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듣는 회사원 프롤로그>
프롤로그 : 사물은 기억을 저장한다
오전 8시 신도림역.
지하철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줄지어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는 사람들을 밀쳐 가며, 에스컬레이터 위를 내달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에스컬레이터 위를 오르던 나는 남자에게 떠밀려, 손잡이를 잡고 말았다.
그 순간.
<점심 뭐 먹지?>
<고 부장 새끼 또 지각이라고 지랄하겠네.>
<오늘 발주 넣어야 하는데…….>
<아직도 술이 안 깨네.>
<아……. 머리 아파. 병가 내고 집에 갈까?>
<화장실 갔다 가면 늦겠지?>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생겼는지.
왜인지는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였으니까.
나는 오른손을 살짝 뻗어, 옆에 선 여자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예쁜데?>
<뭐 이리 비싸? 질러 말아?>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번 입어만 볼까?>
<무이자 6개월이라고 했지?>
이 여자가 옷을 처음 접했을 때의 생각들.
덕분에 귓가에 맴돌던 수많은 목소리가 멈췄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고, 오른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기억을 듣는 회사원 1화>
2. 무려 22억이야
신도림역 인근의 작은 건물 3층.
보안 카드를 찍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팀장님 오셨어요?”
일찍 출근한 이은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은지.
회사에 입사한 지 2개월이 지난 따끈따끈한 신입으로 긍정적이고 노력하는 자세가 보기 좋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열을 가르치면 하나를 아는 재능의 소유자로 예쁘장한 얼굴이 전부다.
“좋은 아침.”
인사를 마친 나는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고, 반품 상자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상자들을 차분히 만져나갔다.
<이게 다야?>
<뭔 포장지만 이렇게 커?>
반품된 물건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양이 적거나.
원하는 모양이 아니거나.
때로는 광고 모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은지 씨! 어제 반품 몇 건이나 있었지?”
“호떡 믹스 76건, 왕만두 24건이요.”
“다른 건?”
“없었습니다.”
“전부 참맛푸드 제품들이네?”
“네. 클레임 넣을까요?”
“아냐. 이따 내가 넘어갈게.”
회사의 직원은 6명이 전부다.
작년에 연 매출 100억을 달성했지만, 짠돌이 사장은 돈을 쓰지 않는다.
싸구려 책상들과 누렇게 색이 변한 파티션.
그리고 어디서 주워 온 것 같은 냉장고와 말라비틀어진 화분들.
그 누구도 여기가 국내 소셜 커머스 4위의 사무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저…… 팀장님.”
“응?”
“팀장님은 왜 아침에 출근하시면 반품들을 먼저 보세요?”
온라인 커머스들은 보통 20% 정도의 반품을 떠안는다.
하지만 우리 원스몰의 반품률은 3%.
이는 소비자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내 오른손 덕분이었다.
“제조사의 열 마디 말보다 소비자의 생각들이 더 정확하니까.”
“네?”
내 말에 이은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여! 원 팀장 일찍 나왔네?”
김재열 대표이사.
이 회사에서 유일한 내 윗사람.
머리를 포마드로 말끔히 넘긴 그는 처음과 다른 괴물이 되어 있었다.
낡은 운동화가 정들어 못 버리겠다는 사람이 이제는 온몸에 명품을 휘감았고.
조기 축구가 가장 좋다던 사람이 매일같이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친다.
차는 힘 있는 게 좋다며 갤로퍼를 고집했는데.
얼마 전에는 3억이 넘는 벤틀리를 덥석 리스해 버렸다.
그래 놓고 미안했는지.
나에게는 새로 출시한 쏘나타 한 대를 리스해 줬다. 이렇게 리스라도 해야 세금을 덜 낸다면서 말이다.
“일찍부터 웬일이세요?”
“다른 직원들은?”
“곧 나오겠죠.”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는, 지금 몇 시야?”
“8시 30분이요.”
출근 시간은 9시.
김 대표는 무안했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해 댔다.
“아 그래……. 근데 원 팀장! 어제 매출 좀 떨어졌던데? 무슨 문제 있었어?”
또 시작이구나.
그는 관리자 페이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매출 그래프가 떨어지면 바로 전화를 걸곤 했다.
“어제 즉석 밥이랑 라면 묶어 판 거 보셨죠?”
“그랬어?”
판매 중인 상품이 아니라 또 매출 그래프만 본 거였구나.
나는 모니터를 돌려 관리자 페이지를 보이며,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네. 그거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아서, 전부 구매 취소시켰어요.”
“그냥 팔아버리지, 왜 그걸?”
“그런 거 받아주다가는 끝도 없어요. 그리고 반품 들어오기 시작하면 더 머리만 아파지는 거 아시잖아요.”
“그……. 그래 잘했어. 그보다 나 좀 잠깐 볼까?”
김 대표는 커머스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하다.
자신은 경영과 접대만 집중한다며 처음부터 선을 그은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따라 대표이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 대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평소 아끼는 난초 잎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앉아. 우리 커피 한잔할까?”
“네.”
김 대표는 주머니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밖에 있는 이은지에게 건네며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원 팀장. BO푸드 알지?”
BO푸드는 국내 3대 식품 회사 중 하나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회사다.
“BO푸드는 왜요?”
“우리 거기랑 같이 일하면 어떨까?”
소셜 커머스는 저렴한 물건들을 소싱해서 5~10개의 상품만 이벤트 형식으로 판매한다. 그래서 대형 제조사가 아닌, 재고를 물고 있는 벤더들과 일하는 경우가 많다.
“BO푸드 본사랑요?”
“응.”
“그쪽 제품 받으시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이 들어와서 말이야.”
“무슨 조건이요?”
“지훈아.”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른다.
이건 긴밀히 뭔가 부탁할 게 있다는 말인데…….
뭔가 느낌이 싸하다.
“왜요?”
“우리 함께 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지? 네가 소셜 커머스 하자고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너 믿고 시작한 거 알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잘나가고 있잖아요.”
“에이 잘나가긴 무슨……. 이거 다 빛 좋은 개살구지. 요즘도 힘들어 죽겠다 아주…….”
김 대표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몇 년 전에 자신이 어땠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맨날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갤로퍼 타던 사람이 벤틀리를 타는데, 이 정도면 성공한 거죠!”
“다 품위 유지비로 쓰는 거지. 나도 힘들다 힘들어. 내가 적성에도 안 맞는 골프까지 치면서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알아? 넌 진짜 모를 거다. 아후…….”
“오늘 미팅 많으니까 본론만 얘기하시죠.”
차가운 내 답에, 김 대표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BO푸드에서 우리에게 22억을 베팅했어.”
“22억?”
“그래. 이 코딱지만 한 사이트를 인수하는데 22억이나 베팅했다고!”
얼마 전까지 소셜 커머스 창업 붐이 불면서 한 달 만에 100개가 넘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아마 그들은 제품 하나만 잘 걸리면 뜰 수 있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겨우 1년 만에 14개의 소셜 커머스만 남았다.
그들 중 3개의 회사는 거대 자본을 투자받아 크게 성장했고, 재빠르게 충성 회원이 많은 다른 커머스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에게도 인수 작업이 들어왔었다.
김 대표는 그때도 3억이라는 적은 돈에 회사를 넘기려 했다.
내가 반대해서 지금 이렇게 성장한 것이다.
근데, BO푸드의 22억?
이건 그때와는 확실히 다른 금액이다.
그리고 눈먼 졸부들의 돈이 아닌 국내 거대 식품 회사에서 들어오는 돈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매번 헛물만 캐던 김 대표가 이런 거물을 잡아낼 리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BO 같은 대기업에서 왜 우리처럼 작은 회사를 노린대요?”
“지훈아 체인마켓 알지?”
“네.”
“거기도 어제 도장을 찍었어. BO푸드는 우리 같은 식자재를 전문으로 하는 커머스들을 다 사 모을 생각이야.”
“음…….”
BO푸드가 커머스 사업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그럼 충분히 말이 된다.
내가 잠시 주춤하자, 김 대표는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도 신기했던 거야. 우리같이 작은 회사가 연 매출 100억이나 찍으며 살아남은 것을 보고 말이야. 그리고 탑몰의 인수 제안도 거절했던 게 꽤 신선했나 봐.”
“근데 왜 우리가 두 번째예요? 식품 전문 커머스 중에서는 우리가 1등인데?”
“그야 내가 튕겼으니까. 그래서 우리 몸값이 22억까지 올랐잖아. 지훈아. 넌 내 꿈이 뭔지 아니?”
“뭔데요?”
“마흔 되기 전에 은퇴하는 거.”
“그 돈으로 은퇴할 수 있겠어요?”
이 법인의 지분 20%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
내가 사업을 제안했을 때, 그는 나에게 천만 원을 투자하라고 했다.
22억의 80%면 17억 정도.
예전의 김 대표라면 17억 정도로 은퇴할 수 있었겠지만, 씀씀이가 커진 지금은 절대 불가능하다. 역시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지.”
“그럼요?”
“20%는 현금으로, 나머지 80%는 주식으로 받을 거야. BO푸드에서 새로 만든 BO커머스의 주식으로 말이야.”
“상장 회사도 아니잖아요?”
“지주 회사가 BO푸드인데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어느 정도 실적만 나오면 바로 상장시킨다고 했어. 지훈아, 이건 나 혼자 좋자고 하는 게 아니야. 너도 4억 이상의 지분을 받고 들어가는 거야. 이건 정말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다른 직원들은요?”
“전부 BO커머스로 넘어갈 거야. 전 직원 다 받아주기로 했거든. 그것도 애들 연봉을 20%나 올려서 말이야. 그리고 지훈아 다음 주에 최종 미팅 있으니까 그때는 너도 참석해. 알았지?”
“제가 왜요?”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그쪽에서 최구열 이사가 나온대. 너 그 사람 책도 사보고 그랬잖아.”
최구열.
우후죽순 생겨난 소셜 커머스들에게는 신화와도 같은 인물이다.
미국에서 소셜 커머스 사업을 처음으로 시도했고.
한때는 아마존, 이베이 등의 대형 오픈마켓 매출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커머스 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의 책 때문이기도 하다.
“그분이 BO 쪽으로 들어가셨어요?”
“그래. 조만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거야. BO는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어. 새로운 법인 자본금이 무려 300억이야.”
“300억이라…….”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툭 치고 옷걸이에 걸어 둔 자신의 상의를 걸쳤다.
“그럼 난 약속 있어서 가 볼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 * *
일주일 후.
김 대표와 함께 고급 일식집의 VIP 룸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사진으로만 봤던 40대의 최구열 이사와 백발의 6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김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이사님이 직접 나오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김재열 대표.
그는 사업은 99%가 로비라며,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김 대표와 악수를 하고 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원지훈 팀장님이시죠?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소문이요?”
“하하하 제2의 최구열 이사님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과찬이십니다.”
지난 2년간 빨빨대고 수많은 제조사와 유통사들을 만났다.
그때마다 그들의 숨겨진 기억을 들었고, 덕분에 거래처와의 관계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
“앞으로 BO커머스를 맡게 될 정근영이라고 합니다.”
정근영.
푸근한 인상의 동네 아저씨 같은 말투.
끝이 날카로운 무테안경이 없었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악수를 마친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앉으시죠. 음식은 주문해놨습니다.”
나는 재빨리 김 대표의 외투를 받아 들고 구석의 옷걸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회색 상의를 쓰다듬었다.
<영업이익 2억짜리에 27억까지 베팅하라고? 회장님도 제정신이 아니지.>
27억. 이게 우리에게 책정된 최대치인가?
주어가 없기에 명확하진 않지만, 한번은 떠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