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2화>
3. 많이 아쉽습니다
정근영 이사는 새로 생겨날 커머스의 청사진을 그렸고.
나와 최구열 이사는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김재열 대표는 정근영 이사의 말에 맞장구치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길었던 식사가 끝이 나고.
서빙을 하는 직원이 간단한 과일과 차를 내왔다.
식사 내내 대화를 이끌던 정근영 이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대표님. 그럼 이번 주에 마무리를 짓도록 하죠. 법무 팀에서 내일 중으로 최종 계약서를 보내드릴 겁니다. 팀장님도 동의하시는 거죠?”
지금까지는 대화에 끼어드는 게 어려웠다.
무슨 말만 나오면 열심히 하겠다는 김 대표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근영 이사가 내 의사를 물었고, 이제 대화에 낄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아니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네?”
“저희는 지난 2년간 6명의 직원으로 믿기 힘든 성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근데 그 결과가 겨우 22억이라니, 너무도 아쉽습니다.”
내 말에 김 대표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근영과 최구열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내내 별다른 말이 없던 최구열 이사는 안경 뒤의 동공을 크게 확장하며 입을 열었다.
“22억이 아쉽다고요?”
“네.”
“원스몰은 영업이익 2억짜리 작은 커머스입니다. BO푸드가 22억이나 투자하는 이유는 원 팀장님 같은 인재들을 높게 판단해서입니다.”
“네네, 그야 저희도 잘 알죠. 저희 원 팀장이 패기가 넘쳐서……. 하하하.”
당황한 김재열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미 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지난달 매출은 연초보다 37%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유입수 대비 구매율은 매달 2% 넘게 꾸준히 성장해 왔고요. 재무제표에 찍힌 영업이익은 겨우 2억이지만, 앞으로의 기대 이익은 더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 지금의 제안을 주셨다면 아마 저희는 50억 이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상의를 만지고 들었던 기억.
그것에 베팅을 해 봤다.
식사 자리는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차가워진 분위기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어이없다는 표정의 정근영 이사였다.
“하하하, 원 팀장님은 소문 이상이시군요.”
“네?”
“제조사 담당자들이 팀장님을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감 하나는 여기 계신 최구열 이사님 이상이라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고맙습니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정근영 이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물론 원 팀장님의 마음 백번 이해합니다. 직접 만들고 운영하셨으니 더 애정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지금은 이상이 아닌 현실을 봐야 할 때입니다. 이 이상의 금액을 요구하시면 우리도 손을 떼야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
“이 정도의 성장세라면 저희는 내년에 50억 이상의 가치가 될 겁니다. 그리고 소셜 커머스들을 노리는 큰손들은 내년에도 우리에게 접근할 겁니다.”
김재열 대표는 내 표정을 살피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원 팀장 비싼 밥 먹고 왜 그래?”
“…….”
“이사님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애써 수습을 하려는 김재열.
나는 그의 노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 더 나갔다.
“저희가 지금까지 해 왔던 노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반영해 주십시오. 6명이 전부인 작은 회사였지만, 그들이 옳았고 잘해 왔다고 칭찬해 주십쇼.”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김재열 대표는 갑자기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이건 내 생각을 알았다는 신호.
로비를 주로 해 온 그는 눈치 하나는 타고난 인물이었다.
“후……. 정 이사님. 아니 이제는 정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이런 말씀드리기 참 죄송한데…….”
“뭐가요?”
“사실은 애들 퇴직금이…….”
“그래서 현금비중을 20%로 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야 잘 알죠. 근데 말이죠. 원 팀장 말대로 정말 애들이 수고를 많이 했어요. 콜 받는 애들 둘이서 모든 클레임 처리 다 하면서 반품률을 3% 미만으로 떨궈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MD들은 제조사 클레임 죽어라 넣고, 개발자들은 서버 터져 나가는 거 부여잡으며 버텼습니다. 아시잖아요. 우리 같은 영세한 커머스가 반품률 낮추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요.”
“그래서요?”
“이렇게 끝나는 마당에 성과급을 좀 지급하고 싶은데…….”
“현금 비중을 더 올려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성과급을 제가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제가 아닌 정 대표님을 모셔야 하는 친구들인데요.”
“…….”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 일하게 될 BO 쪽에서 그동안 수고했다는 성과급이 나가면 역시 BO는 다르구나 하겠죠. 정말 능력 있는 애들입니다. BO에서 그들을 높게 사고 있다는 걸 보여 주시면 그에 맞는 보답을 해 줄 겁니다. 맞지 원 팀장? 이 얘기하려고 했던 거지?”
김재열 대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완벽한 연기를 해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세를 몰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정 대표님! 3억만 더 생각해 주십쇼. 여기 원 팀장을 포함한 여섯에게 그래도 5천씩은 챙겨 주고 싶습니다.”
“무슨 직원들에게 그렇게 큰 금액이 나갑니까!”
“반품률 3%……. 온라인 커머스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 수치입니까? 우리 애들은 그걸 만든 애들이라니까요!”
정근영 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들자, 최구열 이사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 대표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김 대표님의 말씀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BO에서 먼저 성의를 보여 준다면 그들은 성과로 답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3억은…….”
“어려우시다면 회장님께는 제가 보고드리겠습니다.”
“크흠…….”
최구열 이사의 말에 정근영 이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3억이라는 큰돈의 지급을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다니…….
역시 그의 기억에 있던 27억이라는 금액이 우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재열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크게 소리쳤다.
“역시 정 대표님이십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끝이 나고, 나와 김재열 대표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역시 원지훈이야! 하하하. 갑자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했대?”
“예산이 더 있어 보여서요. 그냥 두셨으면 좀 더 끌어냈을 텐데…….”
“아서라. 너무 욕심내다가 탈 난다.”
“근데 대표님. BO에서 나오는 상여금으로 직원들 퇴직금 때우실 생각은 아니시죠?”
“내가 양아치냐? 애들도 고생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1원까지 딱 맞춰서 다 나갈 거야!”
“웬일이래요?”
“헐……. 너 진짜 날 그 정도로만 본 거야?”
김재열 대표는 씩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요. 장난입니다.”
“하하하 그래. 근데 지훈아.”
“네?”
“너 그냥 집에 갈 건 아니지? 오늘 같은 날 찐하게 한잔해야지! 혓바닥 몇 번 털어서 3억이나 땡겼는데.”
“네 가시죠. 오늘은 제가 살게요.”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다른 애들도 부를까?”
“어휴……. 그러지 마세요. 저니까 받아주지 다른 애들은 못 받아줍니다.”
“그런가? 하하하.”
* * *
한 달 후.
인수합병은 순조롭게 끝났다.
5천의 성과급과 20% 지분의 선수금 명목으로 입금된 금액은 약 1억1천.
각종 세금을 제하고 나니 생각보다 초라했다.
나와 직원들은 꿀 같은 7일의 휴가를 마치고 강남의 BO푸드 본사로 출근했다.
BO푸드 사옥의 출입문 앞.
이은지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팀장님!”
“은지 씨 일찍 나왔네? 근데 왜 여기 있어?”
“그게…….”
“뭔데?”
“여기 직원들 보니까 다들 출입증을 찍고 들어가더라고요. 혹시 출입증 받은 거 있으세요?”
“아니 없는데?”
매사에 소극적인 그녀는 고작 출입증 때문에 혼자 끙끙 앓았던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인포 데스크에서 임시 출입증을 받아 냈다. 미리 얘기되어 있던 터라 받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은지 씨는 건강식품 파트지?”
BO커머스는 회사에 적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모두를 다른 팀에 배치했다.
MD의 역할을 하던 나는 특판 사업팀장으로 배정했고, 내 밑에서 AMD직을 맡았던 이은지는 건강식품 팀으로 보냈다.
개발과 디자이너는 각각의 지원팀으로 보냈으며.
CS를 담당하던 직원들도 CS팀으로 보냈다.
그게 맞는 절차였지만, 2년 가까이 지냈던 직원들과 떨어진다는 것이 영 불안했다.
“네. 근데요 팀장님.”
“응?”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저는 기본적인 엑셀도 잘 못하는데요?”
“그래도 은지 씨는 열정이 있잖아. 만약 누가 괴롭히면 언제든 나한테 와. 내가 확 들이받아 줄 테니까.”
“정말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나 꼭지 돌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 알지?”
“팀장님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이은지는 활짝 웃으며 17층 버튼을 눌렀다.
그때.
“야! 원지훈! 너 먼지 맞지?”
먼지는 이름 때문에 생긴 고등학교 때의 별명이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검은 슈트에 얇고 파란 넥타이.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그는 학교 때 가장 친했던 김태하였다.
“태하?”
“그래! 나야 나! 먼지 너 정말 오랜만이다.”
사람이 제법 있는 엘리베이터 안.
하지만 김태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곧바로 25층을 누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부터 출근하는 건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지. 25층에 카페 있는데 커피 한 잔 어때? 아직 출근까지 30분이나 남았잖아.”
“그래.”
김태하.
이놈은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놈이다.
잘생긴 외모에 큰 키.
공부는 전교에서 꼽히는 수준이었고, 반장에 학생회장까지 간부직은 다 맡았었다. 그리고 어릴 때 배운 격투기 때문에 싸움까지도 잘해서, 아무도 건드리는 놈이 없었다.
나는 이 잘난 놈이 궁금했다.
그래서 한 달 내내 그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렸고, 덕분에 이놈이 BO푸드 김상만 회장의 셋째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은지 씨는 먼저 들어가 봐. 괜찮지?”
“네.”
나는 이은지를 17층에 내리게 하고, 김태하와 함께 25층으로 올라갔다.
“여기 커피가 길 건너 별 다방보다 훨씬 맛있고 비싸.”
“맛있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근데 비싸다고?”
“거의 호텔 커피 수준이야.”
“얼만데?”
“아메리카노가 만이천 원.”
커피 한 잔에 만이천 원이면, 이는 고급 호텔 커피 가격이다.
사원들 복지를 위한 카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사람도 많지 않다.
김태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 귀에 다시 속삭였다.
“사원증 내면 10% 할인해 줘.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다음에 사원증 받으면 네가 사. 알았지?”
“그래.”
“담배 피우냐?”
“가끔.”
“그럼 커피 받아서 옥상으로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