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듣는 회사원-12화 (12/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2화>

13. 오타를 수정한 것처럼요?

7층 대회의실.

MD 사업부의 팀장들과 특판 팀 전원.

그리고 최구열 이사가 지휘하는 전략 기획팀 인원이 모였다.

나는 단상 앞으로 나와 최구열 이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

최 이사는 자신의 여비서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사람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모든 직원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만을 거론했고, 정근영 대표는 간단한 약력만 추가할 정도였다.

최 이사는 맨 앞줄에 앉아, 나에게 시작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마이크에 바짝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MD 사업부 특판 팀의 원지훈입니다. 준비한 PPT를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불이 꺼지고, 커다란 스크린에 PPT의 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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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ㅅ식품 특판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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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팀원들은 크게 당황하여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기 바빴고, 김태하는 고개를 숙이고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차기영 부장은 옆에 앉은 박대영 차장과 함께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 이게 왜 이렇게 됐지?”

“어이 원 팀장! 오타치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ㅂㅅ이 뭐야. ㅂㅅ이……. 하하하하하하.”

나는 배를 잡고 웃는 차 부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좀 심했죠? 빨리 고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PPT의 제목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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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식품 특판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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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ty Time이라는 좋은 뜻을 가진 QT식품을 한순간에 ㅂㅅ식품으로 만들어 버렸네요. 이제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방금까지 키득거리던 차 부장과 박 차장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QT식품을 만났고, 새로운 계약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자판을 한글로 놓고 QT식품을 치면, ㅂㅅ식품.

이 또한 내 실수인 줄만 알고 키득거렸을 것이다.

나는 옅은 미소와 함께, PPT의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

“QT식품은 온라인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회사입니다. 재구매율을 비교하면, 우리 지주 회사인 BO푸드보다 높습니다. 또한, 브랜드를 인지하고 들어오는 소비자가 많아 페이지 방문자 대비 구매율이 무려 37%나 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준비한 그래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는 QT의 특별한 전략이 먹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냉동 피자는 일반 도우를 페스츄리로 변경하여 식감을 좋게 만들었고, 전복죽에는 전복을 슬라이스로 썰어 더 풍성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황도 통조림도 사각 슬라이스로 썰어 먹기 편하며, 저열량 마요네즈는 일반 마요네즈 칼로리의 10분의 1수준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제품에 대한 설명들.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최 이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다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제품 스펙은 그 정도면 됐고, 판매 전략에 대해 듣고 싶군요.”

“예. 그럼 짧고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QT에 없는 브랜드 이미지를 타 브랜드로 채울 생각입니다.”

“대형 브랜드의 번들(bundle, 묶음)로 넣겠다는 겁니까?”

“대충 비슷합니다. 냉동 피자는 무알코올 맥주와 세트 구성하고, 전복죽은 인삼 한 뿌리 음료와 황도는 밸런스 샐러드, 저열량 마요네즈는 닭가슴살과 함께 구성할 생각입니다.”

“그럼, 기존의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죠?”

“당연히 파기하고 새 계약을 맺을 생각입니다.”

최 이사는 하얀 이를 드러내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 오타를 수정한 것처럼요?”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을 길게 끌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발견하는 즉시 고쳐야죠.”

내 말이 끝나자, 안절부절못하던 차기영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 팀장!”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지금 장난해? 아직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어! QT는 내가 체인에서부터 공들여온 제조사라고!”

“네, 압니다. 많이 공들이셨다는 거. 그래도 바꿀 수 있을 때 바꾸는 게 좋겠죠.”

자신의 밥그릇을 뺏길까 두려운 차기영 부장.

그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버럭 소리부터 질러 댔다.

“조건이 다르잖아! 그 많은 수량을 사들였다가 실패하면? 자네가 책일질 거야? 아니, 자네 위치에서 책임질 수나 있어? 원 팀장, 네가 몰라서 그러나 본데,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 제품은 그냥 안전하게 가는 거야. 지금처럼 그냥 위탁으로 돌리는 게 최선이라고!”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고개를 빳빳이 세운 김지영 이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차 부장을 쏘아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부장님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

지주 회사 BO푸드 회장의 둘째 딸 김지영 이사.

이보다 확실한 답이 있을까?

그녀가 책임지겠다는 말에 차 부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최구열 이사는 나와 김지영 이사를 번갈아 보다,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수고했어요. 대표이사님께는 제가 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차 부장님!”

최구열 이사는 몸을 돌려 차 부장을 불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차 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

“잘못된 건 고쳐야죠. 그게 맞겠죠?”

“…….”

“일이 커지기 전에 누군가 먼저 고쳐준다는 것에 고마워하셔야 할 것 같군요.”

설마, 최 이사도 차 부장이 리베이트를 받는 것을 알고 있었나?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차 부장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최구열 이사는 나에게 묘한 웃음을 남기고, 김지영 이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둘이 뭔가를 숙덕이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모였던 직원들이 회의실을 하나둘 나가자, 마 과장과 하연두가 재빨리 내 옆으로 달려왔다.

“아까 얼마나 식겁했는지 아세요? QT를 어떻게 ㅂㅅ으로 적습니까?”

“그러니까요. 저도 놀랐어요.”

“잠깐만요.”

나는 마 과장과 하연두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는 차 부장의 앞을 막아섰다.

차 부장은 나를 죽일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사내 인트라넷, 언론, 경찰……. 그건 너무 가벼울 것 같아서요. 겨우 몇 년 살다 나와서 죗값 다 치렀다고 생각할 텐데. 그 꼴은 못 보죠.”

차 부장은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가만 보고 있던 김태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수고했다.”

“뭘?”

“대충 알고 있었어. 다른 팀장들도 그렇고.”

“그래? 근데 왜 그냥 뒀어?”

“글쎄.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 솔직히 나도 그랬으니까.”

김태하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이었다.

“퇴근 시간 거의 다 됐지? 가자.”

“어딜?”

“이런 날 소주 한잔해야지.”

체인마켓에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왔던 차기영 부장.

규모가 어느 정도고, 얼마나 오래 해 먹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정의감? 애사심?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그의 밥그릇 하나를 뺏어 왔다는 것에 만족한다.

나는 앞으로도 그의 손발을 잘라 내고, 하나씩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나와 내 팀원들.

그리고 마켓 프레시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이 가질 수 있도록.

*   *   *

퇴근 후 들른 삼겹살집.

김태하는 이 집의 삼겹살과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바꿔가며 일주일에 이틀 이상을 이 집에서 식사하고 갔다.

주문한 고기가 나오자.

김태하는 아직 달궈지지도 않은 불판에 올려 버렸다.

“야!”

“왜?”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집게 내놔.”

“땡큐!”

“어떻게 고기 좋아하는 놈이 고기를 굽지도 못해? 금수저다 이거냐?”

김태하는 씩 웃고, 들고 있던 집게를 내려놨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어가게 직원을 불렀다.

“미정 씨! 여기 된장찌개랑 밥 좀! 내 스타일 알죠?”

다른 테이블을 정리하던 삼겹살집의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직원도 알아?”

“너, 미정 씨 몰라?”

“저분을 내가 어떻게 알아?”

“건너편에 곱창집 알지? 미정 씨가 거기 알바였는데, 힘들다고 해서 내가 이쪽으로 옮기게 도와줬어. 곱창, 대창 굽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

넉살과 너스레 그리고 지랄 맞은 오지랖까지.

이놈은 진짜 타고난 놈이다.

“대단하다 대단해. 가끔 너 보면 진짜 무서울 때가 있어.”

“그나저나 ㅂㅅ푸드…… 크크, 내가 올해 본 PT 중에 가장 감동이었다.”

“이 정도로 뭘.”

김태하는 고기쌈을 싸서, 자신의 입안에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3배 이상 매출 땡길 수 있겠어? 아무리 번들로 넣는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겠어?”

“너도 시간 나면 QT 냉동 피자 먹어 봐라. 진짜 죽인다.”

“오 그래? 하여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래.”

“오늘 차 부장 표정 기억나? ㅂㅅ이 QT인 줄도 모르고 처음에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알아?”

김태하는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를 힐끔 봤다.

그리고 내가 고기를 구우면 휴대전화를 들어 어딘가로 카톡을 보내는 것 같았다. 대화 중에도 혼자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요새 게임 하냐?

“게임은 무슨, 그런 거 할 시간 없다.”

“연애할 시간은 있고?”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추는 김태하.

그냥 던져 본 건데 제대로 걸렸다.

“연애는 무슨……. 일하느라 바쁘지.”

“아까부터 계속 톡 오던데?”

“아, 이거? ……택배. 그래 택배야. 내가 요새 쇼핑한 게 좀 많아서, 하핫.”

웃는 것도 어색하다.

이놈은 거짓말을 정말 못한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조금 전 김태하가 따라준 맥주병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회식은 잘하고 있나? 술도 못하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지.>

<이따 데려다줘야겠다.>

휴대전화를 보고 히죽거리던 김태하는 건성으로 맥주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잔에 맥주를 따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따 데려다주려면 조금만 마셔.”

“응, 그래야지. 뭐…… 뭐야!”

눈을 휘둥그레 뜨는 김태하.

휴대전화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 질문에 답한 것이다.

“뭐긴 뭐야. 걸린 거지. 누구야?”

“너…… 너 데려다준다고. 오늘 큰일 했잖아.”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정성껏 해? 계속 카톡 보내는 그분이 아니고?”

“무슨……. 택배! 택배라니까!”

“이게 누굴 속이려고? 너 지금 얼굴에 완전 써 있어. 나 연애함이라고.”

“그…… 그래?”

손에 끼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김태하.

이제 실토를 하려나 보다.

나는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물었다.

“어떤 여자야?”

“음……. 예쁘고, 귀엽고, 성실하고, 착하고, 섹시하고, 요리 잘하고, 말 잘하고, 애교도 많고, 음……. 음……. 또 뭐 있지?”

“없을 거야. 그거 말고 더는 없을 거야.”

“아 맞다. 나한테 정말 잘해 줘.”

눈에서 하트가 쏟아진다.

그 이후 김태하는 대놓고 휴대전화를 보면 대화했다. 아니, 카톡을 하는데 내가 끼어드는 꼴이었다.

“재미없다. 나갈래.”

내가 투정을 부리자, 김태하는 한 손을 올려 잠깐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깐! 잠깐만!”

“왜?”

“건강식품 팀 회식한다는데 갈래?”

“내가 거길 왜 가?”

“너 최충연 팀장이랑 대화도 안 해 봤지? 한 번 가서 만나 봐. 나는 벌써 형 동생 하기로 했거든, 사람 진짜 좋아.”

최충연 팀장은 체인마켓에서 넘어온 차 부장의 사람.

딱히 대화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김태하의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갑자기 그가 궁금해졌다.

“그럴까?”

“응 가자! 저기 건너편 세계맥줏집이래.”

김태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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