울려. 바지는 마음에 드는 거 없었어?”

“이게 편해요. 일해야죠. 일!”

남의 집, 더군다나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바지를 갈아입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을 들은 이상, 더더욱 그랬다.

차라리 만지지 말 것을…….

어쩌면 앞으로 쭉 그녀의 눈을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재빨리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같이 들어요. 같이!”

그렇게 1시가 훌쩍 지났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김지영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삿짐센터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것 같은 사람에게 말했다.

“저희 밥 좀 먹고 올게요.”

“예 그러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이제 해야죠.”

“근처에 좋은 식당 많아요. 꼭 맛있는 거 드세요.”

김 이사는 지갑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황급히 장갑을 벗고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아이고 안 그러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김 이사는 환한 미소를 짓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남자는 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하게 속삭였다.

“사모님이 아주 좋으신 분 같네요.”

“네?”

김 이사는 이 말을 못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내 옆에 붙어 있던 하연두는 들었나 보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사모님이 아니고, 회사 이사님이시거든요.”

“아……. 그래요?”

“네. 여긴 우리 팀장님이고요.”

“아 몰랐네요. 두 분이 워낙 친해 보이셔서…….”

“친하긴 뭐가 친해요?”

별일도 아닌데, 화를 내는 하연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 어때. 연두 씨 밥 먹으러 가자.”

“아닌 건 아니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갑자기 화를 내는 그녀를 말리며, 김지영 이사의 뒤를 따라갔다.

원형 테이블이 있는 중국집.

김 이사는 예고한 것처럼 각종 요리를 주문했다.

“주말까지 버려 가며 와 줬는데, 많이들 먹어요.”

“아……. 네네.”

김지영 이사는 원형 테이블을 살살 돌려, 가장 비싼 요리인 전가복이 내 앞으로 오도록 했다.

이전에는 누나이자, 회사 상사라 생각해서 편했는데…….

이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

“물이 어디 갔지?”

내가 물컵을 찾자, 옆에 하연두가 물잔에 물을 따라 내게 건넸다.

“여기요.”

오른손을 내밀어 물잔을 잡았다.

그러자 조금 전 하연두의 생각이 들려왔다.

<흥, 완전히 여시네!>

이건 또 뭐야?

하연두가 김 이사를 보며 한 생각인가?

왜 이런 생각을……. 설마 질투를 하는 건가?

아니다. 아닐 거다.

내가 도끼병이나 왕자병 따위에 걸린 것이다.

그래. 내 착각이다. 착각!

그리고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고 해도 이제는 알고 싶지 않다.

그냥 모르고 싶다.

나는 재빨리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오른손은 주머니에 집에 넣었다.

“팀장님 왼손잡이였어요?”

하연두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양손, 양손잡이야.”

평소 자주 써 왔기에, 이젠 왼손으로 젓가락질도 잘한다.

남의 지난 생각을 읽는 것.

이건 생각처럼 좋지만은 않다.

가끔은 지금처럼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일도 많았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생각들을 정리했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닌 그녀의 감정이고 내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다고.

혹시나 그녀가 먼저 다가오면 그때 생각하자고.

언제 한 생각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나서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했다.

그러니 이전보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여기 전가복 정말 죽이네요!”

“그래? 하나 더 시켜 줄까?”

“아니요. 이것도 많아요.”

김지영 이사는 커다란 전복 하나를 내 접시에 덜어 주며 환하게 웃었다.

오후 6시.

이삿짐센터의 직원들이 돌아갔다. 김지영 이사는 아직 남은 짐들을 둘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우리도 이제 좀 쉬자. 원 팀장, 연두 씨 오늘 고마웠어.”

“아닙니다.”

“지금 몇 시지?”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별로 안 늦었네. 배고프지? 맥주 한잔하고 갈래?”

옆에 있던 하연두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기 1층에 피맥집 있어요. 거기 피자 정말 맛있어요.”

“그래요?”

“저, 거기 피자 쿠폰도 있어요. 가실 거면 집에 가서 가져올게요.”

“그럼 술은 제가 살게요.”

“앗싸!”

하연두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김 이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는 씩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녀들을 따라갔다.

“그럼 난, 얻어먹기만 하면 되는 건가?”

“아니요! 1차 끝나면 팀장님이 노래방 쏘셔야죠.”

*   *   *

월요일 오전.

TF 팀원 모두가 아침부터 분주했다.

마 과장은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에 계약한 창고들을 위치를 표시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되겠죠?”

서울, 경기, 인천 지역 총 76개의 사설 창고들.

이 정도면 각 창고에서부터 2시간 이내로 배송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충분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긴 했죠. 그지 대성아?”

“예. 우리가 좀 열심히 뛰어다니긴 했습니다. 하하하.”

“이 지도를 보니까 괜히 뿌듯하고 뭉클해지네.”

김대성이 티슈를 꺼내 마 과장에게 건네자, 그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둘은 정말 쿵짝이 잘 맞는다.

“팀장님 보냉팩 3차 샘플 가져왔습니다.”

수정에 수정을 거친 보냉팩.

이번에 개발한 제품은 디자인과 실용성, 모든 것을 갖췄다.

나는 하연두가 건네는 보냉팩을 받아 들고 팀원들을 둘러봤다.

“이제 택배사도 끝났고. 최종 보고만 남았군요. 모두들 정말 수고했어요.”

내 말이 끝나자, 마 과장이 자신의 멜빵끈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름은 정하셨어요?”

“이름이요?”

“미사일 배송, 스피드 배송 같은 이름이요. 뭔가 확 오는 게 없을까요?”

“글쎄요. 확 오는 거라……. 밤에 배송하니까 밤 배송?”

“별론데요.”

“그럼 빠른 배송?”

“별로예요. 너무 평범해요.”

“그럼 뭐가 좋을까요? 별로라는 말만 하지 말고 좀 생각해 봐요. 대성 씨는 아이디어 없어?”

김대성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시크릿 배송 어떻습니까?”

“시크릿? 우리가 무슨 성인용품 팔아? 연두 씨는?”

“전 이전부터 생각해 둔 게 있는데요.”

“뭔데?”

“특별 배송이요. 뭔가 특별히 고객님께만 해 준다는 느낌 어때요?”

별로다.

차라리 밤 배송이 더 좋다.

“약한데. 뭔가 임팩트가 팍 오는 게 없을까?”

그때, 멀찍이 앉아 있던 정진택 팀장이 다가왔다.

그는 우리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빛 배송.”

“달빛 배송?”

“네. 잠들기 전 주문해도 아침에 바로 도착. 고객은 편하게 잠드는 데 우린 열심히 당신을 위해 뛰어다닌다. 이런 느낌이잖아요.”

정진택 팀장에 대한 기대가 너무 낮았었나?

그가 말한 달빛 배송은 너무도 신선하고, 입에 착 달라붙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마 과장에게 물었다.

“마 과장님은 어때요?

“달빛 배송 뭔가 시크하면서 새초롬하고 몽환적이면서 동양적이며…….”

더 들어 볼 필요가 없겠구나.

나는 고개를 돌려 김대성과 하연두에게 물었다.

“대성 씨, 연두 씨는 어때?”

“달빛 배송, 입에 착 붙는데요?”

“저도요!”

나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PPT 화면을 열었다.

“자, 다들 마무리 잘합시다. 마 과장님은 76개 사설 창고들에서 목적지까지 배송 나가는 동선 점검해 줘요. 새벽 시간대 교통량도 점검해 주시고요.”

“옛 썰!”

“대성 씨는 남양주 창고로 넘어가서, 상품 입고, 적치, 다스 스캐너까지 싹 수량 파악해 와. 하나라도 틀리면 죽는다! 알았지?”

“예! 며칠은 창고 근처에 여관방 잡아 두고 살다 오겠습니다.”

“좋아. 연두 씨는 사설 창고들 계약서, 택배사 계약서 2줄 이내로 싹 요약해. 할 수 있지?”

“삼 일 내로 끝낼게요.”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정 팀장을 바라봤다.

그는 초롱이는 눈빛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 팀장님은 스티로폼 박스, 보냉팩, 드라이아이스 등 절감되는 부분 꼼꼼히 계산해 주세요. 그리고 이름도 만드셨으니까, 이번 BI(Brand Identity, 브랜드 상표 이미지)도 디자인팀에 제작 요청하세요. 할 수 있죠?”

정진택 팀장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오케이. 내가 이래 보여도, 케임브리지에서 수학 전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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