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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10화 (10/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10화>

11. 남자 새끼가 쪽팔리게

유난히 날씨가 좋은 일요일.

보통 같으면 소파에서 뒹굴며 서프라이즈를 시청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김지영 이사와의 약속 때문에 분주하게 외출을 준비해야 했다.

한강 반포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김지영 이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나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듣고 있던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 차에서 내려 간단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때 새하얀 포르셰 파나메라가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시속은 5킬로?

아니, 액셀을 아예 밟지 않고 중간중간 브레이크만을 밟는 것 같았다.

덜컹거리던 차가 내 앞에 급정거했다.

끼익.

운전석 문이 열리고 선글라스를 낀 김지영 이사가 내렸다.

검은 레깅스에 초록색 맨투맨 티셔츠.

짧은 단발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회사에서 볼 때보다 훨씬 어리고 청순해 보였다.

“오셨어요?”

“미안 오래 기다렸지?”

“네. 아주 오래 기다렸습니다.”

“정말 미안. 내가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서……. 대신 점심 맛있는 거 사줄게.”

“네. 그러셔야 할 겁니다.”

나는 김지영 이사가 끌고 온 차를 살폈다.

처음 도로에 끌고 나온 것처럼, 차의 외관과 바퀴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뒷유리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초보운전이라 붙인 것이 너무도 귀여웠다.

“처음 보는 거 같네요.”

“뭘?”

“1억 5천이 넘는 포르셰에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이는 사람이요.”

“너무 큰가?”

“그 말이 아니라 보통의 여자들은 작은 경차로 운전을 배우는데…….”

“이거 경차잖아?”

“뭐, 이사님한테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씩 웃고 조수석에 앉았다.

잡티 하나 없는 시트와 아직 비닐도 떼지 않은 뒷좌석.

정말 새로 뽑은 지 일주일도 안 된 차였다.

김지영 이사는 운전석에 올라타, 하얀 장갑을 끼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장갑은 왜 껴요?”

“미끄러질까 봐. 지훈아 내가 운전해서 양평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거면 포기하시고, 이른 저녁은 가능할 겁니다.”

“양평이 그렇게 멀어?”

“아까 이사님 운전하고 오시는 거 보니까 최소 3시간은 걸릴 것 같아서요.”

“치이…….”

입을 삐죽 내미는 김지영 이사.

회사에서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말투에 애교가 섞여 있다.

“이제 가 볼까요? 백미러, 룸미러 다 맞추셨죠?”

“응.”

“그럼 액셀 천천히 밟으시고.”

“그…… 그래. 이렇게?”

김지영 이사는 액셀을 밟으며 조수석에 있는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앞에! 앞에 봐요! 저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요!”

“아…… 알았어!”

“운전은 앞만 보고 하는 겁니다. 말을 할 때도, 음료수를 먹을 때도, 욕을 할 때도, 무조건 시선은 전방입니다.”

“그…… 그래.”

“저쪽 출구로 나가셔서 올림픽 타고 쭉 가시면 돼요. 어때요 쉽죠?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시속 80킬로만 맞춘다고 생각하시고 제일 끝 차선만 타고 쭉 직진할 겁니다.”

“응.”

올림픽 대로로 올라가기 전.

김지영 이사는 쌩쌩 달리는 차들에 겁먹고 끼어들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니, 뒤에 있는 차들이 빵빵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어떡해?”

초조한 표정으로 백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 보는 김지영 이사.

나보다 무려 10살이나 많은 그녀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그냥 무시하세요.”

“응?”

“뒤에서 뭐라고 하던 그냥 무시하세요. 이사님은 포르셰니까요.”

“으응?”

잠시 후.

달리는 차들이 줄어든 틈을 타, 천천히 도로에 합류했다.

평균 속도는 40킬로.

뒤에서 빵빵대는 소리와 하이빔이 난무했지만, 김지영 이사는 내 조언대로 모든 것을 무시했다. 가끔 창문을 열고 욕을 하는 운전자들도 있었는데, 그 또한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올림픽 대로를 벗어나니, 김 이사도 어느 정도 운전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 비슷한 노래들만 흘러나왔고 조금씩 지루해졌다.

“처음치고는 괜찮네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갑니다.”

“본격적인 수업?”

“창문을 여세요.”

“창문?”

“이제 왼쪽 팔을 창문에 걸쳐요. 어때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좋죠?”

“이…… 이렇게?”

“좋아요! 자세 아주 좋아요.”

김지영 이사는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한 손을 창 위에 걸쳤다. 그렇게 1시간을 더 달려 드디어 양평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태하랑은 잘 지내지?”

“네. 가끔 까부는 거 빼고는 봐줄 만해요.”

“하하, 그래. 너희 둘이 워낙 친했으니까. 회사 생활은 별문제는 없고?”

“저번에도 물어보셨잖아요.”

“그랬나? 내 눈에는 너나 태하 다 어린아이로 보여서 그래. 정진택 팀장하고는 어때?”

“잘 몰라요. 딱히 부딪칠 일이 없었어요.”

정 대표의 아들 정진택 팀장.

그와는 겹치는 일도, 사무실에서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다.

“그렇구나. 나 내비 좀 찍어 줄래?”

“어디로 찍을까요?”

“양평 파머스 레스토랑. 내가 제일 비싼 거로 사줄게.”

“당연히 그러셔야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그녀가 부르는 식당 이름을 내비에 등록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텅 빈 레스토랑 주차장에 주차했다.

시간은 오후 3시.

브레이크 타임이라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김지영 이사는 식당 앞 정원을 걷자고 했고, 나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이사님.”

“회사도 아닌데, 그냥 예전처럼 누나라고 불러.”

“아니요. 그렇게 못하죠. 제가 다섯 살만 늙었어도 너라고 부르고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 줬을 텐데.”

솔직히 절반은 진심이다.

만약 태하의 누나가 아니고.

회사의 이사도 아니며.

다섯 살 이하로 차이가 났다면.

정말 그녀에게 대시했을지도 모른다.

내 말에 김 이사는 피식 웃었다.

“네가 무슨 이승기냐? 그리고 이거 나 멕이는 거지? 늙었다고 멕이는 거 맞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근데 차 부장은 어떻게 됐어요?”

내 질문에 그녀는 미소를 지우고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박쥐는 자기가 위기에 처하니까 꼬리를 잘라 내더라.”

“꼬리가 누군가요?”

“건강식품 팀의 김호연 대리.”

“대리요? 겨우 대리 하나 내친 거예요?”

“아니, 내친 게 아니라 1개월 감봉으로 마무리 지었어.”

리베이트 건에 1개월 감봉 수준이라니.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이사님도 아시잖아요. 그거 대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

“물론 알지. 근데 이건 대표님 결정이야. MD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거마비는 인정해 주자고 하더라.”

“정 대표님이요?”

MD만큼 리베이트와 밀접한 직업은 없다.

거마비라는 명목으로 몇십만 원 찔러 주는 건 관례처럼 되어 있고, MD가 이를 거부하면 벤더들은 선물 공세로 나선다. 또한 예산이 부족한 제조사는 자신의 제품을 써 보라며 들이미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제 막 시작하는 데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기 싫었나 봐. 내가 경솔했어. 오히려 차 부장과 척을 지고 말았으니까.”

“아니요. 잘하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만약 이사님이 나서지 않았다면 제가 나섰을 겁니다.”

“네가?”

“처음에 저 불러서 말씀하셨죠? 꿈이 뭐냐고요. 그때 제가 1등 커머스가 꿈이라고 하니까, 그런 꿈을 꾸는 직원들이 많고 이사님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죠?”

“…….”

“술도 못 마시는 마 과장은 배달 앱 쿠폰을 받아 내려고 하루에 4개 업체를 만나 술을 마셨어요. 김 대리는 시차가 다른 외국에 전화하느라 매일 같이 밤을 새웠고요. 하연두 씨는 지난 2주 동안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김옥순 여사 곰탕집으로 출근했어요. 제대로 된 커머스를 만든다는 것은 제 꿈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너무 고맙네.”

김지영 이사는 고개를 숙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이사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청진그룹 장필영……. 내가 걔를 좀 알아. 절대 정상적으로 일하는 애가 아니란 걸 말이야. 그래서 혹시나 해서 떠본 거야.”

“아무런 증거도 없이요?”

“맞아. 심증만 있었지, 물증은 없었어. 그날 차 부장 당황한 거 보니까, 맞구나 싶어서 더 몰아친 거였고.”

“남자 새끼가 쪽팔리게…….”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김호연 대리라고 하셨죠?”

“왜?”

“그 친구 말도 들어 봐야죠. 자기가 꼬리가 되고 싶었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꼬리가 됐는지를요.”

“뭘 어쩌려고?”

“그냥 지켜보세요. 이사님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월요일 아침.

게시판과 사내 인트라넷, 그 어디에도 김호연 대리의 징계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어쩌면 1개월 감봉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체인마켓 출신인 이우진을 옥상으로 따로 불러냈다.

“우진 씨. 김호연 대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호연 대리님이요?”

“네.”

“좋으신 분이에요.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 저 데리고 거래처들을 돌았거든요. 거래처 담당자들과도 아주 친해 보였고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도 많은 걸 배웠어요. 근데 호연 대리님은 왜요?”

“그 친구 차 부장하고 각별해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팀장님…….”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는 건지, 불러놓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

나는 이우진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요?”

“저, 팀장님. 마 과장님 말 안 믿으시죠?”

“무슨 말?”

“술만 드시면 저한테 차 부장님 스파이라고 하는 거요.”

이우진은 그 말이 계속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팀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을 것이다.

“아니요. 전혀 신경 안 써요.”

“네?”

“우진 씨가 아이도 아니고, 어차피 차 부장과 나 둘 중에 본인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선택할 테니까요.”

“…….”

“난 그만큼 자신이 있어요. 내가 가진 그늘이 더 크기에 우진 씨가 나를 따라줄 거라는 자신감이요.”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진 씨, 내려가서 몰래 김호연 대리 좀 불러줄래요?”

“몰래요?”

“네.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해 줄 수 있죠?”

“예.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낯빛이 좋지 못한 김호연 대리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담배 피워요?”

“네.”

김호연은 내가 건네는 담배를 받았다. 불을 붙여 주자,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잡고 급하게 빨아 댔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담배 맛있게 피우네.”

“네?”

“그냥 궁금했어요. 호연 대리님은 담배를 어떻게 피우는지.”

김호연 대리는 내 말도 안 되는 농담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갈증 나는데 커피 한잔할래요?”

“예.”

“아차, 나 사원증 두고 왔는데, 잠시만 빌려 갈게요.”

“아닙니다.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내가 불러냈는데, 서빙이라도 해야지. 담배 맛깔나게 피우던데, 한 대 더 빨고 있어요. 내가 바로 가져올 테니까.”

나는 김호연 대리가 손에 쥐고 있는 사원증을 강제로 뺏듯이 확 낚아챘다.

사원증.

이건 회사에 있는 동안 항상 몸에 붙어 있는 물건이다. 그만큼 많은 생각을 저장하고 나에게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내 선택은 정확했다.

<건강식품 팀? 이번에도 글렀네.>

<그냥 정진택한테 붙을까?>

<차기영 개새끼,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최충연이는 허수아비구만. 확 제껴 버려?>

<왜 10시까지 남아 있으라는 건데?>

<또 심부름이야?>

<업무 보고는 뭐라고 쓰지? 그냥 차기영이 심부름이라고 쓰고 엿 먹여 버릴까?>

<원스몰에 원지훈? 걔도 넘어온다고? 차기영이 비상이네! 히히>

들려오는 수많은 기억.

온갖 욕설과 남 탓이 난무하는구나.

김호연 대리는 소위 말하는 겉촉속까.

겉은 촉촉해 보이지만, 속은 까칠한 스타일이다.

이 많은 기억 중에서 지금 당장 결정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생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맞춰보면 분명 뭔가를 찾을 수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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