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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듣는 회사원-7화 (7/223)

<기억을 듣는 회사원 7화>

8. 오길 정말 잘했다

띠리링!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5시.

국밥집 할머니가 시장을 갈 시간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은 변덕이 죽 끓듯 하기에 끝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특히 한 성깔 하는 김옥순 여사는 더 그렇다.

사소한 감정싸움 때문에, 큰돈을 벌 수 있던 기회까지 날린 분이니까.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10분여를 달려 시장 골목에 차를 세웠다.

문이 닫힌 국밥집 앞.

키가 작은 하얀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연두.

어제 함께 국밥집에 왔던 그녀였다.

처음 맡은 일이라는 책임감 때문인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골목 담벼락 사이에 숨어 그녀를 지켜봤다.

그때.

“문디……. 여서 뭐 하노?”

내 어깨를 꽉 잡는 할머니 때문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허. 인기척이라도 좀 하시든가?”

“내가 내 가게 오는 건디 뭔 인기척이고? 와? 또 시장 같이 가 줄라고?”

“아니. 오늘은 내가 아니라 저기 연두 씨가 같이 가 줄 거야.”

“욘두?”

“연두!”

“문디……. 내도 안다 욘두! 이번엔 맘 안 변하코 열심히 할 테니. 걱정 말그라.”

“엄마는 딸 없지? 아들만 둘이라고 했나?”

“그건 와 묻는디?”

“연두 씨, 심하게 하지 말고 딸처럼 잘 좀 대해 주라고. 엄마 도와준다고 새벽부터 나왔잖아. 응?”

“딸은 무신, 니는? 걍 가는 기가?”

“응. 회사에 할 일이 산더미야.”

“아라따. 그람 후딱 가봐라.”

“이따 연두 씨 출근할 때 표정 안 좋으면, 앞으로 엄마 다신 안 본다! 알았지?”

“아이코 무서버라. 아라따! 걱정하지 말기라.”

*   *   *

일찍 도착한 사무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이 냄새는 내 자리로 다가갈수록 더 심해졌다.

“피익미……. 픽…… 미 픽미어어어업…….”

내 자리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마성근 과장.

그는 양말을 가지런히 벗고, 외투를 덮은 채로 책상에 누워 있었다.

책상에 있던 키보드와 각종 집기는 이미 엉망이었고, 그의 상징이던 빨간 넥타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아직도 흥이 가시지 않는지, 자면서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자리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우선 이 퀴퀴한 냄새를 빼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책상 위를 봤다.

깔끔하게 정리된 PPT 문서 하나가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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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프레시 타임 이벤트 상품 기획안 #1

특판 사업 팀 대리 김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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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 대리가 준비한 문서.

일단 깔끔한 표지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오른손으로 문서를 잡은 순간, 김 대리의 생각이 들려왔다.

<가서 한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고 와야겠다.>

밤을 새운 건가?

나는 곧바로 문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제품 스펙, 소비자가, 공급가, 인터넷 최저가, 경쟁력, 리스크, 최근 이슈 등.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가 뽑아온 총 5개의 상품 중 쓸 만한 것은 2개.

그것도 해외 브랜드 제품들이라, 꽤 경쟁력이 있는 것들이다.

원스몰 당시에는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 후.

“일찍 나오셨네요. 뭐…… 뭐야!”

가장 먼저 출근한 김대성이 책상에 뻗어 있는 마 과장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마 과장님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그런가 보네요. 나도 방금 나왔어요.”

김대성은 마 과장의 콧구멍 앞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죽은 건 아니겠죠?”

“네. 아까는 노래도 하셨습니다. 지금 몇 시죠?”

“8시 30분입니다.”

“그럼 마 과장님 좀 깨워 줘요.”

“예. 알겠습니다.”

김대성은 마 과장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전혀 미동도 없는 마성근 과장.

많이도 마셨나 보다.

김대성은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 과장을 번쩍 들어 올렸다.

쿵!

마 과장이 화들짝 놀라 몸부림을 쳤고, 김대성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괜찮으세요?”

놀란 김대성이 마 과장을 일으켜 세웠다.

마 과장은 몸을 털고 일어나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재빨리 삐져나온 옷들을 바지 안으로 집어넣고, 풀어진 멜빵끈을 조였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아닙니다. 아직 출근 시간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집에 못 들어가셨어요?”

“네. 오랜만에 친구 놈들을 좀 만나느라…….”

나는 바닥에 뒹구는 마 과장의 빨간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아, 새끼……. 거 참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냐?>

<3천 개? 모자란데……. 누구한테 전화해야 하나?>

<최순형. 역시 너밖에 없다.>

<이정명……. 내가 널 또 보면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몇 건의 미팅을 한 건지, 마 과장의 많은 기억이 들려왔다.

나는 넥타이를 그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과는 있었나요?”

마 과장은 내 책상 위의 있는 김 대리의 PPT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그리고

“30분 내로 보고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치 하나는 빠르다.

하지만 예산안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오전에 차 부장에게 최종 확인을 받아야 한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말씀해 주세요.”

“정말요?”

“네. 시간이 없어서요.”

“배달 앱 3만 원 할인권 쿠폰을 공급가 5천 원에 받아 왔습니다.”

“지류 쿠폰은 아니죠?”

“네 SMS 쿠폰입니다.”

“수량은요?”

“10만 장입니다. 대신…….”

요즘 배달 앱은 뜨거운 감자다.

세 개의 회사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사용자들도 매우 많다.

더군다나 SMS 쿠폰은 배송비도 들지 않는다.

솔직히 마 과장이 이런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대신 뭔데요?”

“특판이 끝나고, 마켓에 정식으로 판매해 달라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수수료는요?”

“6%……. 오픈마켓이랑 똑같이 맞춰달라고 합니다.”

“잘하셨어요. 그건 부장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때.

“안녕하십니까!”

김경일 대리와 하연두가 들어왔다.

나는 손을 들어 김경일 대리에게 손짓했다.

“김 대리님! 잠깐 나 좀 봐요.”

“예. 팀장님.”

“PPT 잘 봤습니다. 우선 코레코 스낵 300g짜리 6만 개, 스티플 원두 6천 개 발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주머니에서 법인 카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 과장님 모시고 사우나 가서 씻고, 바나나 우유 한잔하고 오세요. 아니다. 좀 쉬다 두 분이 같이 점심까지 드시고 오세요.”

“괜찮습니다.”

김경일 대리가 거절하자 뒤에 있던 마 과장이 재빨리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카드를 집어 들고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과장님!”

“뭐 해, 빨리 가자고. 원래 윗사람이 상을 줄 때는 넙죽 받아가는 거야.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네.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다녀오세요.”

새벽 일찍 일어나 할머니를 도운 하연두.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밤새도록 마시며 영업한 마 과장.

깔끔하고 치밀하게 준비한 김 대리.

모두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과를 만들어 냈다.

“원 팀장, 뭐 좋은 일 있어?”

언제 왔는지, 김태하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좋은 일이야 많지.”

“뭔데? 나도 좀 좋자!”

“이따 말해 줄게. 근데 왜?”

“아, 내 정신 좀 봐. 우진 씨한테 보내 준 것 중에서 이게 빠졌더라고.”

김태하가 서류철 하나는 내밀었다.

“뭔데?”

“이번에 타임 이벤트 할 때 쓰라고, 우리 팀 박 과장이 잡아 온 거야. 맘에 안 들면 그냥 드랍해도 돼.”

자리에 앉아, 김태하가 건넨 문서를 확인했다.

빈티지한 디자인의 3.9L 에어 프라이어.

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브랜드다.

하지만 제품 디자인이 요즘 유행하는 트렌드에 딱 맞아떨어진다.

나는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어, 김태하에게 속삭였다.

“이거 어디 거야?”

“독일……. 디자인 좋지?”

“응. 일단 이미지만 봐서는 괜찮겠는데? 제품 스펙은?”

“받으면 전달해 줄게. 너 공급가 봤어?”

디자인만 보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니.”

“너 급한 성질 여전하구나.”

“쳇, 지는. 얼만데?”

“6,300원. 어때? 대박이지?”

보통 3.9L의 국내 에어 프라이어 제품이면 소비자가 3~5만 원.

공급가는 2~3만 원 선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놀라운 공급가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3.9L 맞아?”

“맞아.”

“뭐 이렇게 싸?”

“이거 통관받는 데 6개월이나 걸렸대.”

“6개월?”

“응. 독일 본사에서 난리야. 다음 달에 한국 프로모션 열리는데, 미리 해야 했던 마케팅 일정 다 까먹었잖아. 그래서 지금 마케팅용으로 다 털어 넣는 중이야. 6,300원은 제조가가 아니라 통관이랑 컨테이너 비용만 녹인 거야.”

“그럼 소비자가는?”

“10만 원 조금 넘을걸?”

가끔 지금처럼 통관 절차가 오래 걸려, 붕 뜨는 물건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건 1년에 한 번 잡을까 말까 하는 물건인데…….

“샘플은?”

“내일 박 과장이 가져올 거야. 금요일에 찐하게 한잔 사라. 나랑 박 과장한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뭐든 사줄 테니까.”

이로써 12개 중 총 7개의 상품은 확정이다.

겨우 하루 만에…….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원스몰 때였다면 12개의 제품을 구하는 데 일주일은 걸렸을 것이다.

나 혼자 상품 소싱에 유통, 영업, 마케팅, 심지어 제품 페이지 디자인까지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믿음직한 팀원들과 친구가 함께해 준다.

함께한다는 것, 그건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었다.

나는 엑셀 문서에 제품명과 소비자가, 공급가를 적은 후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   *   *

“…….”

차기영 부장은 출력한 문서를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줬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 많은 것들을 준비했느냐는 그런 표정이.

그는 한참 동안 문서를 보다,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나머지 5개는 다른 팀에서 구하라고 해 볼게.”

“아니요. 저희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니, 특판 팀은 이벤트 기획 쪽에 더 신경을 써. 마케팅팀 요새 오픈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좀 도와주려는 거야. 알겠지?”

다른 MD 팀들과 성과를 나누려는 것인가?

아니면 터무니없는 상품으로 이벤트를 망가트리려는 것인가?

나는 체인마켓 출신의 차기영 부장을 잘 안다.

둘 중 무엇이든 간에 100% 신뢰할 수 없다.

“예산은요?”

“12억, 그대로 통과했어.”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예비 품목들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원 팀장, 나 못 믿어? 내가 이 바닥 몇 년 짬밥인데.”

“세상에 100%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일곱 개 중 하나가 드랍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럼 뭐 뭐 알아서 하든가.”

차 부장은 건성으로 답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김대성과 이우진을 불렀다.

“대성 씨, 냉동 창고 자리는 다 확보해 놨죠?”

“예. 기존 냉동식품들은 반대쪽에 다 쌓아 놨습니다.”

“그걸 직접 한 거예요?”

“예. 남는 게 힘밖에 없어서요. 하하하.”

“아……. 다음에는 그러지 말고, 그냥 물류 팀에 얘기해요.”

“알겠습니다.”

“우진 씨.”

“네?”

“우진 씨가 봤을 때 다른 팀에서 온 상품 중 쓸 만한 거 있었어요?”

“그다지…….”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알았어요.”

나는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연두 씨 갑시다! 우린 미팅 나가서 먹을 테니까. 점심은 대성 씨랑 우진 씨 둘이 먹어요.”

하연두는 재빨리 다이어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내 뒤를 바짝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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