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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27화 (27/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27화>

28. 난 서투른 쪽을 고를 것이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엠로지스는 잘 마무리했지만, 양 부장의 고집 때문에 사설 창고들의 계약은 쉽지 않았다.

그가 나와 함께 창고를 돈 것은 겨우 이틀.

매번 핑계를 대며 나갈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한발 물러나 계약서를 수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아직 내가 만족할 만한 계약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른 새벽.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나는 침대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양 부장과 최 이사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이럴 바에는 회사에나 가자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침 7시.

회사의 로비는 출근하는 사람 없이 청소 중인 아주머니들만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텅 빈 엘리베이터.

항상 사람이 꽉꽉 차던 곳인데…….

17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의 구석으로 걸어가 팔짱을 꼈다.

그때.

“같이 갑시다!”

누군가 닫히려는 문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신선식품팀 정진택 팀장.

정근영 대표의 외아들이자, 지난번 고구마 큐브 사건으로 회사 내에서 쥐죽은 듯 지내는 그였다.

정 팀장은 엘리베이터 안의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다음 거 타시게요?”

내 말에, 그는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색했는지,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왜 이렇게 엘리베이터가 느린지.

억지 사과를 받은 이후로 난 그와 가끔 인사만 나눌 뿐이었고, 어색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촤라라락!

적막이 가득한 엘리베이터.

바닥에 형형색색의 볼펜들이 떨어졌다.

아마 정 팀장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재빨리 쭈그려 앉아, 볼펜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모으는 게 취미라.”

볼펜을 모으다니…….

로열치고는 꽤 소박한 취미구나.

나는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떨어진 볼펜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뭐라고 하지?>

<아빠가 허락할까?>

<아빠가 싫어할 텐데?>

<그냥 아빠한테 물어보자.>

<아빠 표정이 안 좋네. 오늘은 그만두자.>

아빠, 아빠, 아빠, 아빠…….

저번에도 그의 물건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정진택 팀장은 완벽한 파파보이다.

대충 이해는 간다.

성공한 아빠와 모든 것이 부족한 아들.

그는 언제나 아빠의 관심과 질책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요.”

내가 볼펜 한 움큼을 건네자, 정 팀장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어제 소식 들었습니다.”

“네?”

“엠로지스 건이요.”

김지영 이사가 말했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뭘.”

“정말 잘하셨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 팀장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도 그를 따라 천천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8시 30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

마 과장은 일찍 출근한 내게로 다가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한 건 하셨다면서요?”

“네?”

“엠로지스요. 저한테 전화 주시지. 이렇게 혼자서만 영웅 되실 겁니까?”

“어디서 들으셨어요?”

“모르셨어요? 어젯밤 늦게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어요.”

마 과장은 내 마우스를 움직이며, 사내 게시판의 글을 보여 줬다.

익명으로 등록된 글이 조회 수 150을 훌쩍 넘어 있다.

누구지? 김지영 이사인가?

나는 궁금한 마음에 마 과장에게 물었다.

“누가 이걸 올렸을까요?”

“글쎄요. 회계팀에 김익명 씨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제가 가서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볼까요?”

나는 마 과장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마 과장은 내 등을 툭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농담. 하, 제가 설마 익명도 모르겠습니까?”

“아……. 이 농담도 개콘 스타일입니까?”

“오, 팀장님도 개콘 보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하여간 너무 하이 퀄리티라 못 알아들었습니다.”

마 과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김태하와 최충연 팀장이 손을 흔들며 내 자리로 다가왔다.

“여! 원지훈! 하루 만에 40억을 땡기다니. 완전 멋져브러!”

“수고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원 팀장님 얘기만 하네요.”

둘은 마 과장과 마찬가지로 사내 게시판의 글을 보고 온 것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부끄럽게 왜들 그러실까.”

“누가 엠로지스에 40억 배상을 받을 줄 알았겠어? 하여간 넌 타고난 진상 중에 진상이야.”

“고맙다. 아주 격한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자네 이 기회에 채권추심 한번 안 해 볼 텐가? 내가 떼인 돈이 좀 있어서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하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연애질은 잘 돼 가나 보지?”

내 말에 입을 꾹 닫는 김태하.

그리고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고 씩 웃어 보였다.

최충연 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철을 내게 건넸다.

“뭔가요?”

“창고 계약이 생각보다 늦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박 차장님이랑 제가 정리한 사설 창고 목록들입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함께 해 보자던 박차장과 체인마켓 출신 팀장들.

이들이 이렇게 바로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고맙습니다.”

“네. 전화는 이미 다 돌려놨고, 편하신 시간에 만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참, 이 팀장도 정리되는 대로 가져올 겁니다.”

나는 서류를 넘겨서 그들이 정리한 리스트를 확인했다.

빽빽이 적힌 사설 창고 목록과 특이 사항들.

제법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태하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한국에는 아는 데가 없어서. 시카고에 창고 크게 하시는 한국분이 있는데 그분이라도 소개해 줄까?”

“아주 고오맙다. 그래.”

김태하와 박 팀장은 그렇게 10분 정도를 떠들다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30분이나 늦게 출근한 양 부장도 사내 게시판을 봤는지.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원 팀장님. 어제 큰일 하셨다면서요?”

“그것보다 빨리 준비하세요. 오늘은 다섯 군데나 돌아야 합니다.”

“아……. 그게 제가 오늘 최 이사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또 핑계다.

양 부장은 어제도 저렇게 말했다.

“최 이사님이요?”

“네. 급하다고 어젯밤 늦게 전화가 와서요. 이거 어쩌죠?”

“오늘 약속은 어쩌라는 겁니까?”

“일단 오늘은 팀장님이 혼자 다녀오시고, 내일부터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양 부장님!”

“알아요. 알아. 근데 어쩌겠습니까? 상사가 까라는데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죠.”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양 부장.

이대로는 안 된다.

이들이 현장을 경험하고 거기에 맞춰 일하게 하려는 것은 내 욕심이었나 보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히죽거리는 양 부장을 노려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   *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 앞.

그녀의 비서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일찍 오셨네요.”

“이사님 계신가요?”

“네. 계십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던 김지영 이사.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어? 어제는 잘 들어갔지?”

“네.”

“사내 게시판은 봤어. 자작은 아닐 거고. 그거 누가 올린 거야?”

“이사님 아니셨어요?”

“난 아닌데?”

“흠……. 그것보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앉아. 차 한 잔 줄까?”

“아니요. 금방 말씀드리고 갈게요.”

김지영 이사는 소파의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는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 그녀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TF에서 전략기획부 식구들을 빼 주세요. 지금은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됩니다.”

“흠…….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이번 일로 그렇게 만들긴 힘들 거야.”

“이번 일이요?”

“엠로지스 건 말이야. 네 공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대표님이 최 이사를 설득하지는 않을 거야. 너도 잘 알잖아. 대표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도 했고, 최 이사 은근 고집 센 거.”

“저도 그걸로 어떻게 해 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회사 돌아가는 사정은 나도 잘 안다.

엠로지스 건을 해결했다고, 내 의견을 들어 줄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꽤 쓸 만한 명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최구열 이사.

그리고 그의 직속인 전략기획부.

그들은 적은 인원이지만, 회사 내에서의 입지는 탄탄했다. 김지영 이사도 명분이 없다면, 함부로 그들의 의견을 반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명분?”

“전략기획부 대신, MD 사업부의 정진택 팀장을 TF로 들이겠습니다.”

한쪽은 경험이 없어 일을 그르치게 하고.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이 서투르다.

둘 중 골라야 한다면, 난 서투른 쪽을 고를 것이다.

새로운 배송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데, 이를 그르치게 할 수는 없다.

김지영 이사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진택?”

“네. 정 팀장을 TF에 받겠다고 하면, 대표님이 직접 나서 주실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흠……. 정진택이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괜찮겠어?”

“뭐가요?”

“정 팀장하고 저번 사건 이후로 서먹서먹하지 않아? 그리고 걔 은근…….”

“은근 모른다고요? 아니요. 아예 대놓고 모릅니다.”

“알고 있었어?”

“냉장 고구마 큐브를 그렇게 무리해서 수입한 것만 봐도 알죠. 근데 양 부장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럴까?”

“네. 지금은 차라리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더 도움 될 거 같습니다.”

김지영 이사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대표님한테 얘기는 해 볼게.”

“고맙습니다.”

“아니 뭘. 그리고 원 팀장.”

“네?”

김지영 이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말에 뭐 해?”

“글쎄요. 딱히 하는 일 없는데요?”

“그럼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운전 이제 잘하시잖아요?”

“아니, 운전이 아니라 나 이사하거든.”

“어디로요?”

“회사 뒤의 오피스텔로. 매일 운전 1시간씩 했는데, 힘들어서 그냥 옮기려고.”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거절할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에 탕수육은 제공하시는 거죠?”

“물론이지. 거기에 전가복과 멘보샤도 얹어 주지.”

“그럼 콜이죠.”

“포장 이사라서 딱히 힘쓸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와서 잘하는지만 좀 봐줘.”

“네.”

*   *   *

이틀 후.

정 대표의 아들 사랑이 끔찍했던 것일까?

아니면 김 이사의 말이 먹혔던 것일까?

생각보다 답이 일찍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양 부장과 전략기획부의 부서원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마 과장은 짐을 싸는 최 대리의 옆으로 바짝 붙어 놀리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으면 남이라더니, 정들만 하니까 떠나네?”

“…….”

“그동안 어땠어? 할 만했어? 판교 창고 신 사장한테는 안부 전할게. 하하.”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최 대리는 마 과장이 깔고 앉아 있는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아이코. 이거 지금까지 진행한 업무보고서인가 보네? 근데 이것도 가져가야 해?”

“…….”

“가서 엄마한테 이르려고?”

“마 과장님! 말씀이 심하시군요!”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다 재미있자고 하는 농담인데. 안 그래 대성 씨?”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너무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긴 우리 대성 씨가 개그를 보는 안목이 좀 있네. 요새도 개콘 안 빼고 보지?”

“당연하죠! 일요일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개콘, 꼭 본방사수 해야죠.”

“금요일인데?”

“그……. 그래요?”

김대성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너 개콘 안 보지?”

“아닙니다. 봅니다!”

“이게 어디서 수작이야!

짐을 정리하던 최 대리가 마 과장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재미없으니까 그만들 하시죠.”

정리를 마친, 양 부장은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재미있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수고했다거나 고마웠다는 인사가 아닌, 재미있었다는 건.

“네. 저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양 부장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떠난 빈 책상에 뿌연 먼지가 앉아 있었다.

하연두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티슈를 뽑아 들고 그 자리들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연두 씨! 그냥 둬!”

“아니요. 너무 지저분해서요.”

“다음에 올 사람들이 닦을 거야. 그냥 둬.”

“다음에 올 사람이요?”

“응. MD 사업부에서 3명이 더 올 거야.”

텀블러의 음료를 마시던, 마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누구요?”

“정 팀장이랑 그가 데려오는 식구들 둘이 더 올 겁니다.”

“정진택 팀장이요?”

“네.”

“하……. 산 넘어 산이군요.”

“아니요. 이번엔 산이 아니라 평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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