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11화>
12. 새 술은 새 부대에
아메리카노와 라떼 하나씩을 받아 옥상으로 돌아왔다.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던 김호연 대리가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대리님이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둘 다 받아 왔어요. 뭐 마실래요?”
“저는 라떼 먹겠습니다.”
나는 라떼를 그에게 건네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호연 대리님, 요새 많이 바쁘죠?”
“그럭저럭 할 만합니다.”
“보니까 일보다 차 부장님 심부름하기 바빠 보이던데?”
“그걸 어떻게…….”
“차 부장님이 얼마나 대리님을 칭찬하던지, 건강식품 팀은 호연 대리님 없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차 부장님이요?”
여기까지는 밑밥.
이제 슬슬 미끼를 흔들어 유혹해야 한다.
“근데 요새 부장님한테 실수한 거 있어요?”
“네?”
“김지영 이사님한테 징계 얘기 들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씁쓸한 표정의 김호연 대리.
미끼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다.
“대리님이 다른 카테고리 상품들에 리베이트를 받을 리는 없고……. 왜 덮어쓴 거예요?”
“아……. 아닙니다. 그건 제가…….”
“부장님 그늘은 아주 넓죠. 하지만 문제는 그 그늘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
“우리 팀에 마성근 과장님 아시죠? 그분이 BO푸드에 계실 때 제대로 된 라인만 잡았대요. 근데 매번 승진에서 순서가 밀리더랍니다. 이번엔 승진하겠지 하면 다른 동기가 올라가고, 이번엔 정말 나겠지 하면 후배가 올라가더랍니다. 과연 부장님이 생각하시는 순서에서 대리님은 몇 번일까요?”
김호연 대리의 동공이 심하게 떨려 왔다.
조금씩 내 말에 동요하는 것이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었다.
“아우 써라. 내가 원래 라떼 마시려고 했는데…….”
“그럼 제가 빨리, 한 잔 받아오겠습니다.”
김호연 대리가 몸을 돌리려 할 때, 나는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니, 귀찮게 뭘 또 받아와요? 그거 한 모금만 마실게요.”
오른손으로는 김호연 대리가 들고 있는 잔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원지훈이는 절대 차기영이처럼 못 해 줘.>
<3천이면 충분하잖아?>
<욕심내다가 탈 난다.>
청진그룹 제품들의 사입비는 많아야 2억.
미치지 않고서는 리베이트로 3천이나 찔러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방금 받은 일회용 잔.
지금 들린 이것은 내가 던진 미끼에 대한 답이 확실하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김호연 대리는 라떼 컵에서 손을 뗐다.
“그냥 다 드세요.”
“하하, 고마워요.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오늘 내가 한 말 절대 비밀이에요. 특히 차 부장님한테는요.”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아신다니 다행이네. 오늘 내가 한 말 천천히 생각해 봐요. 내 그늘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요.”
물론,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리고 김호연 대리도 이미 많은 것이 엮여 있는 차 부장을 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차 부장이 김호연에게 3천이나 줬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연두 씨!”
하연두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예, 팀장님.”
“인트라넷에 각 팀 계약 현황 나온 것들 정리 좀 해 줘요.”
“예. 알겠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중복 항목들 다 포함해서 주세요.”
“네!”
하연두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손가락을 풀고,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여 분 후, 잘 정돈된 엑셀 파일을 내게 가져왔다.
제일 먼저 차 부장 라인인 가전, 건강식품, 신선식품 팀의 계약 사항들을 비교했다.
QT식품, QT전자.
겹친다. QT홀딩스의 계열사 둘이 겹친다.
그리고 수수료율도 24%.
우리 마켓 프레시의 평균 수수료율보다 조금 낮다.
나는 바로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그리고 체인마켓에서 QT홀딩스 제품을 팔았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체인마켓 사이트는 없어졌지만, 그들이 했던 바이럴 광고 덕분에 블로그에는 여전히 판매했던 상품들이 남아 있었다.
냉동 만두, 냉동 피자, 핫도그, 전자레인지, 식기 세척기, 항균 도마 등등.
많다. 그것도 너무도 많다.
차기영…….
체인마켓에서부터 QT홀딩스의 리베이트를 받았던 것인가?
그때.
“QT는 왜요? 그쪽 물건 받으시려고요?”
언제 왔는지, 마성근 과장이 내 모니터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요. 근데 QT식품은 왜 보세요? 그쪽 물건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거기 브랜드 매니저가 제 친구거든요.”
“친구요?”
“BO에 있다가 나간 놈인데,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했다네요. 아 참, 게네 주력이 냉동 피자예요. 그거 저도 자주 사 먹는데 꽤 괜찮아요.”
“과장님. 제가 그분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언제 보자고 할까요?”
“가능하면 빨리요.”
“알겠습니다. 바로 전화 넣도록 하겠습니다.”
마 과장이 신이 난 표정으로 답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마 과장님, 저한테 용건이 있던 거 아니셨어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다음 주 판매될 제품 리스트입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 * *
3일 후.
나와 마성근 과장은 QT식품을 찾았다.
회의실로 올라가자, 마성근 과장의 동기라는 남자가 미리 나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식품 사업부 최종훈이라고 합니다.”
“원지훈입니다.”
“한번 뵙고 싶었는데, 성근이 덕에 뵙네요.”
“두 분이 많이 친하신가 봐요.”
“네 많이 친합니다. 가끔 가족끼리 만나기도 하고요. 앉으시죠.”
나와 마 과장은 최종훈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잠시 밖으로 나가, 캔 음료들을 잔뜩 들고 왔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있는 대로 다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듣자 하니, 저희와 특판 계약을 원하신다고요?”
최종훈의 침착한 목소리에 마성근 과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최 부장. 우리 오픈 첫날 200억 매출기사 봤지?”
“그래, 봤다. 안 그래도 그 기사 때문에 우리도 커머스를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아주 난리다. 난리.”
“그게 아무나 되나? 여기 원 팀장님은 식품 커머스 탑 찍은 분이야. 그리고 최구열 이사님도 알지? 그룹폰 말이야!”
“당연히 알지. 나 최구열 이사님 책도 사 봤다고!”
최종훈은 살짝 미소를 짓고, 한 손을 턱에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성근이 얘기 듣고 조금 의아했습니다. 저희는 이미 BO커머스와 계약을 한 상태인데, 왜 다른 계약 건을 말씀하신 건지 이해가 안 돼서요.”
“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희 특판 팀은 새로운 계약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계약이요?”
“위탁이 아닌, 사입의 형태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제품이 판매되고 대금을 지급하는 위탁 판매는 MD의 역량에 따라 판매율이 좌지우지된다. 따라서 제조사나 벤더들은 MD의 입김에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품가를 먼저 지급하는 사입의 형태라면 다르다.
MD의 입김에 휘둘릴 필요도 없고, 현금화하는 시간이 빠르기에 제조사들이 가장 선호할 수밖에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뜬 최종훈.
나는 봉투에 넣어 왔던 문서를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건 저희가 원하는 품목들입니다. 대신 수수료율을 30%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제품들은 이미 마켓 프레시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습니다. 프로모션도 나름 잘 해 주시고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자신이 있으니까요.”
“네?”
“QT제품들로 이전보다 3배 이상 매출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최종훈은 고개를 숙이고 내가 건넨 문서를 확인했다.
그 사이 마성근 과장이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종훈아 이건 기회야. 어떤 커머스가 이 정도 수량을 사입해 가?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후…….”
마성근 과장의 말에 최종훈은 그저 긴 한숨만 내쉬었다.
대충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리베이트 계약을 한 차 부장과 내가 던진 이 제안을 비교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캔 음료 하나를 따서, 최종훈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온라인 시장은 계속 커지는데, QT만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를 생각이십니까? 변화가 없으면 남들에게 뒤처질 뿐입니다.”
“…….”
“잘 생각해 보시고 3일 이내로 답을 주십쇼. 만약 답이 없다면, 저희 제안을 거절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 * *
이틀 후.
마성근 과장이 아침부터 호들갑이다.
“팀장님! QT에서 메일 왔습니다.”
“뭐라던가요?”
“당연히 수락하겠다는 내용이죠. 계약서가 준비되면 보내 달라고 합니다.”
“잘됐군요.”
“제가 이거 성사시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십니까? 하하하. 매일 밤 전화하고, 우리 특판 팀 판매 통계 뽑아서 보내고…….”
“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셨다고요?”
“마 과장님 스타일은 이제 좀 압니다. 하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마성근 과장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답장을 보내라 지시하고.
곧바로 김지영 이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원 팀장. 무슨 일이야?”
책상에 앉아 있던 김지영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내 도움?”
그녀는 책상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준비한 계약서 초본을 보여 주며 입을 열었다.
“QT식품과 특판 계약을 하려고 합니다.”
“특판 계약? 그건 MD 사업부 차 부장이랑 얘기해야지. 왜 나한테 왔어?”
“이게 일반적인 위탁이 아닌 사입 계약이라,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QT식품 제품을 사입한다고?”
“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지?”
나는 QT식품과 차 부장의 리베이트에 관해 말했다. 물론 아직 정확한 물증은 없다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내 얘기를 듣던 김지영 이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원 팀장이 단순히 차 부장을 물 먹이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 안 하는데……. 내 생각이 맞겠지?”
“차 부장 때문에 시작하긴 했지만, QT식품 일부 제품군은 온라인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존보다 수수료를 6%나 높이고, 판매까지 늘어나면 회사에도 큰 이익이 될 겁니다.”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그래. 그건 알겠어. 근데 차 부장은 어떻게 하려고?”
“회사의 솜방망이 처벌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말려 죽일 겁니다.”
“말려 죽인다고? 그럼 차 부장이 가만있겠어?”
“가만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죠.”
“흠…….”
그녀는 그 이후로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직접 운전해서 출근한 이야기.
어제 종영한 드라마 이야기.
그리고 회사 근처 맛집과 같은 사적인 얘기들뿐이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간단한 PPT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충의 PPT가 완성되고, 사내 메신저로 MD 사업부와 전략 기획팀의 공동 회의를 요청했다. 그리고 최구열 이사가 직접 회의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전략 기획부장에게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