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3화>
14. 너 하는 거 봐서
요란한 형광 불빛이 가득한 맥줏집.
건강식품 팀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차에서 얼마나 마시고 온 건지.
그들은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춤까지 추고 있었다.
김태하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고.
난 주저했다.
최대한 저들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다.
“원 티자니! 원 티장니! 여기! 여기이니다요!”
혀가 꼬부라진 말투로 나를 애타게 부르는 김호연 대리.
덕분에 맥줏집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옥상에서 얘기를 나눴던 그가 건강식품 팀이었다는 것을…….
와이셔츠가 땀에 젖어 속이 훤히 보이는 그는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도 군대 이후로 보지 못한 DJ DOC의 관광버스 춤을 추면서 말이다.
도망가야 한다.
지금 저들 사이에 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왜 빨리 안 가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핫.”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김태하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어디 가?”
“누구시더라…….”
“장난하지 말고 빨리 와!”
“아, 내가 아침에 냉장고 문을 열어 두고 온 걸 깜빡했네? 전기세 많이 나오겠는데?”
“개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와!”
“맞다. 김치! 김치 다 쉬어 버려. 빨리 닫아야…….”
정말 피하고 싶었는데…….
나는 김태하와 누군지 모르는 사원에게 포위된 채로 질질 끌려갔다.
“오렸떠요?”
김호연 대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함께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리고.
쿵!
비틀거리며 테이블 위의 안주 접시를 엎지르고 말았다.
바닥을 나뒹구는 접시.
그 안에 있던 땅콩, 오징어, 과자 쪼가리 등이 공중으로 흩날렸다.
이건 꿈이다. 빨리 이 지옥에서 도망쳐야 한다.
뇌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라, 있는 힘껏 김태하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팀장님 오셨어요?”
원스몰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은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 맞다 은지 씨도 건강식품 팀이었지?”
“네.”
“술 많이 마셨어? 은지 씨 술 못 마시잖아?”
“괜찮아요. 많이 안 마셨어요.”
거짓말이다.
이은지의 볼 주위가 심하게 빨갛다.
난 그녀의 주사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시는 회식을 하지 말자고 말했었는데…….
바닥을 뒹굴던 김호연 대리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트렸던 오징어 다리 하나를 내 입에 찔러 넣었다.
“헤헤……. 떨 마린오링어 좋아? 좋아요, 쿠독, 알림털정까지 콱!”
“오징어 알레르기가 심해서…….”
나는 입안의 오징어 다리를 꺼내서, 김호연 대리의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 줬다. 그러자 그는 다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한 번 더 비틀거렸다.
“텅으니 망큭하옵니다!”
“죄송합니다. 김 대리가 좀 많이 취했네요.”
진작 잡아 줄 것이지.
건강식품 팀의 최충연 팀장이 김 대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를 억지로 소파에 앉혀 놓았다.
“이제 잘 겁니다. 저희 회사 밖에서는 처음이죠?”
“그러네요.”
“태하하고는 많이 안 드셨나 보네요?”
“네. 맥주 조금만 마시고 왔습니다.”
나는 최 팀장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맥주 한 병을 따서, 내 앞으로 밀어 줬다.
“태하랑은 형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들으셨죠?”
“들었습니다.”
“오늘 PT 잘 봤습니다. 덕분에 엄청 깨졌네요. 김 대리도 그래서 좀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건강식품 팀 대부분은 체인마켓에서 넘어온 사람들.
차 부장은 나에게 밥그릇을 내주고, 이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았다.
나는 마시던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절대 원 팀장님 탓하는 게 아닙니다. 깨지긴 했지만, 속 후련했습니다. 하하하.”
“…….”
“고맙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QT인지, ㅂㅅ인지 때문에 많이 힘들었거든요. 매출 좀만 떨어지면 지랄을 해 대고, 뻔히 지 주머니로 들어가는 거 다 아는데……. 휴……. 그동안 정말 일할 맛 안 났습니다.”
나는 최 팀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회사, 일, 거래처, 가족 등등.
그는 김태하의 말처럼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았다.
“이번에 흑마늘 즙 샘플 좀 받아놨는데 내일 드릴게요. 꼭 드셔 보세요. 정말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질 겁니다.”
“그래요?
최 팀장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김태하를 불렀다.
“태하야, 오늘 아침에 내가 준 거 마셔 봤지?”
“에이, 하나 먹고 어떻게 알아요?”
“아냐? 그거 효과 직빵이야. 난 하나 먹고 그날 바로 철야 했잖아.”
“헐……. 형네 팀은 철야도 해요?”
“건강식품은 제품 하나 올릴 때마다 얼마나 공들이는지 알아?”
“그건 알죠. 요즘도 식약처에서 광고 문구 가지고 태클 들어와요?”
“사사건건 시비야. 진짜 못 해 먹겠다.”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아까와 달리, 다소 진정된 건강식품 팀원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아악!”
소파에 누워서 자던 김호연 대리가 몸부림을 쳤다.
덕분에 테이블에 올려 둔 병따개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숙여 주우려 했다.
그리고 보면 안 될 걸 봐 버렸다.
테이블 밑으로 손을 꽉 잡고 꼼지락거리는 김태하와 이은지를…….
요것들 봐라?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은지에게 말했다.
“은지 씨, 그거 과일 맥주지?”
화들짝 놀라는 이은지.
그녀는 테이블 밑에 있던 손을 재빨리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아……. 네, 네.”
“맛있어?”
“네……. 네.”
“조금만 마셔 봐도 될까?”
“그러세요.”
이은지는 자신이 마시던 맥주병을 건넸다. 나는 맥주병을 잡고, 앞에 있는 빈 잔에 과일 맥주를 조금 따랐다.
<오빠한테 바래다 달라고 해야지.>
과일 맥주를 다시 이은지에게 돌려주며 환하게 웃었다.
* * *
이튿날, 가장 먼저 출근한 하연두가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연두 씨. 좋은 아침.”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내가? 왜요?”
“보통 그냥 고개만 끄덕이시는데, 오늘은 좋은 아침이라고 하셔서요.”
“그랬나? 하하, 앞으로 꼭 이렇게 인사할게요.”
“저……. 팀장님.”
나는 하연두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부를 때마다 무섭다.
그녀는 열정적인 면이 있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또 묻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네?”
“저……. 혹시.”
“뭔데? 말 해 봐요.”
“저도 건강식품 팀 은지 씨처럼 편하게 대해 주시면 안 돼요?”
“편하게? 지금도 편한데요?”
“아뇨. 은지 씨한테는 보니까 반말로 하시던데…….”
“괜찮겠어요? 제가 반말을 시작하면 그건 일이 터질 거라는 신호일 텐데?”
“예!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연두는 두 주먹을 올려 불끈 쥐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뭐 그럼 그럴게…… 요.”
“끝에 요는 뭐예요?”
“아직 좀 어색해서…….”
“팀장님! 제가 그렇게 불편하세요?”
입을 삐죽 내미는 하연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다급하게 답했다.
“아니! 아니야! 아주 편해. 이제 됐어?”
“네. 좋아요.”
하연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김태하가 출근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파티션 위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내 손을 밀어 버리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이야?”
“손 좀 잡아줘.”
“돌았냐?”
“다른 사람 손은 잡아 주면서, 내 손은 못 잡아줘? 어제 끝나고 어디 갔었어?”
“어……. 어디 가긴? 당연히 집에 갔지?”
“곧바로?”
“다…… 당연히 곧바로 갔지!”
당황한 표정의 김태하.
그를 놀리는 것은 무척 재미있다.
“올라가서 커피 한 잔만 받아와.”
“왜 그러는데? 너 진짜 돌았어? 아직도 술이 안 깨?”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고 빨리 받아오는 게 좋을 텐데?”
“뭔데? 이유라도 알아야 하든 말든 하지?”
“이유? 그럼 지금 큰 소리로 말해 줄까? 건강식품 팀까지 다 들리도록?”
김태하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내 입을 틀어막았다.
“너…… 봤지?”
고개를 끄덕이자, 김태하는 귀까지 벌게졌다.
나는 내 입을 막은 그의 손을 떼어 내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입은 가리고 지랄이야?”
“라떼? 아메리카노?”
빠른 태세전환.
역시 김태하는 나에 대해 너무도 잘 안다.
“따뜻한 바닐라 라떼로 부탁해.”
“따바라 오케이! 접수 완료!”
“김 팀장! 그거 좋아 보이는데?”
“뭐?”
“그거 의자에 걸려 있는 하얗고 비싸 보이는 거.”
나는 김태하가 아끼는 목베개처럼 생긴 안마기를 가리켰다.
일전에 한번 해 보자고 했을 때, 때 탄다며 절대 안 주던 물건이다. 그는 안마기를 물끄러미 보다, 전원선을 떼어 내며 내게 건넸다.
“가져. 싫증 났어.”
“정말이지?”
“안 그래도 버리려고 했거든.”
“그 좋은 걸 버린다고? 요즘 애들은 참 문제야. 싫증 난다고 금방 버린다고나 하고……. 버릴 거면 나 줘.”
“그래. 대신 조용히 하는 거다.”
“너 하는 거 봐서. 근데 따바라 받아온다는 사람은 말레이시아 바닐라 공장이라도 갔나? 왜 이렇게 안 와?”
“알았어! 가! 간다고!”
나는 김태하가 쓰던 안마기를 목에 걸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때, 김대성이 큼직한 박스를 두 손으로 들고 내 앞으로 달려왔다.
“팀장님!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큰일 났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상온 창고 가 봤는데, 냉동식품들이…….”
김대성은 들고 있던 박스를 내 앞에 내려놓고, 뜯어서 안의 상태를 보였다.
“어떡하죠?”
냉동 창고로 가야 할 제품이 다 녹아, 박스 밑에 물이 흥건한 상태였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제품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제품이 이미 변질해서, 판매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얼마나 됐죠?”
“3일, 이거 3일 전에 들어온 것들이에요.”
“수량은?”
“3천 개가 좀 넘을 겁니다. 어떡하죠? 다시 냉동 창고에 넣으라고 할까요?”
“미쳤어? 이거 다시 냉동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팀원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그리고 내 앞의 박스로 다가와 안에 있는 제품을 확인했다.
“하 이거……. 완전히 갔네. 갔어. 누가 이런 거야?”
“창고 관리 직원이 실수한 것 같아요. 여기 박스에 분명 냉동이라고 표기되어 있잖아요.”
마 과장의 질문에 김대성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옷걸이에 있는 상의를 걸쳐 입었다.
“대성 씨 일단 가 봅시다.”
“네?”
“창고! 창고 가 보자고!”
“예. 알겠습니다.”
김대성이 팔을 걷고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러자 마성근 과장과 하연두, 이우진까지 따라붙었다.
“팀장님 같이 가요! 그거 둘이 다 못 해요.”
* * *
우린 30여 분을 차로 달려, 창고가 있는 남양주에 도착했다.
이미 물류 사업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최고 담당자까지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본사에서 오셨죠?”
“네. MD 사업부 특판 팀의 원지훈입니다.”
“남양주 물류 사업부, 센터장 최민용입니다.”
“제품들 어디 있습니까? 우선 폐기할 수량 파악부터 하겠습니다.”
“폐기요?”
최민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폐기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전부 다 급속 냉동고로 옮겨 놨습니다.”
“뭐라고요?”
“냉동 창고에 잘 뒀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요.”
이미 실온에 하루 이상 방치된 제품들을 다시 냉동 창고에 넣었다고?
이건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다.
나는 최민용 부장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습니까? 창고를 관리한다는 사람이 냉동식품이 실온에 방치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팀장님.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겨우 삼일…….”
“겨우 삼일? 지금 장난합니까? 장난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