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5화>
26. 우리 쉽게 갑시다
왈! 왈!
그르르릉! 그르르릉!
송아지만 한 도사견 3마리가 짖어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놈들은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으헉!”
황급히 내 뒤로 숨는 양 부장.
사설 창고들에는 이런 개들이 많다. 하지만 양 부장은 이런 환경 자체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TF 팀원을 충원해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략기획부의 사람들도 함께 외근하라는 답이었다.
이는 이미 내가 예상한 것이었고.
덕분에 양 부장과 함께 사설 창고로 미팅을 나오게 된 것이다.
“원 팀장! 왔어?”
한 남자가 컨테이너로 된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크게 흔드는 김영학 사장.
그는 원스몰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다.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아니, 죽지 못해 산다. 어휴. 그나저나 웬일이야?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알아?”
“그랬어요?”
“그래. 어떻게 대기업 들어가고 바로 연락을 끊어?”
“좀 바빴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우리 딸은 잘 만나고 있지?”
김 사장의 딸은 7살.
그는 농담처럼 나를 사위 삼고 싶다며, 매번 저 얘기를 했다.
“네. 어제 뽀로로 테마파크 다녀왔습니다.”
“하하하.”
김 사장은 내 농담에 크게 웃고, 옆에 있는 양 부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 팀장 장인, 김영학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켓 프레시의 전략기획부장 양주영입니다.”
“부장님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우리 사위 잘 부탁합니다.”
허리를 숙이는 김 사장.
그는 이런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양 부장이 급하게 김 사장을 일으켜 세웠다.
김 사장은 사무실로 들어와 종이컵에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원 팀장은 믹스 커피지?”
“좋죠.”
“부장님도 믹스 괜찮죠?”
“아……. 네네.”
양 부장은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짖어대는 도사견 3마리에 이미 주눅이 들었고, 아무런 생각 없이 ‘네’라고 답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김 사장이 가져온 종이컵의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사장님, 쟤네들은 뭐 저렇게 짖어요?”
“치치, 미키, 뿌까?”
“이름도 참……. 큐티하게 지으셨네.”
“하하하. 쟤네들이 얼마나 귀여운데. 한번 볼래?”
개들을 데리고 공놀이를 할 생각인지, 김 사장은 테니스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양 부장이 김 사장의 어깨를 잡으며 황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왜요? 쟤네들이 공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애교를 떠는데요.”
“괘……. 괜찮습니다.”
김 사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쉽게 말씀드릴게요. 사장님네 창고 좀 빌립시다.”
“얼마나?”
“한 1톤에서 2톤 정도?”
“냉동, 냉장, 실온 전부 다 합쳐서?”
“아뇨. 각각 1톤씩.”
“아하 그래. 근데 왜 우리 창고를 빌려? BO푸드 창고 크잖아?”
나는 대충의 계획을 설명했고.
설명을 다 들은 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좋네. 그 정도면 용돈은 벌겠네.”
“네. 그러셔야죠.”
“마누라 몰래 비상금 챙기기 딱 좋겠어. 하하하. 그래. 비용은? 월 고정인가?”
김 사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 부장이 가방에서 서류를 내밀었다.
이곳에 오기 전 절대 계약서 초본을 보이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양 부장은 안경을 추켜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계약서를 살피는 김 사장.
표정이 좋지 못하다.
결국, 그는 계약서 두 장 정도만 넘겨 보다 덮어 버렸다.
“못 해.”
“네?”
너무도 짧은 대답에 양 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봐요. 부장님. 내가 식품회사에서 물류 관리만 20년 하다가, 왜 사설 창고를 차린지 아슈?”
“…….”
“이런 개 같은 조항들 때문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럴걸요? 창고 임대업으로 많은 돈은 못 벌어도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사장님. 이 계약 조항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이건 대놓고 갑질하겠다는 거잖아요. 부장님은 책상에만 앉아 계시던 분 같은데, 이런 조건으로는 아무도 설득 못 합니다. 원 팀장아. 너는 좀 알잖아? 근데 이런 걸 들고 다니냐?”
김 사장이 인상을 쓰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기업들이 다 그렇죠. 뭐.”
“제조사들이나 벤더들한테 마켓 프레시 소문 좋은 건, 다 헛소문이었나 보네.”
“그래서 우리 장인어른의 조언을 들으러 온 거 아닙니까?”
“조언은 무슨, 창고는 그냥 창고야. 물건 맡겨 주고 돌려주면 땡인 거야. 그 이상을 요구하면 다 떨어져 나가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렇게 나와 양 부장은 3개의 창고를 돌았다.
매번 똑같이 돌아오는 답에 양 부장은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오는 차 안.
침묵이 이어졌고, 운전대를 잡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요? 쉽지 않죠?”
“…….”
“책상에 앉아서 세운 계획은 현장에서 수정하기 마련입니다. 이대로 며칠 더 돌아도 답은 똑같을 거예요.”
“이런 답이 나올 걸 알면서, 함께 가자고 한 건가요?”
“네. 직접 듣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까요.”
“너무 다르군요.”
“네. 그룹폰을 운영하시던 때와는 다를 겁니다.”
“흠…….”
“내일은 다섯 군데 미팅 있으니까, 신발이라도 편하게 신고 오세요.”
양 부장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하긴, 미국의 좋은 환경에서 일하던 사람이 한국의 이런 환경에 많이 놀랐을 법도 하다.
나는 운전석 옆 콘솔 박스에 내려놓은 양 부장의 다이어리를 살짝 만졌다.
<하아……. 이사님께는 어떻게 보고 드리지?>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미국에 있을 때가 좋았지. 이사님은 왜 이따위 커머스에 욕심을 내는 거지?>
내일 그리고 모레는 더 힘들 것이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그리고 나는 양 부장이 먼저 백기를 들 때까지 그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전략기획부에서 절대로 MD 사업부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사내 메신저에 김태하의 메시지가 보였다.
- 지훈아. 퇴근하고 간단하게 한잔하자.
- 왜?
- 박대영 차장이 좀 보자던데?
차 부장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던 박대영 차장.
그리고 차 부장이 권고사직을 당한 이후로 부장 진급을 위해 이사들을 찾아다닌 것으로 안다.
그가 왜 나를 보자는 걸까?
나는 그와 단둘이 이야기해 본 적도 없는데?
- 박대영 차장이?
- 그래. 최충연 팀장이랑 이진선 팀장도 올 거야. 갈 거지?
최충연과 이진성 팀장은 모두 체인마켓 출신이다.
최 팀장과는 태하 덕분에 친분을 좀 가졌지만, 이 팀장과는 사석에서 자리한 적이 없다.
- 그래. 알았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김태하의 제안을 수락했다.
* * *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삼겹살집.
테이블이 4개뿐인 이곳은 박 차장의 단골집이라고 했다.
“원 팀장 내가 불러서 좀 놀랐지?”
저걸 말이라고 하나?
직장에서 엄연한 상사인데, 이사들 비위를 맞추기 전에 밑에 팀원들 챙겼어야지.
나는 집게를 들고, 삼겹살을 구우며 답했다.
“네. 놀랐습니다.”
“그래. 요새 TF는 어때? 잘 돼 가?”
“아니요. 아직 사설 창고들 하나도 계약 못 했습니다.”
내 답이 끝나자, 최 팀장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게 다 양 부장 때문이죠!”
“맞아요. 전략기획부에서 TF에 들어와 까부는 게 말이나 됩니까? 한국 실정도 모르는 애들이?”
최 팀장의 말에 이 팀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 팀장은 내가 들고 있는 집게를 가로채며, 말을 이었다.
“원 팀장님은 그냥 드세요. 고기는 제가 구울게요.”
“아닙니다. 제가 고기는 잘 굽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들어요. 여기 우리 홈그라운드니까 이 정도 대접은 해야죠.”
체인마켓 출신들이 이곳에서 자주 뭉쳤나 보다.
나는 이 팀장에게 집게를 내주고,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박 차장이 재빨리 술병을 들어 올리며, 내게 내밀었다.
“마시고 한 잔 받아.”
“네.”
술잔의 반만 남은 술을 마시고, 박 차장의 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양주영이 보다는 원지훈이지.>
<그래 자존심은 상하지만, 이대로 MD 사업부를 내줄 수는 없지.>
박 차장의 생각은 예상외였다.
그는 부장직으로 올라가기 위해 이사실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인간이 아닌데…….
“하실 말씀이 뭡니까?”
내 말에 박 차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딱딱하게 왜 이래? 한 잔 더 받아.”
박 차장은 계속 술을 권했다.
그동안 최 팀장과 이 팀장은 전략기획부에 대한 욕만 늘어놨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한 병이 되고…….
그렇게 우리 다섯은 2시간 동안 소주 15병 이상을 마셨다.
이미 취한 김태하는 벽을 보고 혼잣말을 했고, 최 팀장과 이 팀장은 넋두리를 풀어 놨다.
나도 알딸딸한 기분이 들었지만, 눈에 힘을 주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최 이사도 그러면 안 되지……. 전략기획부 애들을 왜 여기다 밀어 넣습니까?”
“욕심나겠지. 마켓 프레시가 생각보다 매출이 잘 나오잖아.”
“그래도 최 이사 같은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자기 사람 채우는 데만 혈안이 돼서…….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이사들 힘 싸움에 눈치만 봐야 합니까?”
“이 팀장, 참아. 좀 있으면 안정이 되겠지.”
그리고 그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박 차장이 말을 꺼냈다.
“원 팀장아. 아니 원지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
“아니요. 모르는데요?”
“왜 그래! 내가 너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가 원스몰에 있을 때, 스카웃하자고 차 부장님한테 엄청나게 졸랐었어.”
“그랬어요?”
“그래! 인마!”
괜히 친한 척이다.
박 차장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지, 내 잔에 술을 따르며 절반은 테이블에 흘려 버렸다.
“아이고 아까운 술. 술이 떨어졌네?”
그는 테이블 위에 떨어진 술을 억지로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가시죠.”
나는 벽에 대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김태하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었다.
그렇게 일어나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박 차장은 가만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자 갑시다! 최 팀장님 아까부터 전화 계속 오던데, 그러다 쫓겨나요. 이 팀장은 박 차장님 좀 챙기세요. 태하는 제가 데리고 갈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하를 일으켜 세웠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 차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 팀장!”
박 차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생각을 읽었기에 그가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있다. 또한, 그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다.
“전략기획부인지 뭔지, 내가 치워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쉬운 말을 뭐 그렇게 못 해요?”
“……!”
“나도 차장님도, 여기 팀장님들도 다 MD잖아요. 처음에는 정치 같은 거 할 생각 없었잖아요. 우리 쉽게 갑시다. 1등, 커머스 1등 그거 한번 해봅시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박 차장.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겨. 꼭 이겨. 전략기획부 애들한테 져서 MD 사업부 통째로 걔네한테 내주지 말고 말이야.”
“…….”
“솔직히 내가 너 싫어하긴 했는데……. 정말 많이 미워했는데……. 너밖에 없더라. 믿는다. 그 개 같은 애들한테 MD 사업부를 통째로 내주지 마라.”
체인마켓 출신들은 차 부장이 나간 이후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박 차장은 그릇이 되지 못했고, 최 팀장과 이 팀장들 또한 그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MD라는 포지션이 우리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부장이 공석인 지금.
어쩌면 전략기획부로 사업부가 통째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걱정 마요. 내가 이겨 줄 테니까.”
“후. 역시 원지훈이 넌 역시 재수 없는 놈이야.”
박 차장은 씩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자신의 잔에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