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8화>
9. 어떻게 알았을까?
마켓 프레시 오픈 D-3.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뒤로 젖히니, 창 사이로 들어오는 포근한 햇살을 느껴졌다.
따뜻함에 저절로 눈이 감겨 왔다.
그때.
“저……. 팀장님.”
언제 왔는지, 하연두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네?”
“메신저 확인하시라는데요?”
나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고, 마우스를 흔들었다.
모니터가 다시 살아나면서, 불이 난 사내 메신저가 보였다.
[팀장님. 김 이사님이 찾으십니다.]
[원 팀장님! 김 이사님 호출입니다.]
[원 팀장님!]
김지영 이사의 비서실에서 날아온 메시지들이 가득하다. 나는 곧 가겠다는 답변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바빴나 보네?”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른 김지영 이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좀 더 어리고, 청순하게 보였다.
“제가 아니라 저희 팀원들이 바빴죠. 근데 이사님 머리하셨어요?”
“머리? 아……. 알아봐 주니 고맙네. 여기 비서실 남자 직원들은 모르던데.”
“설마요. 이사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말 못 했을 겁니다.”
“그래?”
“이건 정말로 농담이나 아부하는 거 아닙니다. 이전보다 훨씬 잘 어울리세요.”
“하하하, 그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거 같다 야.”
김지영 이사는 크게 웃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따 3시에 임원 회의하는 거 들었지?”
“네.”
BO커머스에는 임원으로 불리는 20여 명의 이사, 부장, 차장들이 있다.
그 밑에는 30여 명의 팀장들과 200여 명의 직원들이 있다.
오늘 3시 회의는 오픈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한 것으로 모든 임원과 팀장들까지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17페이지, 타임 이벤트 제품들 좀 봐봐. 이거 너희 팀에서 다 준비한 거야?”
서류를 넘겨, 김 이사가 말한 페이지를 열었다.
총 12개의 상품.
차 부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출시한 지 6개월 이내의 제품들을 들고 왔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머릿수와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비록 6개월이지만 공격적인 마케팅들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고, 6개월간 매대 판매 수가 많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고개를 젓고, 보던 문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뇨. 7개만요.”
“실키 불 막창, 체리 탄산수, 벤트 새우 꼬치 이건 너희 팀에서 가져온 거 아니지?”
김 이사는 귀신같이 5개 중 3개를 골라냈다.
“어떻게 아셨어요?”
“나머지 2개는 뭐야?”
“오징어구이랑 캠핑용 소시지 모음이요. 이건 차 부장 쪽 사람들이 가져온 제품들입니다.”
“차기영……. 흠. 그래 일단은 알았어.”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야. 이따 회의 때 보자.”
무슨 생각인 건가?
나는 궁금한 마음에 손을 뻗어 그녀가 만지던 찻잔을 살짝 건드렸다.
<차기영이……. 그냥 두면 안 되겠는데?>
<지훈이는 관계없겠지?>
김 이사는 짧은 시간에 나와 차 부장에 대해 생각을 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차 부장이 가져온 5개의 제품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경쟁력이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딱히 하자가 있는 제품들이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김지영 이사가 다시 불렀다.
“지훈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창밖에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환한 표정을 더욱 빛나게 해 주고 있었다.
“네?”
“주말에 뭐 해?”
“지금 데이트 신청하시는 겁니까?”
실수다.
이 말이 왜 튀어나왔을까?
청순하고 단아한 저 표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천연 조명 때문이었을까?
김지영 이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장난이었습니다.”
“아니야. 기분 좋은데 뭐. 그냥 데이트 신청한 거로 하자. 사실은 내가 운전을 못 하는데, 차가 필요해서 이번에 새로 뽑았어. 시간 있으면 운전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제가요?”
“응. 원래 친한 사람한테는 운전을 배우는 게 아니라고 하잖아.”
“그래서 친하지 않은 저를 골랐다는 겁니까?”
“말이 그렇게 되나? 하하하 그래도 가르쳐 줄 거지?”
“예. 대신 후회하지 마세요. 전 완전 스파르타식이라서요.”
“그래. 스파르타 기대할게.”
김지영 이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 * *
오후 3시 최종 점검 회의.
커다란 회의 테이블에 20여 명의 이사, 부장, 차장들의 자리가 준비됐다.
갑자기 참석하게 된 팀장들의 자리는 양쪽 벽면에 줄지어 놓여 있는 간이 의자였다.
내가 가장 끝자리에 앉자, 김태하가 재빨리 걸어와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불 끄면 졸리겠는데?”
“좁아! 좀 떨어져!”
“좋으니까 그러지. 왜? 나 싫어? 자기 나 싫어진 거야?”
“아니. 아주 좋아서 죽여 버리고 싶다.”
김태하는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키득댔다.
잠시 후.
임원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불이 꺼지고, 디자인부장의 PPT 발표가 시작됐다.
“메인 컬러는 퍼플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포털들과 다른 색을 찾다 보니, 퍼플로 결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보인 마켓 프레시의 첫 화면.
깔끔하고 가독성이 높은 페이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생각보다 좋네.”
“그러네……. 이 좋은 페이지를 왜 이제야 공개한 거야?”
내 혼잣말에 김태하가 맞장구를 쳤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스크린에 보이는 마켓 프레시의 첫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BI에서는 고급스럽고 친자연적인 이미지들을 강조해 봤습니다. 저가 위주의 오픈마켓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체 개발한 프레시 폰트를 무료로 배포하여, 많은 웹에서 사용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디자인과 개발팀의 설명이 끝이 나고, 마케팅부장이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그는 노트북에 USB를 꽂은 후, 한참 동안 마케팅 전략에 관해 설명했다.
“타임 이벤트의 예상 임프레션(impression, 광고 노출 수)은 12억 뷰. 그리고 CTR(Click-through rate, 클릭률)은 0.15% 정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모바일 DA(Display AD, 배너광고)의 특성상 허수의 트래픽이 좀 있을 것으로 보이나,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최구열 이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마이크에 대고 물었다.
“CTR이 다소 높은데, 서버나 장비들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예. 마케팅 사업부에서는 개발팀과 이날 들어오는 최대 동시 접속자 수에 대한 예측을 완료하고, 이미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상태입니다.”
“제가 볼 때는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네?”
“이 정도의 메리트가 있는 이벤트라면, 분명 각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로 노출될 겁니다. 그에 대한 트래픽은 예측하셨나요?”
마케팅부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답했다.
“일단은 예상 데이터에 맞게 준비한 상태로 아직 변수들에 대해서는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게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습니다. L4 스위치를 더 늘리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DB 서버들 분산시켜놓으세요. 마스터가 죽으면 아무리 좋은 이벤트라고 해도 답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개발팀과 다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케팅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김지영 이사가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입을 열었다.
“부장님. 타임 이벤트에 들어가는 제품 리스트 좀 보여 주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각 시간대의 상품들이 대형 스크린에 나타났다.
김지영 이사는 차기영 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건 MD 사업부의 차 부장님이 설명하셔야 할 것 같군요.”
“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차기영 부장은 당당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각 상품의 스펙과 소비자가와 공급가 등을 차근차근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고 김지영 이사가 다시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전설의 김옥순 김치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좋네요. 생산은 모두 마쳤나요?”
“예. 지금은 개별 포장 중이고 내일 중에 저희 창고로 들어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배달 앱은 SMS 쿠폰이죠?”
“예, 맞습니다. 저희 MD 사업부에서는 이 쿠폰에 대해서도 매우 기대가 큽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팀이 준비한 제품들.
나도 만족스럽고 정말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김지영 이사는 눈을 내리깔아 자신의 앞에 있던 문서를 힐끔 보고, 다시 차 부장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차 부장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먼저 체리 탄산수는 오프라인 마트에서 꽤 잘 나간 것으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청진그룹에서 전량 사재기를 통해 초반에 이슈를 몰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 아셨습니까?”
“사…… 사재기요?”
“또한, 불 막창과 새우 꼬치 또한 청진그룹의 제품들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모르셨나요?”
“아닙니다. 불 막창과 새우 꼬치는 각각 다른 중소기업들의 제품입니다.”
“회사 지분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도 안 하셨나 보군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을 하신 건가? 실키의 경우 전체 지분 46%가 청진그룹 양지영 회장의 둘째 아들로 나오고, 벤트는 7살짜리 손자가 대주주입니다. 모두 재고 상품들의 포장지만 바꿔 쳐서 팔아 치우려는 수작들인데 정말 모르셨나요?”
순간, 회의실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차 부장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려왔다.
꿀꺽…….
“몰랐습니다. 오프라인에서만 판매하던 물건들이라 따로 후기나 리서치 결과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김지영 이사는 차 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차 부장님. 이번엔 좀 더 직설적으로 묻겠습니다. 제품 소싱 과정에서 청탁이 있었습니까?”
오프라인에서 주로 판매하던 제품들.
판매 수와 납품처에 대한 데이터가 전부다.
또한, 이 제품들은 너무 짧은 기간 안에 출시한 것들이라 소비자의 반응 또한 적었다.
근데 김지영 이사는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눈을 초롱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원지훈 팀장님!”
“예.”
“특판 팀에서 이 제품들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예비 품목들은 준비하셨나요?”
김지영 이사는 나에게 빨리 답하라는 강렬한 표정을 보냈다.
이건 나를 위한 것이다.
대표이사와 회사 전체 이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라는 사람을 돋보이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는 USB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스크린에는 내가 정리한 표가 나타났고, 난 이를 확인하고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총 13가지의 상품을 예비로 준비했습니다. 지금 리스트에 보이는 것들은 지난 3년간 아무런 사고도 없었고, 판매량 또한 꾸준했습니다.”
숙덕거리는 사람들.
최구열 이사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질문을 했다.
“골드 키위는 수입인 것 같은데, 제품은 확인하셨습니까?”
“예. 수입사에서 제공하는 샘플을 확인하지 않고, 저희 직원들이 직접 컨테이너로 들어가 무작위 검수를 마쳤습니다.”
“감자탕 패키지는 처음 보는 브랜드 같은데요?”
“청지 감자탕 패키지는 대형 마트에 PB(private brand)로 들어가던 제품으로, 마트와 재계약이 결렬된 제품입니다. 아직 브랜드의 인지도는 낮지만, 화면에 보이는 이미지 컷 하나로 소비자들을 인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 노마트의 PB 제품이군요?”
“맞습니다. 다른 소비자들도 이사님처럼 이 이미지 컷 하나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 제품들보다는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