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6화>
27. 전액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가공부터 깐깐한 관리…… 안전한 먹거리 만드는 마켓 프레시』
『김지영 마켓 프레시 이사 “철저한 관리가 차이를 만든다”』
『마켓 프레시 김지영 이사 “냉장, 냉동, 상온을 보관하는 방법”』
BO푸드 홍보팀은 소문대로 최고 중의 최고였다.
일주일 만에 인터넷에 기사들이 실렸고.
2주가 지나자 각종 매거진들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JTBC 뉴스룸에까지 초대를 받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뉴스룸 출연 소식이 알려지자.
오늘 자 실시간 검색어 4위에 김지영 이사의 이름이 올라갔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나는 휴대폰에 적힌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회의 중이라는 자동 메시지를 보냈다.
10분 후 또 걸려 온 전화.
그때는 운전 중이라는 자동 메시지를 보내 버렸다.
그렇게 1시간 동안 걸려 온 전화는 10통.
제발 전화를 받거나, 연락 달라는 메시지도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15번째 전화가 걸려 왔을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 팀장님! 팀장님!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엠로지스의 김청연 이사.
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 듣고 계시죠? 팀장님. 저 좀 살려 주십쇼. 네? 팀장님.
“제가 곧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길게 통화 못 합니다.”
- 팀장님! 10분, 아니 1분이면 됩니다.
“제가 좀 바쁜데…….”
- 정말 이러실 겁니까?
김 이사는 그동안 해 왔던 우리의 언론 플레이들이 엠로지스를 향한 압박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오늘 실시간 검색어에 생방송 출연까지 한다고 하니 더 똥줄이 탔을 것이다.
“네, 이럴 겁니다.”
- 만나서 얘기해요. 이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합시다. 네? 얼굴 보고 얘기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글쎄요.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
- 아……. 팀장님. 이렇게 내용증명 딱 보내 놓고, 언론으로 압박하시면 어떡합니까?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죠. 제발 시간 좀 내주십쇼.
“오늘은 힘들겠네요.”
- 팀장님!
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법정 공방이 아닌 언론이다.
이는 언론을 통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홍보 대행사가 별로였나 봐요. 겨우 이 정도도 막지 못하고.”
생각보다 기사의 반응은 좋았다.
사실, 2주가 걸린 것은 엠로지스가 고용한 홍보 대행사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기사가 올라오면 다른 기사로 덮으며 빠르게 대응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BO푸드 홍보팀의 손바닥 안이었다. 홍보팀은 블로거와 맘 카페지기들을 동원해 순식간에 기사를 퍼 날랐다.
개인 미디어를 통해 퍼져 나간 기사들.
이제는 홍보 대행사도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팀장님……. 그러지 마시고.
“후……. 그럼. 이따 6시까지 회사 앞 작은 카페에서 보죠. 10분 드리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후 6시.
회사 앞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곳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실내 장식들이 가득한 카페로 보통 이 시간에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텅 빈 카페에 김청연 이사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
“제가 빌렸습니다.”
“빌려요?”
“네. 말씀 나누시기 불편하실 거 같아서요.”
그러고 보니, 일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10분입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청연 이사는 검은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그리고 안전장치를 눌러 가방을 열어 안을 보였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오만 원권 지폐들.
이래서 카페를 빌렸구나.
점원까지 나가 있으라고 하며 아예 통째로 빌렸구나.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뭡니까?”
“1차 협상에 필요한 자금입니다. 작은 성의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현금으로 가져왔으니 추적도 안 될 겁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일개 팀장한테?”
“김지영 이사님은 원 팀장님이 결정만 해 주시면, 방송에서 말씀 안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김 이사님이요?”
“네. 팀장님, 법무팀과 홍보팀을 멈춰 주십쇼.”
“이거 얼마죠?”
“3억입니다.”
나는 가방의 모서리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생각들.
<그만 좀 하자. 응?>
<이거 먹으면 탈 나지. 100% 탈 나지.>
<겨우? 날 뭐로 보고 이러는 거지?>
<가만, 원지훈이는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은 김청연 이사의 목소리.
두 번째는 처음 듣는 목소리.
마지막은 두 건은 김지영 이사의 목소리다.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왔구나.
받으면 탈이 난다는 것은 물론 나도 잘 안다.
잘못된 선택으로 한순간에 무너진 사람들을 많이 봐 왔으니까.
그리고 나를 테스트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사님! 치즈 하세요!”
“네?”
“사진 잘 나오게, 치즈 하시라고요.”
찰칵!
잘 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뜬 김 이사와 오만원권 지폐가 담긴 서류 가방.
나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5분 남았습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인증샷이요. 뭐. 사진 찍었으니까 이제 가져가셔도 됩니다.”
김청연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팀장님 제발 이러지 마시고 우리 좋게, 좋게 해봅시다. 네? 이 정도면 팀장님 2년 치 연봉은 될 거 같은데…….”
“겨우 이 정도가 내 2년 치 연봉이라고요? 누가 그래요?”
김청연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마도 커머스의 일개 팀장이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자……. 잘 모르겠습니다.”
“금액이 틀렸잖아요. 이사님은 잊으셨나 본데, 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사십 칠억 삼천 이백 십육만 삼백 이십 원.”
“…….”
“보통 사진이 뉴스에 나가면 눈에 이거 검은색 막대기 해 주죠? 근데 그거 다 소용없습디다. 알아볼 사람은 귀신같이 찾아내더라고요.”
“팀장님. 정말 왜 그러십니까?”
“저는 사십 칠억 삼천 이백 십육만 삼백 이십 원. 단 일원도 틀리게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보여 주신 작은 성의는 회사 계좌로 보내 주세요. 세금계산서 필요하면 말씀하시고요.”
“…….”
“오늘 8시 30분 전에는 답을 주셔야 할 겁니다. 생방송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요.”
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약속한 10분 지났습니다. 그럼 이만.”
* * *
집으로 향하는 중.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나는 김지영 이사에게 온 것을 확인하고, 블루투스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이사님.”
- 퇴근했어?
“방금 나와서 가는 중입니다.”
- 아 그래?
아쉬운 목소리의 김지영 이사.
내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아니야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보자고.
“말씀하세요. 뭔데요?”
김지영 이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 사실은 말이야. 비서실 직원이 배탈이 좀 나서 보냈어.
“그래요?”
- 응. 방송국에 가야 하는데, 오늘 하필 차를 안 가져와서…….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6시 40분.
JTBC 뉴스는 8시에 시작한다.
좀 늦는다고 해도 8시 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지금 갈게요. 어디세요?”
- 진짜? 나 택시 타고 가도 돼.
“마켓 프레시 이사님이신데 덜렁 혼자 가면 이상하잖아요. 그래도 옆에 누구 하나 달고 가야죠.”
-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김지영 이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20분이면 갑니다. 시간 맞춰서 1층에 내려와 계세요.”
- 그래 고마워.
* * *
JTBC 뉴스룸.
다행히 우린 시작 전에 도착했다.
메이크업을 받는 김지영 이사 뒤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김지영 이사는 그런 날 거울로 힐끔 보며 물었다.
“어디 연락 올 데라도 있어?”
“네. 엠로지스요.”
“거긴 왜?”
“계속 질질 끌 것 같아서요. 오늘 뉴스룸에서 터트릴 것 같은 뉘앙스를 좀 풍겼어요.”
김지영 이사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래서 반응은 어땠는데?”
“가관이었습니다. 김청연 이사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하하하 그래. 김 이사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똥줄이 타고 있겠죠. 생방송인데.”
“그래. 잘했네. 점점 질질 끌리는 거 같아서 나도 좀 그랬거든.”
김지영 이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미소만 지었다.
아마 내가 돈 가방을 받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나오는 미소였을 것이다.
나는 휴대폰에 사진을 띄우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이거 혹시 필요하세요? 필요하시면 바로 보내드리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보다,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
“역시 원지훈이네. 그래 이래야 원지훈 답지.”
“필요하세요?”
“지금 몇 시지?”
“7시 50분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자. 그쪽도 생각이 있으면 답이 오겠지.”
방송용 화장을 마친 김지영 이사는 눈이 부셨다. 도저히 30대 후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을 확인했다.
“나 이상하지 않아? 20대 때는 화장으로 다 가려졌는데, 이제는 힘든가 보네.”
“작년이랑 지금이랑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요.”
“작년?”
“네. 20대면 작년이라는 말이잖아요.”
“하하하 그래. 맞아. 내가 올해 서른이지?”
김지영 이사의 나이는 서른아홉.
내 농담에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며 김지영 이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원지훈입니다. 생각은 해 보셨나요?”
- 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잘 생각하셨네요.”
- 손해 보신 금액을 전액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대신 뭐요?”
- 12개월 분할로 가능하도록 해 주십쇼. 너무 큰 금액이라 한 번에 지급하기는 힘듭니다.
40억이 넘는 금액.
엠로지스가 아무리 큰 회사라고 해도, 이 정도의 금액을 일시금으로 지급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쉽게 허락해 주고 싶지 않았다.
우리도 홍보팀과 법무팀의 노력이 들어갔고, 그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국내 1위 엠로지스가 왜 그러실까요?”
- 팀장님!
“12개월은 너무 깁니다. 6개월로 가시죠.”
- 팀장님!
“법무팀에 전화해서 내일 오전 중으로 내용증명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쉬울 거면, 처음부터 그러지 마셨어야죠. 그럼 끊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끊자, 김지영 이사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협상의 달인인데?”
“뭐 이 정도 가지고.”
“내일 회사에 가면 한 번 더 뒤집히겠구나. 잘했어. 나도 속이 다 시원하더라.”
김지영 이사는 씩 웃어 보이고, 방송국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