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4화>
25. 현장 경험이 필요해
MD 사업부의 마 과장과 김대성.
그리고 전략기획부의 최 대리와 박혜선은 볼 때마다 으르렁거렸다.
“사설 창고에 개별 포장까지 떠넘긴다고? 그리고 사고까지 다 책임지라는 게 말이 돼?”
양미간을 구긴 마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최진영 대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모니터만 바라봤다.
“내 말 안 들려? 귓구멍이 막혔어?”
더 크게 소리치는 마성근 과장.
최 대리는 그제야 이어폰을 빼고, 마 과장을 노려봤다.
“그렇게 대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럼 나잇값 먼저 하세요.”
“뭐? 이게 미쳤나?”
일촉즉발의 상황.
잔뜩 화가 난 마 과장이 최 대리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대성이 나섰다.
“대리님! 그게 윗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뭐요?”
“돈을 지급하는 건 우리고 이 정도의 계약 사항은 당연히 그들이 지켜야 합니다.”
마 과장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최 대리의 책상 위로 던져 버렸다.
“창고 애들이 얼마나 거친지 알아? 이런 계약서는 쳐다도 안 봐!”
“하게 만드는 게 과장님의 일 아닙니까?”
“뭐? 안 되겠다. 너 좀 나와봐.”
나는 더 이상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들의 다툼에 끼어들었다.
“마 과장님! 그만 하세요!”
“팀장님도 보셨잖아요! 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뭐라고 했는지요!”
“그러지 말고, 두 분이 화해한다는 의미로 오후에 일산 박 사장님 창고에 좀 다녀오세요.”
현장 경험이 적은 전략기획부 직원들.
그들은 냉정하게 실리를 따져서 계약서 초본을 만든 것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물류 관리직을 오래 한 마 과장이 화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일산의 박 사장은 예전에 조폭 생활까지 했던 사람이다.
거친 말투와 험상궂은 외모.
그 모든 것이 최고 중의 최고인 사람이다.
내 말을 이해한 마 과장이 미소를 지었다.
“예! 알겠습니다.”
“최 대리님도 박 사장님과 안면 터 두면 좋을 겁니다. 꽤 큰 창고를 운영하시는 분이거든요.”
대충 눈치를 챈 것인지…….
최 대리는 내 눈을 피하며, 똥 씹은 표정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답을 듣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마 과장을 옥상으로 불렀다.
건물 옥상.
마 과장은 담배를 물고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 싸가지 없는 최 대리 놈 표정이 벌써 보이네요.”
“박 사장님한테 너무 겁주지 말라고 좀 해 주세요.”
“아니요. 그놈은 좀 당해 봐야 합니다. 최 대리 그 새끼 미친 거 아닙니까? 제가 볼 때는 일부러 초를 치려고 온 놈들 같은데요? 그리고 양 부장인지, 양조장인지는 왜 아직도 출근 안 합니까?”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양 부장은 특별한 연락도 없이 출근을 안 한 상태였다.
“글쎄요.”
“TF장은 팀장님이에요! 늦으면 늦는다고 보고를 해야지! 이것들 진짜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네요. 생각 같아선 양 부장도 사설 창고 돌리고 싶네요.”
그때.
김태하와 최충연 팀장이 담배를 피우러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마 과장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원 팀장! TF는 어때?”
“재미있네.”
“재미있다고? 양 부장이 그런 사람이 아닐 텐데?”
미국에서 양 부장과 함께 일한 김태하가 고개를 저었다. 마 과장은 김태하의 옆으로 바짝 달라붙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밑에 있는 애들도 가관입니다.”
“밑이라면 누구요?”
“최진영 대리랑 박혜선 씨요.”
“아, 그 친구들도 이번에 TF로 넘어왔어요?”
“네. 사설 창고 계약서 초본이라고 보여 주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방금 한바탕해 버렸습니다.”
“왜요?”
“창고 애들한테 개별 포장까지 다 떠넘기고, 사고도 책임지랍니다. 완전히 갑질하려고 마음을 먹었나 본데, 미친 거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한국의 사설 창고들을 움직이기 힘들 텐데…….”
“그죠? 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리고 최 대리, 그놈이 저한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나잇값이나 하랍니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이런 대접을 다 받고…….”
김태하는 마 과장에게 씁쓸한 미소를 보이고,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조만간 또 전쟁이겠구나. 하긴 가만있으면 원지훈이 아니지.”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최충연 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 팀장님.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급한 일들은 끝났으니까, 우리 팀 애들도 얼마든지 TF로 보내드릴게요.”
“정말요?”
“네. 저뿐만 아니라 가전의 이진성 팀장도 그럴 겁니다. 여기 태하 팀장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지?”
“당연하죠.”
MD 사업부에는 총 7개의 팀이 있다.
그들 중 최충연과 이진성은 체인마켓 출신들이고, 차 부장 퇴사 이후, 김태하 덕분에 급격히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씩 웃어 보이며, 마 과장을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는 하연두.
김대성은 말없이 양 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양 부장을 보고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요. 일이 좀 있어서 어디 좀 들렀다 왔습니다.”
“어디요?”
“있습니다. 왜요?”
“TF장은 접니다. 무슨 일로 늦으셨는지 보고해 주셔야죠.”
“보고요?”
“네. 상하 관계 철저하신 부장님이 그런 걸 까먹으시면 안 되죠.”
양 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두의 옆으로 걸어가 티슈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무슨 일인데?”
말이 없는 하연두.
그리고 그때 화가 잔뜩 난 김대성이 박혜선을 보며 말했다.
“박혜선 씨! 사과하시죠!”
“왜요? 제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나는 김대성에게 지금의 상황을 들었다.
마 과장과 옥상으로 올라간 사이.
하연두가 내 책상 위에 보고서를 올려놨고, 박혜선이 먼저 보겠다고 했다. 이에 하연두가 그녀에게 새로운 출력본을 준다고 하니, 박혜선이 버럭 화를 냈다고 했다.
인턴사원 주제에 종이 아까운지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이건 그냥 싫은 거다.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양 부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부장님, 저 좀 잠깐 보시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우린 빈 회의실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로 마주하고 앉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기 싫으십니까?”
“뭐가요?”
“하기 싫으면 그만하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이봐요. 원 팀장, 혜선 씨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걸 왜 저한테 그럽니까?”
“자꾸 이러실 겁니까?”
“그건 제가 원 팀장님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최 대리한테 오후에 창고에 나가라고 하셨다죠?”
“TF에 들어온 이상, 당연히 경험해 봐야죠!”
“우리가 TF에 합류한 이유는,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런 식으로 끌려가면서 무슨 일을 합니까?”
“좀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하셔야죠! 책상에 앉아서 계산기만 두드리면 답이 나옵니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일하다 잘못된 경우가 어디 한둘입니까?”
나와 양 부장은 정말 다른 사람이다.
일해 온 환경, 타고난 성격 등 아예 생각 자체가 다르다.
결국, 우린 서로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 말을 한 나는 갈증을 느끼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너희는 또 여기서 연애질이야?”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는 나눠 먹는 김태하와 이은지.
당황한 표정의 김태하가 말했다.
“문 잠갔는데?”
“안 잠겨 있었어. 그리고 문 잠그면 더 이상하지. 딴 데 가서 하면 안 되겠냐?”
“이거만 먹이고 갈 거야.”
김태하는 샌드위치를 이은지의 입에 들이밀었다.
이에 이은지는 입을 조금만 벌려 샌드위치를 베어 먹었다.
“은지 씨 입 큰 거 내가 아는데 뭐 하는 짓이야?”
“어머, 팀장님 왜 그러세요?”
“저놈이 딴 데 가서 뺨 맞고 와서 저러는 거야. 신경 쓰지 마! 애기야.”
원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미운 법.
나는 김태하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들고 있는 샌드위치를 확 가로챘다. 그리고 한입에 넣어 버렸다.
“야!”
“별로 맛도 없구만!”
“내가 그거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든 지 알아?”
“만든 거야? 편의점 아이돌 샌드위치가 훨씬 맛있겠다. 안 그래 은지 씨?”
이은지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내 말이 맞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김태하는 손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 내며 말했다.
“양 부장이랑 한바탕 한 거야?”
“그래 왜!”
“그 인간 쉽지 않지? 반대를 위한 명분을 찾는 사람이야.”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반대를 위한 명분?”
“응. 무슨 말이든 토를 달지 않아? 양 부장은 한 번에 오케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
“내가 왜 오케이를 받아야 하는데?”
“하긴 네가 TF장이지. 아 참, 잠깐 내 자리로 가자. 최구열 이사님이 너 주라고 한 게 있어서.”
“최 이사님이?”
“응.”
나는 김태하의 자리로 가서 고급스러운 나무 상자를 받았다.
“뭐야?”
“공진단. TF 팀에 기대가 크다고 이거 주더라.”
“근데 왜 이걸 너한테 줘?”
“몰라. 내 생각에는 그냥 즉흥적으로 준 거 같아. 아침에 출근하면서 만났는데, 너랑 TF 팀원들 먹으라고 주더라.”
나는 최 이사가 줬다는 나무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나무 상자에 담겨 있던 최 이사의 생각들이 들려왔다.
<차기영 바보 같은 놈. 그렇게 기회를 줬는데, 일을 이렇게 만들어?>
<그런 일은 양주영이가 적격이지.>
<양주영,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놈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김태하 이놈도 말을 듣지 않는구나.>
<원지훈? 그놈은 또 뭐야? 뭔데 설치고 다니는 거야?>
<김지영이가 원지훈을 끼고돈다 이거지?>
<그래 TF만 잡아먹으면 끝나는데, 양주영이랑 원지훈을 붙여 놓자.>
나는 최구열 이사는 점잖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본 그의 마인드는 존경할 만했으니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자주 접해 왔다. 하지만 최 이사가 회사의 일이 아닌, 정치에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무 상자에서 들려온 그의 추한 생각들.
끝이 없다.
그리고 그는 지금 실수한 거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넨 이 상자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으니까.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무 상자를 옆구리에 꼈다.
“아주 잘 먹겠다고 전해 드려.”
“힘내 인마.”
“그래. 아주 힘이 난다, 힘이 나.”
사무실로 돌아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나무 상자를 양 부장에게 건넸다.
“최 이사님이 드시고 힘내랍니다.”
“공진단이죠? 하하하, 미국에 계실 때도 자주 주셨죠. 이거 어떤 물건인지 아세요? 이사님이 한국에서 직접 제조해서, 미국으로 받으시는 겁니다.”
양 부장은 내 속도 모르고 히죽거린다.
임금이 내린 물건을 하사받은 간신처럼 말이다.
“부장님.”
“네?”
“TF 인원을 더 추가해야겠습니다.”
“네?”
“대표님께는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전략기획부에서도 넘어올 수 있는 사람들 확인해 주세요.”
나는 나무 상자의 위를 한 번 쓸어내며, 양 부장의 생각마저 들었다.
<팀원을 더 데려오라고? 이 새끼가 일부러 이러는 건가?>
<장선영이, 그래 장선영이 애들 더 데리고 와야겠어.>
MD 사업부의 인원은 50여 명.
반면에 전략기획부는 10명이 전부다.
사업부라고 하지만, MD 사업부의 일개 팀 정도의 규모다.
이는 MD 사업부에서는 얼마든지 더 차출해 올 수 있지만, 전략기획부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MD 사업부 유아동 팀의 장선영 팀장은 최구열 이사의 라인이다.
그녀의 팀원들을 데려오겠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 양 부장이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우리 부서 사정 뻔히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부장님도 이번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아 참, 유아동 팀원들은 건드리지 마세요.”
“네?”
“거기 팀원들은 마음이 여려서 창고 돌면 바로 사표 쓸 겁니다. 아니면 양 부장님이랑 전략기획부 직원들이 직접 돌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현장 경험이 좀 필요한 것 같으신데?”
그리고 마침.
새파랗게 질린 표정의 최 대리와 마 과장이 들어왔다.
나는 최 대리의 표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최 대리! 그 사장님 좋은 사람이야. 그냥 장난친 거니까. 기분 풀어.”
최 대리의 등을 두드리는 마 과장.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내 입가에도 미소가 조금씩 번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