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5화>
6. 잠룡이십니다
“어느 라인을 탈지는 팀장님이 선택하셔야죠.”
“그럼, 객관식으로 좀 해 주시겠어요?”
내 장난스러운 질문에, 마성근 과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첫 번째는 우리 커머스의 지주 회사인 BO푸드 라인입니다. 커머스에는 회장님 따님이신 김지영 이사님이 계시고, 그 밑으로 회계 팀과 인사 팀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MD 사업부에는 직속이 없어서 속 빈 강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두 번째는요?”
“BO푸드의 전무이셨던, 정근영 대표님 라인입니다. 신선식품 팀의 정진택 팀장이 대표님의 아들인 건 아시죠?”
신선식품 팀의 정진택 팀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날 너무 정신없어서 대충 인사만 하고 흘려버렸다.
“아니요. 몰랐습니다. 근데 정 대표님 라인은 너무 단출한 거 아니에요?”
“아뇨. 물류와 CS팀은 전부 다 정 대표님 라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최구열 이사님입니다. 이분은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죠? 전략기획 팀원들 전부가 이분 라인이고, MD 사업부에는 김태하, 장선영, 김민정 팀장이 미국에서 함께 일하던 멤버들입니다.”
“나머지는 체인마켓 쪽인가요?”
“네. 맞습니다. 차기영 부장이 MD 사업부 절반과 디자인, 개발팀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럼 체인마켓 사람들은 대표님 라인이라고 봐야겠네요.”
체인마켓 인수를 고집한 것은 정근영 대표.
단순한 차기영 부장은 당연히 정 대표에게 줄을 섰을 것이다.
하지만 마 과장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요.”
“그럼요?”
“차 부장……. 이 인간은 회장님과 대표님을 사이에 두고 박쥐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회사 내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입니다.”
차기영 부장이?
아니다. 이건 뭔가 잘못 알고 있다.
차 부장은 절대로 그런 머리를 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의외군요. 근데 과장님은 절 믿으세요?”
“네. 믿습니다.”
“왜요?”
“비록 회사 내에 세력은 작지만, 업계에서 평판도 좋고, 나름 성공한 사례도 있으셔서 잘 이겨 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김 이사님이 부르시는 거 보고 새로운 잠룡이 되실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잠룡이요? 과장님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아니요. 제 눈은 언제나 정확했습니다. 제가 BO푸드에 있을 때 모시던 최태형 이사님, 박창연 이사님, 김재원 부장님 모두가 인정을 받았습니다.”
“…….”
“저는 이번에도 확실한 잠룡에게 베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팀장님이 저를 버리시지만 않는다면……. 분명, 저에게도 기회가 올 겁니다.”
회사 내의 정치 얘기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술잔을 기울이던 팀원들 모두가 그의 말을 경청했다.
마성근 과장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진해서 특판 팀으로 넘어온 대성 씨, 갑작스러운 발령에도 군말 없이 넘어온 김 대리, 둘 다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김경일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대성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전 원래 원 팀장님 밑에서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그거지 뭐. 그런 의미에서 연두 씨는 참 운이 좋아. 잠룡이 계신 팀에 오다니……. 그리고 이우진 이 스파이 새끼! 넌 빨리 체인월드로 꺼져!”
마 과장의 도발에, 이우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라고요! 저는 차 부장님하고 독대한 적도 없다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 진짜!”
“조심해라. 내가 너 끝까지 지켜본다!”
1시간 정도가 지나.
마 과장의 구박을 받던 이우진과 술이 약한 하연두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나와 김경일 대리, 김대성, 마성근 과장은 근처의 맥줏집으로 향했다. 마 과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맥주는 입가심이라며 미친 듯이 마셔댔다.
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된 그는 테이블에 엎드려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제가 마 과장님 모셔다드리고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김경일 대리가 나를 떠밀었다.
보통 같았으면 나 몰라라 했겠지만.
마 과장의 기억과 생각을 읽은 이후부터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제가 모셔다드리고 갈게요.”
“아닙니다. 오늘 출근 첫날이신데, 집에 가서 좀 쉬세요.”
“정말 괜찮아요. 아직 10시밖에 안 됐는데요. 뭐. 김 대리님은 마 과장님 내려 드리고 가시려면 한참 돌아가야 하잖아요.”
김경일 대리의 집은 성수동, 김대성의 집은 경기도 구리.
둘 다 신림동에 사는 마 과장을 내려 주려면 1시간 이상을 돌아가야 한다.
“그야 그렇지만…….”
나는 씩 웃어 보이고, 사지를 축 늘어트린 마 과장의 팔을 내 어깨에 올렸다.
* * *
신림동 오래된 5층 아파트.
마 과장의 집은 하필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나는 인사불성이 된 그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목욕을 했다.
“3차! 3차 갑시다! 으아, 윽.”
술에 취해서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마 과장.
그는 이미 필름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김 대리를 보내는 건데…….
띵동띵동!
벨을 누르자, 40대의 여자가 낡은 카디건을 걸치고 맨발로 뛰어나왔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 있는 마 과장을 넘겨받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이 사람이 또……. 고생하셨어요. 미안해서 우째.”
“아닙니다. 그럼…….”
“저기 잠깐만요.”
“네?”
“수건 좀 가져다 드릴게요. 땀 좀 닦고 가요.”
그녀는 마 과장을 방에 대충 눕혀놓고, 뽀송뽀송한 수건을 들고 왔다.
나는 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강제로 내 손에 쥐여 줬다.
“고생했는데, 꼭 택시 타고 가요.”
손을 펼치자.
곱게 접힌 초록색 만 원짜리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습니다. 집이 근처라서 금방 갑니다.”
“어휴……. 그러지 말고 넣어 둬요.”
마 과장의 부하 직원으로 생각했구나.
하긴, 나이도 어리고 집까지 데려왔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만 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모님.”
“에이, 사모님은 무슨……. 이이보다 한참 어린 거 같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아홉입니다.”
“딱 좋을 때네. 이이도 그 나이 때는 총각처럼 괜찮았는데…….”
“설마요. 농담이시죠?”
“호호호 아니에요. 오늘은 조심히 가고, 정말 고마웠어요.”
“네. 편히 쉬세요.”
* * *
이튿날.
나보다 먼저 출근한 마 과장이 다가와 고개를 푹 숙였다.
“팀장님 저 혹시…….”
“사모님이 미인이시던데요?”
내 말 한마디에, 마 과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집사람 얘기 듣고 설마 했는데…….”
나는 재빨리 마 과장을 일으켜 세웠다.
“과장님, 제발 부탁이니까 이러지 좀 마세요.”
“아닙니다. 제 집사람이 또 실수한 건 없었나요?”
“하나 있었네요.”
“네?”
화들짝 놀라는 마 과장.
나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집까지 택시비, 만이천 원 나왔거든요. 이따 2천원 짜리 커피 한잔 사세요.”
내 말을 들은 마 과장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오후 2시 회의실.
차기영 부장은 MD 사업부 팀장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픈이 이제 2주 남았다. 다들 준비는 잘하고 있지?”
“네!”
가전제품 팀의 이진성과 건강식품 팀의 최충연이 크게 답했다.
다리를 꼬고 의자를 좌우로 흔들던 정진택 팀장.
그는 대표이사의 아들이라는 포지션에 걸맞은 거만한 표정으로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저기……. 차 부장님.”
“응?”
“이번에 베트남에서 고구마 큐브 들여오는 거요.”
“그거 뭐?”
“제품 샘플 받아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요. 전량 사입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아……. 그래? 얼마나 되는데?”
“8톤이요.”
8톤은 너무 많다.
고구마 큐브의 특성상 냉동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 이상 보관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 팀장이 좋다면 당연히 괜찮지.”
차 부장도 분명 그 점을 잘 알 텐데…….
역시 그는 이런 사람이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강한 사람.
차 부장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김태하를 불렀다.
“김태하 팀장, BO푸드에서 넘어온 냉동식품 품목들 확인해 봤어?”
“예,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되는데?”
“만두랑 피자, 치즈스틱을 포함해서 총 27종이 넘어왔습니다.”
“리스트는 뽑아왔지?”
김태하는 자신의 앞에 있는 파일철을 차 부장에게 건넸다.
차 부장은 파일을 천천히 넘겨서 확인하고, 이를 다시 박대영 차장에게 전달했다. 가만 보던 박대영 차장은 갑자기 서류의 한쪽을 가리키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김 팀장. 떡갈비는 빼자.”
“왜요?”
“이거 팔리겠어? 예전에 체인마켓에 올려 봤었는데 반응이 거의 없었어.”
“제대로 노출만 하면 괜찮습니다. 오프라인 마트 매대에 올라갔을 때, 판매율이 급등…….”
“아 됐고, 그냥 빼자면 빼.”
차 부장과 박 차장은 최두열 이사가 데려온 팀장들의 말에 객관적이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며 반대했다.
유아동 팀의 김민정 팀장에게는 판매가를 더 다운시키라고 압박했고.
음료/커피 팀의 장선영 팀장에게는 제품 설명 페이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괜한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원 팀장 쪽은 준비 잘되고 있나?”
“예. 뭐 그럭저럭 됩니다.”
“이번에 오픈하는 날, 네이버 디스플레이 광고 돌린다는 얘기 들었지?”
아니, 못 들었다.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아니요.”
“못 들었어? 네이버 메인 타임 보드 DA(Display AD) 12시간 돌리기로 했잖아!”
네이버의 타임 보드 광고는 한 시간 동안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노출된다.
그것도 랜덤이 아닌, 고정으로…….
광고비는 트래픽이 적은 시간대에 3천만 원 정도고, 트래픽이 많은 시간대에는 5천을 훌쩍 넘기도 한다.
12시간이라고 치면, 대략 5억 정도가 될 텐데…….
황당하다는 표정의 김태하가 차 부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언제요? 처음 듣는데요?”
김태하가 모른다면 다른 팀장들도 모른다는 말.
대충 감이 왔다.
큰 비용이 나가는 광고 때문에 급하게 상품을 준비하도록 하고.
이를 압박하려는 것임을…….
하지만 나는 그들이 이렇게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잘됐네요. 모바일도 DA가 나가는 거죠?”
내 대답에 차 부장이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나 보다.
“응……. 그렇겠지?”
“우리 쪽 사입 예산은 얼마나 잡을까요?”
“사입 예산?”
“그렇게 노출이 많은 광고를 하는데, 당연히 사입한 제품들이 나가야죠.”
“어떻게 할 생각인데?”
“매시간 선착순 만 명에게 100원에 팔 생각입니다. 물론 퀄리티 있는 제품으로만요.”
이는 커머스들이 많이 하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상품에 혹해 들어오고, 반응이 좋으면 실시간 검색어까지 장악할 수 있다. 물론 12시간 동안 판매할 제품들이 매력적이어야 하고, 준비하는데 2주라는 기간은 너무 촉박하다.
“그럼 총 12만 개인데, 가능하겠어?”
“물론이죠. 사입비로 12억 이상만 잡아 주세요.”
“예산이라……. 일단 러프하게 리스트 먼저 가져와 봐. 그리고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그러죠.”
회의가 끝나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김태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할 수 있겠어? 오픈까지 겨우 2주 남았는데?”
“응. 몇 개는 금방 잡아 올 수 있을 거야. 요즘 공장 가동률 떨어지는 데가 몇 군데 있거든.”
“혹시 내가 도울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래,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