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4화>
15.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된다
“우진 씨, 연두 씨!”
“예! 팀장님!”
내가 부르자.
둘은 마치 전쟁터에 나온 군인처럼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냉동 창고 안으로 들어가서 폐기할 물건 수량 체크해요! 그리고 사무실에 있는 김 대리에게 전화해서 폐기 업체 보내라고 하세요! 당장!”
“예, 알겠습니다.”
둘은 곧바로 커다란 냉동 창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어이없다는 표정의 최민용 센터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출입증도 없이, 창고에 맘대로 들어가래?”
“내 물건 내가 폐기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와 최민용 센터장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대립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창고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대여섯 명이 몰려 왔다. 최민용 센터장은 냉동 창고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데리고 나와! 빨리 끌고 나오라고!”
창고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냉동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옆에 붙어 있던 김대성이 창고 문 앞으로 달려가 양팔을 벌리고 출입문 앞을 막아섰다.
“더 다가오면 책임 못 집니다!”
“……!”
“뒤로 물러서요! 수량 파악할 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190cm에 100kg이 넘는 거구의 김대성.
고등학교 씨름 유망주였던 그가 양팔을 벌리자,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냉동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잠시 멈칫했다.
“뭐 해? 안 들어가고!”
“…….”
“빨리 안 들어가?”
최민용 센터장의 말에 창고 직원들은 김대성의 앞으로 몰려갔다.
양팔을 벌린 그를 끌어내기 위해, 남자 둘이 달라붙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이 되자 거구의 김대성도 어쩔 수 없었다.
“놔! 이거 놔!”
점점 밀려나는 김대성.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성근 과장이 달려갔다.
그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못 가! 못 간다고!”
“비켜요. 좀!”
“못 들어가! 아악! 이놈들이 선량한 사람을 패네! 아이고 나 죽는다! 아이고 나 죽어!”
마 과장의 비명에 창고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때.
끼이이익!
검은색 고급 세단이 창고 근처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정진택 팀장과 조수석에서 내리는 차기영 부장.
차 부장은 자신이 마치 해결사라도 되는 것처럼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원 팀장! 직원들 데리고 돌아가.”
“그렇게 못 합니다. 물건이 3일이나 상온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알아. 다 안다고. 내가 마무리 지을 테니까. 그냥 돌아가.”
차 부장이 긴 한숨을 내쉬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그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우리 팀의 상황을 알고 온 것인지.
평소 지금처럼 귀찮은 일은 책상에 앉아서 지시만 하던 그가 왜 관여하려는 것인지.
또한, 뒤에서 팔짱을 끼고 코웃음 치는 정진택 팀장은 왜 온 것인지 말이다.
“우리 팀이 마무리 짓고 가겠습니다.”
“원 팀장! 말 안 들을 거야!”
“부장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재냉동 된 제품을 팔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겨우 3일이야! 배송이 늦어지면, 3일도 걸리고 그러잖아.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나는 고개를 젓고, 문 앞을 지키는 우리 팀원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차 부장의 뒤에서 수수방관하던 정진택 팀장이 내 앞을 막아섰다.
“원 팀장님. 부장님 말 못 들었어요? 그냥 돌아가세요.”
“비키세요.”
“이거 참, 세상모르고 까부는 꼴이라니…….”
“뭐요?”
나는 손을 뻗어, 정진택 팀장을 밀어냈다.
그 순간 그의 옷에 담겨 있던 생각들이 들려왔다.
<씨발, 고구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베트남 새끼 말 믿은 게 잘못이지.>
<냉동? 맞아! 그러면 되겠네. 그래.>
<8톤 전부다? 역시 차 부장, 이 인간 꽤 쓸만하네.>
2주 전, 냉장 고구마 큐브를 대량으로 수입한 정진택.
그 이후로 고구마 큐브에 대한 말은 없었다.
그건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설마?
나는 정진택 팀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
“재고로 쌓인 고구마 큐브를 창고에 밀어 넣으려고 우리 물건을 빼낸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 냉장으로 수입한 물건이 재고가 쌓이니까 냉동으로 속여서 팔아치우려 했구나.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
정진택 팀장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까지 차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꺼풀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긴장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난 그의 변화에 내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센터장! 당신도 이들이랑 짜고 그렇게 한 거야?”
“……!”
“냉장 제품을 후가공 없이 냉동으로 속이려고? 이러면 내가 더 가만히 못 있지. 오늘 미친놈이 칼춤을 추겠구나.”
나는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자 나를 좀 아는 차 부장이 나를 끌어안으며, 말리려 했다.
“원 팀장. 우리 그만하자 응?”
“이거 놔라.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같이 잘할 수도 있잖아.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되잖아? 이번 한 번이야. 고구마는 내일 피자 프랜차이즈로 다 넘기기로 했다고!”
“그러기엔 이미 선을 넘었잖아!”
나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차 부장의 손을 강제로 떼어 냈다. 그리고 정진택 팀장을 노려보고 팀원들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내 팀원들 건드린 사람들! 전부 똑같은 혐의로 신고할 겁니다! 경찰, 식약처, 기자, 동네 꼬마들까지 내가 부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부를 겁니다. 그리고 지금 막는 사람들 전부 다 가만 안 둘 겁니다.”
“원 팀장!”
협상은 없다.
이런 일에 타협을 해 주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된다.
이들처럼 잘못에 무감각해질 수는 없다.
그게 내 원칙이고,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내 협박 때문인지, 김대성과 마 과장을 끌어내던 직원들이 멈춰 섰다.
나는 그들의 사이로 걸어가, 둘의 옷매무새를 만져 줬다.
“두 분 다 고생했어요.”
그때.
끼이이익!
검은색 체어맨 리무진 한 대가 주차장에 세워졌다.
운전석에서 내린 젊은 남자는 재빨리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백발의 남자.
표정이 좋지 못한 그는 마켓 프레시의 대표이사 정근영이었다. 그리고 반대쪽 문이 열리고, 하얀 정장을 입은 김지영 이사가 걸어 나왔다.
정근영 대표는 차가운 표정으로 정진택 팀장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찰싹!
갑자기 내려치는 뺨.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먹는 거로 장난을 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
“차 부장! 내가 아들놈 맡겨 놓았더니, 이렇게 장난치는 거 먼저 가르치나?”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차 부장이 허리를 숙였다.
정근영 대표는 이에 분이 풀리지 않는지, 센터장과 창고 직원들에게도 소리쳤다.
“뭐 해! 당장 들어가서 폐기할 물건 다 끄집어내!”
“예…… 예. 알겠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정근영 대표 덕분에, 모든 상황이 단숨에 종료됐다.
김지영 이사는 바닥에 떨어진 내 상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 내게 내밀었다.
“고생했어.”
“어떻게 된 겁니까?”
“김경일 대리? 너희 팀 사람이지?”
“네.”
“김 대리가 내 방으로 다짜고짜 찾아왔었어. 너희 팀이 다 나가고 정 팀장이랑 차 부장이 따라 나갔는데, 혹시 정 팀장 물건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 같다고 말하더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따라왔는데 김 대리는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그가 똑똑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모두 예상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이사님이 대표님 모셔 온 거예요?”
“응. 이건 정 대표님이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후…….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내가 고맙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김지영 이사가 건네준 상의를 다시 입었다.
정근영 대표는 자기 아들, 정 팀장과 차 부장을 심하게 혼내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
“원 팀장. 미안합니다. 못난 아들놈 대신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회사로 돌아갈 거죠? 타요. 같이 갑시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내 차 열쇠를 마 과장에게 전달하고 정근영 대표의 뒤를 따라, 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 정 대표는 정면을 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 팀장.”
“네 대표님.”
“원 팀장은 BO푸드에서 만든 첫 번째 제품이 뭔지 아세요?”
작은 만둣집에서 식품업계 3대 기업이 된 BO푸드.
이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만두가 BO푸드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김상만 회장님의 만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부분은 회장님의 만두 때문에 BO푸드가 생겨났다고 알더군요. 근데 원 팀장은 알 겁니다. 그 볼품없는 만두를 들고 공장 찾아다니며 냉동 가공하고, 투자자들에게 무릎 꿇어가며 애원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
“나. 정근영……. 지난 50년 동안 죽어라 일만 했습니다. 정말 BO푸드 하나만 보고, 가족도 다 내팽개치고 살았습니다.”
정 대표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개처럼 일해 왔는데, 이제는 그 자식의 개가 되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내 자식놈까지 그의 개가 되라고 합니다.”
“…….”
“자식은 그래도 나처럼 살게 하지 않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라 생각하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원 팀장이 김지영 이사의 사람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원 팀장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후……. 아닙니다. 그냥 늙은이의 넋두리라고 생각하세요.”
긴 한숨을 내쉬는 정근영 대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차가 회사에 도착하고 운전을 하던 기사가 문을 열었다.
정 대표는 내게 사무실로 올라가라는 말만 하고 차에서 내렸다.
* * *
다시 돌아온 사무실.
자리에 앉아 있던 김 대리가 벌떡 일어나, 작은 물잔을 건넸다.
“뭔가요?”
“고생하셨습니다.”
“이사님한테 들었습니다. 김 대리도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정근영 대표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팀원들이 돌아오고, 조금 전의 일들을 마치 무용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었다.
“대성아! 내가 아까 한 놈 집어던진 거 봤지?”
신이 나서 떠드는 마성근 과장.
그의 별명은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MSG.
역시 MSG다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에이, 언제요?”
“그걸 못 봤어? 초록 씨! 초록 씨는 창고 안에서 내 목소리 들었지?”
“초록이 아니고 연두인데요.”
“아! 초록이나 연두나 뭐…….”
나는 신이 나서 떠는 팀원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때, 파티션 너머에 있는 김태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원 팀장, 담배 하나 피우러 갈까?”
커피를 받아 들고 올라온 옥상.
김태하는 내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대충 얘기 들었다. 수고했어.”
역시 회사란 집단은 소문이 빠르다.
“그래.”
“대표님이랑 같이 차 타고 왔다며? 뭐래?”
“그냥. 자기도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네. 근데 태하야.”
“응?”
“너희 아버지랑 정 대표님 친구 아니야?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친구. 난 그렇게 들었는데?”
“글쎄. 난 정 잘 몰라. 정 대표님은 너무 어릴 때 봬서 말이야.”
“그리고 너희 누나. 김 이사님 말이야.”
“왜?”
“아니다. 나중에 얘기하자.”
잠깐 망설였다.
정근영 대표의 자식놈까지 그의 개가 되라고 했다는 그 말 때문에.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다.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될 테니까.
나는 담뱃불을 끄고.
남은 커피를 들고 흡연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디 가?”
“마무리 지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