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7화>
18. 다음 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끓고 있는 부대찌개는 빨간색이 아닌, 옅은 갈색에 가까웠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구린내.
설마 마지막에 넣은 갈색 양념이 청국장이었나?
나는 조리 중인 서보미 실장에게 물었다.
“청국장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리 준비한 제안서를 나와 하연두에게 나눠 줬다.
“역시 원 팀장님이시네요.”
역시는 무슨…….
하연두는 아까부터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고.
사무실 전체로 퍼진 냄새에 직원들이 창문을 여는 게 보이는데…….
서보미 실장은 이를 전혀 모르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두 분 모두 존슨 부대찌개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치즈와 베이크드 빈스(baked beans)로 맛을 낸 존슨 부대찌개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제품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희 고래식품에서는 베이크드 빈스를 대신하여, 보다 한국적이고 친근한 청국장을 첨가해 봤습니다. 본 제품에 들어간 콩은 100% 국내산으로 정확히 24시간 발효된 제품입니다.”
베이크드 빈스 대신 청국장이라…….
조금은 황당한 선택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청국장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지 않을까요?”
“아니요. 청국장은 대중적인 식품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보시면, 청국장 관련 제품들의 연간 판매량과 재구매율, 판매 연령대 등이 표기되어 있을 겁니다.”
제안서 5장에 걸쳐, 빽빽이 그려진 그래프들.
꽤 열심히 준비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제안서를 살피는 동안.
서보미 실장은 팔팔 끓는 부대찌개를 일회용 용기에 담았다. 그리고 나와 하연두에게 차례로 건넸다.
“따뜻할 때 드셔 보세요.”
“예. 고맙습니다.”
국물을 조심스럽게 떠먹던 하연두가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괜찮으세요?”
서보미 실장이 깜짝 놀라 물었고.
하연두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손사래를 쳤다.
“괘……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입에 안 맞으세요?”
“제품이 이상한 게 아니라 제가 청국장을 못 먹어서요. 청국장 향이 좀 세네요.”
“정말요? 그럼 미리 말씀하시지…….”
“그래도 제대로 된 피드백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하연두는 언제나 의욕과 열정이 넘쳤다. 그래서 먹지도 못하는 청국장이 들어간 음식을 억지로 먹은 것이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연두 씨, 나가서 물 마시고 와.”
“아닙니다. 괜찮아졌어요.”
“괜찮아. 다 이해해 주실 거야. 그렇죠. 서 실장님?”
서보미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죠. 근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물 가져다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마실게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 참! 서 실장님, 저는 아니지만 청국장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하연두는 밖으로 나가며, 제품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이는 제품을 만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내 가르침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부대찌개를 한 숟가락 떴다.
입에 넣은 순간.
딱 한 가지의 생각만 떠올랐다.
“어떠세요?”
내 의견을 묻는 서보미 실장.
기대에 가득 찬 그녀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답했다.
“청국장 맛이 너무 셉니다. 솔직히 부대찌개가 아니라, 청국장에 햄을 넣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햄도 더 익혀야 할 것 같습니다. 청국장과 햄이 따로 노는 거 같아요.”
“…….”
너무 직설적이었나?
서보미 실장은 고개를 푹 숙였고, 회의실 안도 조용해졌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김민우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갑자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두 분 다 아메리칸 스타일이신가 보네. 어떻게 청국장을 싫어하시지? 하하하. 지훈아, 이거 우리가 블라인드 테스트했을 때 가장 좋은 평점 받은 거야. 잘 좀 봐줘.”
“테스트를 하긴 했구나.”
“당연하지! 내가 마프 들어오면서 그런 것도 안 했겠어?”
“마프?”
“마켓 프레시, 다들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데. 몰랐어?”
“마프라……. 어감은 좋네. 그리고 서 실장님.”
국물을 조금씩 떠서 시식하던, 서보미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네?”
“이거 포장지 디자인은 나왔나요?”
“아뇨, 아직.”
“그건 다행이네요. 차라리 부대찌개가 아니라 청국장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햄 청국장이나, 치즈 청국장 이런 이름은 어때요?”
서보미 실장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김민우는 갑자기 무릎을 치며 크게 소리쳤다.
“와! 그거 좋은데? 햄 치즈 청국장! 어때?”
나와 서보미 실장은 고개를 돌려 김민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붙어 앉았다.
“지훈이가 학교 다닐 때도 애들 별명 잘 지었거든. 그래서 그런가 작명 센스도 죽이네. 어때? 서 실장도 괜찮지?”
서보미 실장은 김민우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없이 나에게 물었다.
“청국장과 햄이 어울리지 않나요?”
“네. 좀 심합니다.”
“흠……. 그래서 일부러 물에 불린 햄을 썼는데, 그게 문제였던 것 같네요. 베이크드 빈스는 아예 빼야겠어요. 오히려 그게 청국장의 맛을 더 강하게 만든 것 같아요.”
“부대찌개를 고집하시려면, 청국장 대신 낫또를 써 보는 건 어떨까요?”
“낫또도 괜찮겠네요.”
보통 제품 개발 파트는 고집과 자기주장이 센데, 서보미 실장은 조금 달랐다.
너무도 쉽게 내 의견을 수용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실장님은 제품 개발 부서세요?”
“아니요.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이요?”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김민우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이거 준비하느라 서 실장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지훈아, 잘 좀 봐줘. 친구가 마프에 MD로 있는데, 이번 기회에 덕 좀 보자. 응?”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제품을 들고 와서 잘 봐달라는 저 말.
더군다나 10년 만에 보는 동창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쏘아붙이려는 순간.
눈이 붉게 충혈된 서보미 실장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국자를 떨어트린 그녀.
나는 바닥에 떨어진 국자를 집어 들었다.
<친구라서? 친구면……. 노력한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봤던 제조사나 벤더들은 어떻게든 인맥에 기대려 한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인맥이라는 지름길이 아닌 정상적인 길로 가려 하고 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티슈를 두어 장 끊어 내 그녀에게 건넸다.
“서 실장님의 노력을 더 보고 싶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와 주시겠습니까?”
티슈로 눈물을 닦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예?”
“조금 더 연구하시고, 다음 주에는 더 좋은 제품을 들고 와 주세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저희 사장님이 팀장님 친구라서 그러시는 거라면…….”
나는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아니요. 10년 만에 보는 놈이 무슨 친구입니까? 회사 홈페이지에 등록하시고 시간 배정받아서 다시 와 주세요. 다른 제조사나 벤더들과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을 겁니다. 실장님의 노력으로 정당하게 우리를 설득해 보세요.”
서보미 실장은 눈물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 울었냐는 듯한 환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회사 옥상.
김민우는 서보미 실장을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보내고.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러 올라왔다.
“회사에 제품 개발팀 없어? 왜 마케터가 제품 개발을 하고 있어?”
“…….”
아무런 답이 없는 김민우.
그는 담배를 다 피운 후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개발팀 같은 거 없어.”
“없다고?”
“한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다 그만뒀어. 그리고 어이없게도 집에서 주식만 하던 내가 회사를 물려받게 된 거야. 그냥 팔아치우려고 했는데, 이건 팔리지도 않고 전문 경영인들도 다 싫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네가 맡은 거야?”
“뭐 그냥 문 닫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해 보는 거야.”
이놈은 학생 때도 이랬다.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고, 다른 친구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놈이었다.
“회사 주력이 뭔데?”
“오징어, 명태, 쥐포 같은 생선들 말려서 소밀이랑 해청에 납품해. 예전에는 거래처가 꽤 많았는데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프셔서 다 떨어져 나갔대.”
“직원은 얼마나 되는데?”
“한 스무 명 되려나? 다 동남아 노동자들이고, 토종은 나와 서 실장 둘이야.”
직원이 몇 명인지도 모르다니…….
역시 이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왜 그런 회사에 붙어 있는데?”
“아버지 회사였다니까!”
“아니, 너 말고 서 실장 말이야.”
“아, 서 실장? 나도 몰라. 이 회사가 첫 회사라 그런가? 하여간 두 달 전부터 신제품 개발한다고 혼자 연구실 들어가서 저 난리다.”
“몇 살인데?”
“스물여덟. 우리보다 한 살 어려. 그리고 지훈아. 나 아까 했던 말 진심이야.”
“무슨 말?”
“어떻게 힘 좀 써 주면 안 되겠냐? 마프 들어가면 무조건 선지급이잖아. 내가 이거 받아서 10% 아니, 20% 너 줄게.”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김민우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민우야.”
“응?”
“생각 같아선 당장 뒤통수 한 대 때리고 싶은데 말이야. 10년 만에 봐서 참는 거야. 다음 주에는 너 말고 서 실장만 보내. 그게 너희 회사에 좋을 거야.”
“뭐?”
“그리고 빨리 내려가라. 열심히 하려는 사람 기 빠지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는 카페에서 라떼 두 잔을 받아 그에게 전했다.
* * *
일주일 후.
정식으로 절차를 밟은 고래식품의 서보미 실장이 혼자 찾아왔다.
“팀장님 말씀 듣고 청국장 대신 낫또를 첨가해 봤습니다. 냄새도 나지 않고, 푸석한 베이크드 빈스보다 더 식감이 더 좋았습니다.”
새로운 PPT를 내미는 서보미 실장.
나는 그녀의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저기 데인 흉터와 칼에 베인 상처들…….
지난 일주일간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손은 왜 그래요?”
“아…… 이거요? 별거 아닙니다.”
손을 뒤로 숨기는 서보미 실장.
나는 밖으로 나가 김대성에게 화상 연고와 밴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앞에 연고와 밴드를 내려놨다.
“가져가세요. 회사에 많아요.”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마운데, 정말 괜찮습니다. 이제 아무렇지 않아요.”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서보미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오셨어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들어오는 하연두 덕분에 어색함이 깨졌다.
서보미 실장은 급하게 물을 끓이고, 새로 가져온 분말 가루를 물에 탔다. 그리고 포장된 햄과 채소들을 뜯어서 끓는 물에 넣었다.
모든 조리가 끝내갈 때쯤, 작은 봉지에서 낫또를 꺼내 마지막으로 첨가했다.
“드셔 보시겠어요? 연두 씨. 이번엔 청국장 대신 낫또를 넣어 봤어요.”
“낫또요? 와, 기대되네요.”
하지만 여전히 맛은 좋지 못했다.
햄과 고기, 낫또의 조합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때요? 괜찮죠? 이전보다 더 좋아졌죠?”
서보미 실장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와 하연두를 번갈아 봤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실장님. 부대찌개나 청국장은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다음 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는 기필코 두 분의 입맛을 사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서보미 실장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 주를 더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떠나고, 하연두는 다 식은 부대찌개를 한 숟가락 더 떠먹으며 말했다.
“제가 먹어도 별로인데……. 왜 본인은 모를까요?”
“원래 너무 많이 맛을 보면 저렇게 돼.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헷갈리는 거야.”
“왜 혼자 맛을 봐요? 다른 팀원들은요?”
“혼자라더라.”
“네?”
“그리고 제품 연구팀도 아니고 마케터래.”
“근데 왜 여기서 이러는 건데요?”
“글쎄. 다음 주에 오면 연두 씨가 직접 물어보던가.”
나는 남은 부대찌개를 버리고, 회의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