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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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종료

서장에 도착한 현수와 건은 객점에 묵으면서 서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파라극이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서장이었다.

"일단 난 접속을 끊고 공사 현장에 한번 들러야겠어. 그래도 명색이 주인인데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렇게 해. 나 역시 수아를 만날 생각이었으니까."

접속을 해제한 현수는 건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서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건의 아버지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여 현수는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참으로 사 온 것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할 일을 건의 아버지가 대신 해 주니 현수는 실로 미안스러웠다.

건의 아버지는 현수 역시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일로 바빠 오지 못하는 현수를 위해 공사 현장을 관리해 주고 있었다.

"그래, 일은 다 끝이 난 거냐?"

"네, 바쁜 일은 대충 다 끝났습니다."

"참, 인사해라. 이분이 현장 책임자이신 이상현 실장님이시다."

상현은 웃으며 손을 내밀어 먼저 현수에게 인사를 했다.

"이상현입니다."

"이현수입니다."

"현수? 혹시…… 가상현실 천을 하십니까?"

현수는 상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아는가?"

건의 아버지는 이 실장이 현수를 알은체하자 궁금한지 물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다면, 귀가 따갑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 주인공입니까?"

건의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이 실장의 물음에 자연스레 현수를 보았다. 현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거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참 궁금했습니다."

이 실장은 기분이 좋은지 웃었다. 건의 아버지는 뭔지는 몰라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는 두 사람에게 대화를 나누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말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이 실장의 모습은 마치 수진의 모습과 흡사했다.

현수는 언제 끝날지 생각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게임을 그만 하시려고 이 룸넷을 차리시는 겁니까?"

"네, 이제는 옛날처럼 그렇게 게임을 못 하니, 가게를 하면서 쉬엄쉬엄 하려고……."

"아! 그럼, 제가 자주 놀러 올 테니 게임할 때 조언 좀 부탁드립니다. 하하!"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차라리 회원으로 등록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회원이라는 말에 이 실장은 궁금해서 되물었다.

"1달 회원으로 등록하면 제 노하우를 가르쳐 줄 생각이거든요. 물론 일반적인 가격보다 조금 더 싼 편이기도 하고……."

"아! 좋습니다. 지금 하죠."

현수는 그런 이 실장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게를 오픈하고 하셔도 됩니다. 대신 실장님께서 신경을 좀 써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 사장님과 10년을 거래했습니다. 아마 이 룸넷이 앞으로 룸넷 인테리어의 기본 모델이 될 것입니다."

현수는 새삼 건의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부족함 없이 바로 지원해 드릴 테니."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가상현실 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현수는 건의 아버지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래, 이야기는 잘 끝난 거냐?"

"네.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 실장님은."

현수의 말을 듣고 건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거래를 한 사람이지만 한결같았다. 그래서 건의 아버지도 그를 참 좋아했다.

현수는 건의 아버지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공사금의 30%는 공사를 시작할 때 주었고 이번에 주는 돈은 중간에 건네야 할 돈인데 공사금의 30%였다. 그리고 나머지 40%는 공사가 끝나고 1달 안에 주면 되니, 아직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편이었다. 현수는 그 1달 안에 천에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네, 일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찾아와서 일하는 인부들이나 실장에게 인사도 하고 그래라. 그래도 주인이 될 사람이니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리고 오면 오래 있지 말고 전할 것이나 간식거리 같은 것을 주고 빨리 사라지는 것이 좋아. 실장은 몰라도 인부들은 책임자들이 오래 있으면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야."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건의 말을 들으니 내년에 결혼할 생각이라고 하던데?"

"네! 어머니께서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건의 아버지 역시 현수의 어머니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유독 강한 현수를 보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세상에 많은 효가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지. 부모님, 근심 안 시키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지. 그런 면에서 보면 현수 넌, 100점짜리 아들이다."

"건도 마찬가지잖아요."

그 말에 조금 인상을 쓰는 건의 아버지였다.

"그놈은 50점도 안 돼. 힘들게 사법 고시 2차까지 붙었는데 마지막을 남겨 두고 게임에 빠져 근심하게 만드니, 그놈은 현수 너에게 비하면 아직 어려."

현수는 알고 있었다. 건의 아버지가 건을 얼마나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그래도 건이 때문에 백화점을 살렸잖아요. 그리고 수아도 얻고 곧 사법 고시 준비한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잖아요."

건의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누가 뭐라 해도 건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건과 수아가 함께 찾아왔다.

"현수도 있었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은 다 예언자들이야."

건은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냥 웃으며 수아와 함께 현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왔냐? 용돈 떨어져서 온 건 아닌 것 같고."

"결혼 이야기 때문에 왔습니다."

"결혼?"

듣고 있는 현수는 건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했다. 이미 천에서 끝난 이야기였기에…….

"방금 수아 아버님을 만나 허락받았습니다. 내년 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말입니다."

"그래……. 뭐? 내년 봄에……!"

반응이 이상했다. 건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음, 그렇게 일찍? 준비할 것이 많잖아?"

"준비는 대충 끝났습니다. 허락만 남았습니다. 결혼식장은 백화점으로 정했고 청첩장은 현수가 준비하기로 했고 음식은 또 1명의 친구가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건의 이야기를 듣고 청첩장을 현수가 준비한다는 말에 건의 아버지는 현수를 보았다.

"합동결혼식을 할 생각입니다. 다행히 주례를 BS 그룹의 최석호 회장님께서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건의 아버지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안 그래도 주례 때문에 고민을 하던 건의 아버지였다. 상대의 품위에 맞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건의 아버지가 아는 사람 중에 대한 수산의 레벨에 맞는 그런 사람은 잘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 그럼 이미 너희들끼리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이냐?"

"네, 저 역시 아버님께 말씀드릴 겸 해서 겸사겸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건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한테는 이야기했냐?"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당연히 어머니께서 아시잖아요."

건의 아버지는 그런 건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았다.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네."

건의 아버지는 상대의 혼수를 맞추기에도 버거움을 느꼈다. 남자야 집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소한 것이 많이 들어갔다.

"아버님, 혼수는 안 하기로 했어요. 오빠와 저는 저희가 버는 것으로 조그만 집에서부터 시작하기로 이미 저희 아버지께 말씀드려 승낙을 받았어요."

수아는 건의 아버지에게 말을 한 뒤 건을 보았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준비 안 해도 되니, 그렇게 아세요. 뭐! 아들이 장가가는데 정 섭섭하시면 뭉칫돈으로 주셔도 됩니다."

"이놈아, 그래도 그게 아니야. 그리고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예전에 나 도와준다고 다 털었잖아."

건은 현수를 보았다. 현수의 몸값은 지금 6억. 룸넷을 만드는 비용을 다 빼고 나머지는 나누기로 했고 또한 자신의 아이템 중 검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정리하면 조그만 집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저도 있어요. 현수처럼 몇 억은 없지만 조그만 집 살 돈과 이것저것 가전제품 살 돈은 있어요."

건의 아버지는 건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그를 바라 보았다.

"그래도 너 공부 시작하면 아가가 벌어야 하는데……."

건의 아버지는 다 좋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고, 이미 그런 준비를 했다는 건의 말에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건이 사법 고시를 준비하면 수아가 벌어야 한다. 과연 대한 수산의 귀한 딸이 그렇게 할지도 의문이지만 귀한 딸을 데리고 와서 고생시킨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수아는 건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님, 전 괜찮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 잘할 수 있어요."

현수는 옆에서 가만히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휴!"

건의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현수의 생각을 깨웠다.

"고생도 해 봐야 부모님의 소중함을 아는 겁니다. 건이는 아직 고생을 안 해 봐서 저런 소리를 하는데 필요하면 도움을 구할 겁니다. 그래도 부모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건이 하려는 대로 두고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건의 아버지는 현수를 보았다.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현수다. 현수와 비교하면 건은 아직 한참 멀었다고 느껴졌다. 건의 아버지는 현수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점이 바로 주어진 환경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힘들게 살아오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하며 세상을 배워 온 현수가 건의 친구라는 것이 건에게는 복일 것이다.

"그래, 이것도 자기 복이지. 너희들의 문제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단! 나중에 도와 달라는 말은 하기 없기다."

"에이, 아버지도……. 당연히 힘들면 손을 벌려야지요."

"에라이, 이 못난 놈아! 남자가 한번 작정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 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힘들면 도와줘? 차라리 그냥 도움을 받아."

현수는 부자간의 대화를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자신들이 알아서 한다고는 하지만 건의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조금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화를 끝낸 세 사람은 백화점 지하에 룸넷의 공사 현장을 한번 둘러보고는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수아는 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하고는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 앞에서 수진을 기다리다가 수진이 오자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태어나서 극장이라는 곳에 처음 와 보았다. 말로만 듣던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돈을 주고 영화를 본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현수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영화들을 왜 돈을 주고 극장에서 볼까 생각했지만 오늘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흔히 말하는 가치라는 것이 있었다.

내 돈 만 원을 주고 보는 영화는 분명 만 원의 가치가 있었다. 대형 스크린의 사방에서 울리는 음향 등등……. 무엇보다 만 원을 투자했기에 집에서 보는 텔레비전 영화와는 집중도가 달랐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점이 함께 보는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면 다른 사람들도 웃고 내가 슬프면 다른 사람들 역시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 현수를 즐겁게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온 네 사람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현수는 수진이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빠, 영화 재미있었어요?"

"응, 나 사실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거 오늘 처음이었어."

처음이라는 말에 수진은 현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부터 저랑 함께 자주 다녀요. 사실 저도 지금까지 몇 번밖에 가 본 적이 없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이랑 함께 보러 다녔는데, 졸업하고 친구들과 보러 가려고 하니 여자끼리 무슨 청승인가 싶어 안 가지더라고요. 왜, 있잖아요. 연인끼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샘도 나고 해서, 헤헤."

현수는 수진을 보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네, 이제는 오빠가 있어서 연인들한테 샘을 느낄 필요도 없으니 자주 다녀요."

수진은 손으로 현수의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리고는 자신은 현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현수는 아직까지 이런 것이 익숙하지 않아 수진을 보았지만 수진은 현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헤헤! 연인들은 다 이렇게 하고 다녀요."

현수는 그런 수진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어머니께 배운 사랑 그리고 게임상에서 구미호에게 배운 사랑……. 지금 현수가 수진을 생각하는 마음.

현수는 걸으며 하늘을 보았다.

유독 오늘따라 별이 더 많아 보이는 것 같았다.

현수는 별들이 떠 있는 모습이 마치 여우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들이 활짝 웃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현수였다.

수진은 그런 현수의 모습을 보고 따라 미소를 지었다.

"수진아."

"네!"

"결혼식 있잖아."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결혼식에 대해 말을 꺼내는 현수가 조금 이상해서 수진은 현수를 보았다.

"미안해."

뜬금없는 미안하다는 말에 수진은 걸어가던 발걸음을 세웠다.

"내년 봄에 너와 내가 결혼식을 한다고 건이랑 만사귀에게 말했는데, 이왕 하는 거 합동으로 하자고 해서……. 너에게 묻지도 않고 그냥 내 기분에 그렇게 하자고 말해 버렸어."

수진은 내심 긴장하던 마음이 풀렸다. 혹시나 현수가 다른 소리를 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에게 미안하다는 거예요?"

"응, 아버님이랑 어머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인데……."

수진은 상관이 없었지만 정말 부모님이 조금은 섭섭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결혼은 집안에서 가장 큰일에 속하는 일이기에 수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말을 잘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은 나와 먼저 이야기하고 오빠가 결정하면 좋겠어요."

"그래 그리고 식장은 건의 백화점에서 하기로 했어."

수진은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첩장을 만들기로 했고, 만사귀는 폐백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어."

"네, 일단 집에 가서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수진은 현수를 보았다. 처음 느낌처럼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자신에게 실망은 시키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청첩장 만드는 데 얼마나 들어갈까요?"

"몰라, 그래도 폐백 음식보다야 싸겠지. 또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잖아. 출장 요리사를 불러도 많은 돈이 들어가고……."

수진은, 현수가 게임에서는 순간 판단력이라든지 머리 회전이 빠르지만 현실에서는 참 단순하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다른 것보다 돈이 적게 들어간다는 이유로 청첩장을 선택하다니……. 만약 자신이라면 폐백 음식을 선택했을 것이다.폐백이란 시부모님께 예를 올리기 위해 준비해 가는 특별한 음식을 말한다. 시부모님께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저기, 수진아."

"네?"

"결혼하면 우리가 살 집 있잖아……."

"네."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싶어 궁금한 수진이었다.

"수진이, 네가 괜찮다면 2∼3년 정도는 지금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해서……."

수진은 가만히 현수를 보았다.

"그래도 수진이를 낳아 주신 분들이고 이제껏 고이 키워 주신 분들인데……. 그냥 결혼한다고 해서 나가서 사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같아서는 계속 함께 살고 싶은데……. 수진이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니……. 그래도 최소한 2∼3년은 함께 생활했으면 해. 어차피 결혼하면 시골에 계신 어머니도 내가 모셔야 하니, 세 분이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또……!"

수진은 웃었다. 아니, 고마웠다. 수진이 역시 결혼하고 나면 부모님을 떠나야 하는 것이 조금 섭섭했다. 모두 연세가 있으셔서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건,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전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요."

"고마워……."

현수는 내심 집을 구할 돈을 아꼈다고 생각했다.

"혹시, 집 살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죠?"

"아니야, 진짜……."

더듬거리며 말하는 현수를 보자 수진은 웃음이 나왔다.

"진짜? 에이, 그런 것 같은데……. 진짜 아니에요?"

"아니야. 나는 부모님과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았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가족의 정. 그래, 정! 그걸 느끼고 싶어서.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

수진은 현수의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랬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현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떠나 외롭게 성장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런 말은 꺼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정에 굶주린 사람을 그렇게 의심하다니……. 수진은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현수는 대충 변명한 것이 의외로 잘 넘어갔다는 생각을 하고는 수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우리 그냥 부모님 모시고 살자. 아들, 딸 놓고 손자, 손녀 재롱 보며 기뻐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렇게 살자."

"미안해요, 오빠."

두 사람은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내가 아버님께 이야기할게."

"네!"

"그럼, 쉬어."

현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현수를 보고 있던 수진은 자신이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것아, 지금이 몇 신데 이렇게 늦게 와!"

어머니의 잔소리에 수진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것이 정이라 생각했다.

"오빠랑 영화 보고 걸어왔어."

"현수 총각이랑?"

"엄만, 현수 총각이 뭐야! 곧 사위 될 사람인데……."

"그건……. 아직 결혼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수진은 자신이 엄마를 섭섭하게 대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내가 엄마한테 무슨 잘못했어?"

"이제까지 키워 준 부모보다 현수 총각이 더 좋단 말이지?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나이가 들면 다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수진은 그런 엄마를 보고 웃었다.

"엄마, 사실은 오빠가 결혼해서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고 싶대."

"미쳤나? 내가 너희들이랑 함께 살게. 일없다. 그냥 너희들끼리 나가서 살아라. 이 나이에 사위 눈치 보며 살 생각은 없다."

"엄마는……. 그냥 그렇게 알아. 오빠가 최소한 2∼3년은 의무적으로 엄마랑 아빠랑 모신다고 했으니……. 오빠는 엄마랑 아빠가 외로울까 봐 두 분을 생각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수진은 엄마에게 소리를 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지배! 성격하고는……. 이것아, 너 그 성격 못 고치면 시집가서 소박맞아."

수진의 어머니 역시 방으로 들어간 수진에게 소리를 치고는 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편 현수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 그래서 친구들이랑 함께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어."

"아니야, 결혼식 하는데 돈이 얼마나 든다고. 그런 거 아니야, 진짜야."

"어. 그리고 결혼하면 여기서 2∼3년 정도는 살려고……."

"응, 그래야 수진이가 부모님 밑에서 살림하는 것도 배우고 그러잖아."

"아니래두, 여기는 집값이 싸서 집 구하는 데는 얼마 안 들어. 엄마는 몸이 불편하니까, 수진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줄 수 없잖아."

"고스톱은 무슨……. 그래. 어, 엄마도 이제 여기서 살아. 수진 씨 부모님이랑 말동무도 하고."

"무슨 소리야. 왜 죽을 때까지 시골에서 살아? 그러지 말고 여기서 살아."

"몰라, 하여간 그렇게 알고 있어."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해?"

"엄마,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 병 고칠 약도 나와.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엄마도, 항상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잖아. 손자, 손녀 재롱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니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래. 어, 약 챙겨 먹고. 어, 다시 전화할게."

현수는 통화를 끝내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야!"

-말씀하십시오.

"너, 이제부터 하루에 한 번씩 엄마께 전화해서 꼬박꼬박 약 드시라 말해."

-알겠습니다.

"야, 고맙다.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하자. 너도 조카들이 보고 싶지?"

-당연한 말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무슨 걱정?"

-현수 님처럼 아기 역시 단순할까 봐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수진 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끙!"

이제는 덤덤해진 현수다.

"그래, 나보다는 수진이를 닮으면 좋겠다. 나 잔다. 이제 1황자만 잡으면 되니, 야! 조금만 더 도와줘."

-그런 말 마십시오. 저 역시 현수 님과 함께한 가상현실 천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 야! 너도 푹 쉬어."

현수는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며 내일을 준비했다.

* * *

"어떻게 할까?"

객점에서 건과 현수는 1황자와 싸울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도전장을 보내 불러낼까도 생각했지만 1황자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많은 서장의 문파들이 1황자를 두려워하고 있어 그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포달랍궁이나 대뇌음사만 도와주어도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은데, 이미 많은 무인들을 잃어버린 후라 쉽지가 않아."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어. 그들이 중원으로 넘어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새로 배운 무공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도 많은 상대와 싸워야 했으니까……."

"숨어 들어갈까?"

건은 예전에 현수가 땅속으로 길을 만든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잠입해서 들어가자고 했다.

"숨어 들어간다."

"그래, 현수 네가 숨어 들어가고 1황자를 유인해 오면 어떨까?"

현수는 괜찮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각보다 쉽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

납치당한 영취 공주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는 일이었다. 건 역시 현수의 말을 듣고는 영취 공주를 구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네가 숨어 들어가서 구해 와. 살황의 비기라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닐 테니까."

싸우지 않고 빼 오기만 한다면 문제가 아니었다.

"1황자와 싸울 장소를 찾고 그리고 데리고 와. 내가 공주를 보호하고 있을 때 넌 다시 들어가서 1황자를 유인해 와."

"그렇게 해. 그럼, 먼저 싸울 장소를 찾아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의견을 모으고 1황자를 유인해 싸울 곳을 찾기 위해 서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선택한 곳이 바로 파사의 신전이었다.

"어때?"

사의 기운을 거부하는 파사의 신전은 악마록을 익힌 1황자와는 상극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굳이 파사의 신전의 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전의 주위에 그 항마력이 미치고 있었다.

"이곳으로 하자. 1황자는 이곳을 알고 있어. 안 따라올지도 모르니 중간에 약을 바짝 올리는 것이 중요해."

"걱정 마."

현수는 그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빠르기에 있어 천에서 가장 빠른 자신이었다.

치고 빠지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난 이곳에서 준비하고 있을게."

"그래."

현수는 건을 두고 소뇌음사로 향했다. 예전에 들렀을 때와는 달리 자욱한 안개가 소뇌음사 전체에 깔려 있었다.

"기분 나뿐 안갠데."

왠지 모를 거부감을 가지게 하는 안개였다.

하지만 현수는 별 생각 없이 지둔술을 사용해서 소뇌음사로 숨어 들어갔다.

소뇌음사로 숨어 들어간 현수는 먼저 영취 공주를 찾았다. 혹시 영취 공주로 인해 일이 복잡하게 변할 수도 있고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1황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을까?"

현수는 운중무영보를 사용해서 소뇌음사를 뒤지기 시작했다.

현수는 지난날 정빈을 죽였던 별채에서 영취 공주를 찾을 수가 있었다.

"마마!"

영취 공주는 현수를 보고 눈이 커지더니 일어나 현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손으로 현수의 얼굴을 만지며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마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 공!"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 것이니 우선은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수는 영취 공주와 함께 별채를 빠져나와 건이 기다리는 파사의 신전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현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이미 소뇌음사의 라마승들이 별채를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취 공주는 현수의 등 뒤로 숨었다.

현수는 자신이 숨어 들어온 것을 이들이 어떻게 눈치 챘는지 궁금했다.

분명 자신이 숨어 들어올 때나 영취 공주를 찾을 때는 소뇌음사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크, 오랜만이군. 현수!"

라마승들 사이를 헤치며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1황자, 아니 1황자의 모습을 한 만사신군이었다.

"저하를 뵙습니다."

등 뒤에 숨은 영취 공주는 만사신군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현수의 옷자락을 쥐었다.

현수는 그런 영취 공주를 보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그 모습을 본 1황자는 조소를 지었다.

"크크, 현수! 그대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전하, 악마록을 익힌 전하라 할지라도 제가 마음먹으면 전하의 손에서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확신이었다. 운중비록이라면 설사 신의 손에서도 벗어날 자신이 있는 현수였다.

"혼자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누님과 함께 있지 않나? 설령 그대가 휘령의 경공술을 배웠다고 해도 날 벗어날 수는 없다."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전하!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마마를 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하를 황궁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사신군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부상 당한 몸으로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커억!"

현수는 믿지 못하겠는지 영취 공주를 보았다. 만사신군의 말이 끝나자 영취 공주가 머리에 끼워 놓았던 비녀를 손에 쥐고 현수의 등 뒤에서 찌른 것이었다.

"왜?"

하나, 영취 공주는 자신도 자신이 한 일을 믿지 못하겠는지 멍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크크!"

그제야 현수는 섭혼술에 당한 영취 공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지?'

안개 때문이었다. 소뇌음사를 둘러싼 안개는 악마지력을 만들어 놓은 일종의 진과 같은 것이었다.

일단 소뇌음사에 들어온 이상 만사신군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수는 일단 영취 공주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파사의 신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을 향해 무작정 달아나기로 결정했다.

"마마,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악!"

현수의 주먹이 영취 공주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영취 공주는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다.

현수는 영취 공주를 업고 인벤토리에서 붕대를 꺼내 동여맸다.

"잡아라."

만사신군의 명이 떨어지자 소뇌음사의 라마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현수 역시 그들의 손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그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달리는 현수였다.

"운중비록, 운중탄영신!"

현수는 영취 공주를 업고는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피슝!

허공에서 몸을 옆으로 회전하면서 화살을 피하고는 다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만사신군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현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크크, 재미있군. 대단해. 설마하니 휘령의 무공을 익혔으리라고는……."

만사신군은 현수의 무공이 구미호의 무공임을 알아보았다. 자신과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지만 운중비록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는 알고 있었다.

"크크, 자신할 만도 하군. 부상 당한 몸으로도 저런 움직임을 보이다니 말이야."

만약 현수가 NPC라면 힘들겠지만 현수는 유저였다. 부상 당해 출혈을 일으키면 붕대를 감으면 그만이고 떨어진 체력은 벽곡단을 먹으면 그만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만사신군은, 보면 볼수록 현수가 대단한 자라고 생각했다.

"크크, 때가 된 것 같군."

만사신군은 현수를 죽인 뒤 영취 공주를 데리고 황궁으로 갈 생각이었다.

만사신군은 자신에게 몸을 준 1황자의 소원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대학사는 말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에 죽은 지 이미 오래였다.

현수는 만사신군의 느긋한 마음과 달리 답답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든, 적들은 한 발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현수는 소뇌음사에 깔려 있는 안개로 인해 자신의 행동이 노출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운중비록의 신법이 뛰어나서 버틸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현수는 방법을 바꾸어 만사신군을 공격했다.

"호심발도술!"

츄츄츄츄츄!

살황묵혈소로 펼쳐지는 호심발도술은 강맹하기 그지없었다. 용천검으로 펼친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만사신군을 향해 몰아쳐 가는 강기가 그의 앞에서 사라져 버리자 현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만사신군의 악마지력이 현수의 강기를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악마록의 무공 중 수라흡정반탄신공의 위력이었다. 수라흡정반탄신공은 상대의 기를 흡수하는 신공으로, 극성으로 익히면 상대가 뿌려 대는 강기까지 흡수해서 다시 상대에게 돌려주는 그런 무공이었다.

"크크! 괜찮군. 받았으면 다시 돌려주어야지."

만사신군은 현수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덩이의 강기가 현수를 향해 다시 쇄도해 왔다. 현수는 호심발도술을 사용해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강기를 막았다.

콰아아아앙!

강기와 강기가 허공에서 부딪치고 현수는 그 반탄력으로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수의 계획이 바로 이것이었다.

탄력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대상을 만사신군으로 정해 공격한 것이었다. 현수는 뜻하지 않게 만사신군의 무공을 엿보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었다.

"크크! 역시 머리가 좋아."

달아나는 현수를 보고 만사신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현수의 무공을 파악해서 소뇌음사의 라마승들로만 그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직접 나선 것이었다.

현수는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무작정 건이 기다리는 파사의 신전을 향해 나아갔다.

현수의 뒤를 쫓는 만사신군의 입가에 미소가 생겨났다. 그가 향하는 방향이 어딘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 생각은 좋으나 이미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은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군. 크크, 재미있어."

1황자가 만사신군의 악마록을 얻었을 때 이미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은 의미가 없었다.

그만큼 만사신군의 악마지력은 강했다. 예전에 파사의 신전에 봉인당한 이유는 도황에게 부상을 입어 악마지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황자의 몸을 얻은 만사신군은 예전보다 더욱 강한 악마지력을 모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파사의 신전은 더 이상 그에게 제약이 될 수 없었다.

파사의 신전에 도착한 현수는 신전 안으로 영취 공주를 데리고 들어갔다.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이라면 만사신군이 걸어 놓은 섭혼술을 제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신을 잃은 영취 공주를 신전 안에다 눕혀 놓고 현수는 다시 밖으로 나와 건과 함께 1황자를 기다렸다.

"올까?"

"온다. 1황자에게는 영취 공주가 꼭 필요한 존재니, 필히 온다."

현수는 확신했다. 현수의 말대로 만사신군의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잡혔다.

"조심해. 상대의 내력을 흡수해서 다시 상대에게 돌려주는 기이한 무공을 쓰니, 될 수 있으면 무공을 자제하고 붙어서 끝내야 할 거야."

현수는 자신이 소뇌음사에서 겪은 이야기를 빠르게 했다. 건은 현수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만사신군을 향해 도강을 쏘아 보냈다.

"헛!"

현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건은 조금 긴장하는 듯했다.

"크크! 도황……. 그 빌어먹을 놈의 도황의 후예가 함께 있었단 말이지. 크하하하하."

만사신군은 건의 무공을 알아보고는 크게 웃었다. 지난날 도황으로 인해 부상 당해 파사의 신전에 봉인된 것이 억울했는지 건을 보자 전신에서 진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샤샤샤샤!

말이 필요 없는 싸움이었다. 건과 현수는 빠르게 1황자의 좌우로 나뉘어 공격해 들어갔다.

건과 현수!

베타 시절 최강이라는 두 사람의 합공은 만사신군을 몰아붙이기에 충분했다.

만사신군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1황자가 아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만사신군. 초절정을 넘어선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찔러 오는 현수의 검을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옆으로 흘리고, 베어 오는 건의 도를 몸을 회전시키며 피하는 동시에 현수의 허리를 발로 가격했다. 그 반동으로 건의 목을 후려 차 버리는 만사신군이었다.

"커억!"

두 사람은 만사신군의 일격에 땅을 뒹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일어나 공격하는 두 사람과 만사신군의 공방은 계속되었다. 만사신군의 공격이 점점 눈에 익숙해지자 두들겨 맞기만 했던 두 사람의 공격이 먹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뇌전류!"

간혹 현수는 뇌전류라는 빠른 쾌검으로 만사신군의 공격을 끊어 놓았다.

"크크!"

만사신군은 무엇이 좋은지 웃고만 있었다. 맞아도 웃었고 때려도 웃었다. 어떻게 보면 만사신군은 지금 두 사람을 농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맹룡강천!"

허공에서 만사신군을 향해 강기로 공격하는 건을 보고 현수는 만사신군에게 달려들었다.

현수는 만사신군이 수라흡정신공으로 건의 강기를 흡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만사신군은 건의 강기를 피해 버렸다.

"커억!"

현수가 건의 강기 속에 달려든 꼴이 되었다.

"현수야."

"젠장!"

현수는 벽곡단을 하나 입에 넣고는 다시 일어났다. 만사신군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수라 18장법!"

만사신군의 손이 검게 물들어 가더니 이내 장풍이 쏘아져 나왔다.

18방위를 점해 두 사람이 피할 공간을 주지 않을 목적이었는지 그의 장법은 실로 변화무쌍했다.

"운중비록, 운중난화무!"

현수는 보법을 펼쳐 만사신군의 공격을 피해 냈고 건은 만사신군의 장풍을 힘으로 부딪쳐 나갔다.

"맹룡강천!"

콰아아아앙!

"크크크, 빌어먹을 도황의 후예! 하지만 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구나."

만사신군의 모습은 참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는 이들 두 사람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만사신군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도 합공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착각이었다.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은 1황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아, 시간차로 공격해 들어가자. 근접전은 우리가 불리한 것 같다.

현수는 수라흡정반탄신공이라는 만사신군의 무공 때문에 최대한 무공 사용을 절제했지만 붙어서 싸워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건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좋아, 나부터 공격하지. 넌 쾌검으로 타이밍을 빼앗아.

-시작하자.

두 사람은 일제히 만사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맹룡강천!"

건은 한 덩이의 도강을 쏘아 보내는 것으로 멈추지 않고 만사신군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건의 도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만사신군은 수라흡정반탄신공으로 건의 도강을 흡수해서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때 현수의 검이 움직였다.

"뇌전류!"

한 줄기의 빛이 만사신군의 허리를 향해 쏘아졌다.

하나, 만사신군은 놀라기는커녕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크크!"

두 사람의 공격은 만사신군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추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헉!"

건과 현수는 지금 일어난 상황에 놀라서 만사신군에게 달려드는 행동을 멈추고 허공으로 신형을 날렸다.

슈슈슈슈슈!

"천밀밀!"

"맹룡강천!"

콰아아아앙!

땅으로 내려선 두 사람은 만사신군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공격해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괴물이군."

건은 만사신군 앞에서는 어떠한 공격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사술을 부리는지 몰라도 놈을 맞힐 수 없으면 우리가 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건의 말을 듣고 있던 현수가 움직였다.

"환영사사연혼술!"

-환영사사연혼술이 실패하였습니다.

현수도 자신의 환술이 실패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역시 환술도 통하지 않아."

"그럼, 최고의 무공을 사용해 볼까?"

건은 자신의 최고 무공인 승천파멸도를 사용했다. 현수 역시 뇌전파천황을 사용해 함께 만사신군을 공격했다.

"크크, 멋진 공격이다."

만사신군은 두 사람의 공격에 감탄을 보내면서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아수라앙천마공!"

순간 만사신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악마상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수십, 아니 수백의 악마상을 한 만사신군의 악마지력이 두 사람의 공격에 부딪쳐 나갔다.

콰아아아앙!

이기어검과 이기어도술이 만사신군의 악마지력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커억!"

"으윽!"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무공으로도 만사신군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했다. 두 사람은 만사신군의 무공에 당해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그 피 속에는 내장의 조각들도 함께 보였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내상을 입은 두 사람이었다.

만사신군은 웃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힘들겠지?"

"그런 것 같다. 도망갈까?"

건이 먼저 자리를 피하자고 제의했지만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퀘스트!"

현수는 이번에 물러서면 영원히 만사신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데도 힘든데 혼자서는 더욱 무리였다.

"그렇지, 그 빌어먹을 퀘스트."

현수와 건은 다시 만사신군을 노려보았다.

"한 번 더 움직여 보자."

건이 먼저 만사신군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건은 만사신군의 상반신을, 현수는 하반신을 목표로 공격했지만 오히려 만사신군의 손과 발에 당해 물러서야 했다.

"크억."

"젠장!"

어떤 수를 써서 공격을 해도 만사신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답이 안 나오는데."

"그렇지. 환술로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면 어떻게 답이 나오겠는데……. 놈의 내력이 나보다 높아 환술이 통하지 않아."

건은 현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내가 놈의 내력을 낭비시킬 테니 넌 기회를 봐."

"어떻게 하려고?"

건은 쉽게 생각했다. 싸우다 보면 자연히 내력이 내려갈 것이니 그때를 노려 환술을 사용하라는 이야기였다.

"역발산을 닮아 가는 것 같다. 놈은 우리가 사용한 무공을 흡수해서 다시 돌려주는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내력 소모가 없어."

"해 보자. 그냥 당하는 것보다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 봐야지."

건은 만사신군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현수의 말대로 건이 쏘아 보내는 무공을 흡수해서 그대로 돌려주었기에 건의 내력만 소비할 뿐이었다.

건은 고개를 흔들며 내력 회복제를 복용하고 다시 내력을 채웠다.

만사신군은 두 사람이 흥미로운 듯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크, 재미있군."

현수가 다시 만사신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을 말아 쥐고는 만사신군의 얼굴을 향해 뻗는 현수였다. 손을 들어 올려 현수의 주먹을 막는 동시에 무릎으로 현수의 복부를 공격하는 만사신군이었다.

두 손으로 만사신군의 무릎을 막고 허리를 숙여 발을 뒤로 올린 후 그의 머리를 공격하는 현수였다.

하지만 만사신군의 두 손이 현수의 발을 막고, 현수가 한 발로 땅을 지탱하고 있는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현수는 만사신군이 자신의 발을 거는 힘을 이용해 몸을 옆으로 누이면서 자신의 한쪽 발을 잡고 있는 만사신군의 손을 공격했다.

만사신군이 급히 손을 놓자, 현수는 땅으로 떨어지면서 두 손으로 땅을 짚고는 다시 두 발로 놈의 정강이를 공격했다.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크크! 제법이야, 박투술에도 재간이 있는 것을 보면……."

현수가 자세를 잡고 일어서자 만사신군이 달려들었다.

"욱!"

만사신군의 주먹이 현수의 복부를 가격했다. 고통에 허리가 절로 숙여졌는데 연속해서 돌려차기로 얼굴을 두들겨 맞은 현수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크악!"

현수는 만사신군의 발차기에 나가떨어졌다.

건은 현수와 만사신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의 무공을 사용했더라면 끝장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사신군이었다. 언제든지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그였지만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음, 악마록에 무슨 단점이 있어.'

건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현수와 만사신군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공을 사용하면 흡수해서 돌려주고 강기가 아닌 어검술을 사용하면 무공으로 뭉개 버리는 만사신군의 모습이었다.

'그렇구나.'

건은 악마록의 약점을 찾았다. 약점은 바로 내력의 소비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아수라앙천마공을 사용할 때면 순간 내력의 소모로 인해 만사신군이 인상을 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하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승천파멸도!"

츄츄츄츄!

건의 공격에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막는 만사신군을 보면서, 건은 자신의 생각대로 아수라앙천마공이 상당히 많은 내력을 소모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건은 만사신군에게 두들겨 맞아 얼굴 형태가 조금 변한 현수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죽겠다. 저놈은 이제껏 우리와 상대했던 놈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현수가 만사신군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약점이 있다. 놈의 무공은 내력의 소비가 많아 자주 쓸 수 없다. 그래서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설마?

현수는 건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다시 1황자를 보았다.

-넌 내력을 보충해서 기다려. 내가 놈의 내력을 고갈시킬 테니. 그때 환술을 사용해서 놈을 잡는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은 잠시 쉬어야 할 때였다. 맞아도 워낙 많이 두들겨 맞았기에 쉬고 싶었다.

건이 나서자 만사신군은 살기를 떠올렸다.

현수는 영취 공주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협박할 인질이 될 수 있는 자였기에 죽이지는 않았지만 건은 달랐다.

복수의 대상이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놈의 제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느낀 고통을 돌려주고 잔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건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만사신군을 공격했다.

"승천파멸도!"

츄츄츄!

도기를 머금고 1황자를 공격해 들어가는 흑랑도였다.

"아수라앙천마공!"

그때부터 건과 만사신군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건은 모든 내력을 사용해서 흑랑도를 조정했고 만사신군은 흑랑도를 잡고 건을 공격했다.

"커억!"

아수라앙천마공의 악마상이 건의 전신을 때렸지만 건은 이를 악물고 흑랑도를 조정했다.

건의 목적은 만사신군의 내력을 조금이라도 더 소비시키는 것이었다.

무수한 악마상이 건의 전신을 때렸지만 그래도 참았다. 건의 한쪽 무릎이 바닥에 꿇렸다.

"건아!"

현수는 건을 불렀지만 건은 여전히 흑랑도에 내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건의 근성에 놀란 듯 만사신군은 건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 놀라움은 살기로 더욱 짙어 갔다.

"크악!"

건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현수가 있는 곳으로 튕겨져 날아왔다.

"지금!"

건은 힘겨운 듯 말을 하고는 체력 회복제와 내력 회복제를 복용했다.

"뇌전탄검!"

현수의 손을 떠나 직선으로 쇄도해 나가는 용천검이었다.

인상을 쓰며 조금은 지친 듯한 만사신군의 모습을 현수도 볼 수 있었다.

"환영무적!"

정말 환술이 먹혀들어 갔다.

"죽어라, 뇌전파천황!"

츄츄츄츄츄윳!

살황묵혈소가 만사신군을 향해 휘몰아쳐 나아갔다.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는 살황묵혈소는 정말 만사신군의 신형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보였다.

하나, 그건 현수나 건의 바람이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살황묵혈소를 피하는 만사신군이었다. 그리고 환술에서 벗어나자 아수라앙천마공을 사용해 살황묵혈소를 날려 버렸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크크! 환사의 술법이라……. 위험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군. 현수 그대는……."

현수에게 이제껏 보였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만사신군은 현수 역시 건과 함께 죽일 생각이었다.

자신을 환영에 빠트릴 수 있는 유일한 무공이 바로 환사의 술법이었다. 환사의 술법을 알고 있는 현수를 살려 둔다는 것은 마치 강력한 독을 몸에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사의 신전으로 들어가! 일단 시간을 벌자.

건이 먼저 제의를 했다. 파사의 신전이라면 놈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 돼, 영취 공주가 신전 안에 있어. 그리고 이미 파사의 신전의 항마력은 놈에게 소용이 없는 듯했다.

전음으로 빠르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파파파팟!

"피해."

건의 외침에 현수는 반사적으로 놈을 날렸다. 만사신군의 아수라 18장법이 땅을 강타했다.

-놈의 이상한 무공을 보면, 무공으로는 충격을 줄 수가 없어.

건은 환영에 빠진 상태에서 현수의 검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물러서는 만사신군의 모습을 보고 현수에게 말했다.

-놈을 잡는다. 건, 부탁하자. 내가 놈을 부둥켜안을 테니 나와 함께 놈을 죽여.

건은 현수의 말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커억!"

현수에 말에 놀라 잠시 방심을 한 건이 만사신군의 무공에 당해 뒹굴었다.

"건!"

급하게 체력 회복제를 복용하며 일어난 건은 다시 만사신군의 공격을 피해 움직였다.

-어차피 나에게 걸린 현상금 때문에 너에게 죽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넌 무공이 사라지잖아?

건은 현수를 죽이는 것도 껄끄러웠지만 현수가 무공을 잃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아니야, 다른 무공들은 몰라도 아가씨의 무공과 환사의 술법은 잃지 않는다. 그러니 상관없어.

현수는 방각과 혁무기를 통해서 10대 무공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상관이 없었다. 현수는 만사신군을 보면서 시간이 없다고 건을 재촉했다.

-알겠다.

만사신군의 공격을 피하던 두 사람이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환영무적!"

"크크!"

환사의 환술만이 자신을 환술에 빠트릴 수 있었지만 만사신군은 별로 상관치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호신강기 때문이었다.

3촌강기!

어떠한 공격이라도 3촌의 거리를 유지하며 피하는 그의 호신강기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다.

"운중비록, 운중광속신형보!"

현수는 그대로 만사신군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피할 수 없는 빠름이라면 충분히 만사신군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사신군과 현수의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잡으려고 하는 자와 피하는 자!

"환영무적!"

현수는 중간에 환영이 풀리면 힘들기에 환술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헉!"

드디어 현수가 만사신군의 신형을 잡았다. 만사신군은 놀라 몸부림쳤지만 현수는 놓아주지 않았다.

"살황의 일기장 지둔술!"

지둔술을 사용해서 만사신군과 자신의 허리까지 땅속으로 파묻어 버리는 현수였다.

"이노옴!"

만사신군의 벼락같은 호통이 현수의 귀에 들려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현수야.'

"승천파멸도!"

츄츄츄츄!

건이 내력을 있는 대로 짜냈는지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가는 흑랑도의 주변에 기의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아악!"

현수의 눈앞에 알림 메시지가 생겨났다.

-사망하셨습니다. 레벨의 등급에 의해 페널티가 적용이 됩니다.

-1레벨 다운되었습니다.

-용천검이 드랍되었습니다.

-살황의 반지, 팔찌, 목걸이가 드랍되었습니다.

-운중비록의 성취도가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살황의 일기장의 성취도가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환사의 술법의 성취도가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호심발도술의 성취도가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팔검수화진검류가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현천파열권이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천밀밀이 5성으로 하락되었습니다.

현수는 알림 메시지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떨어진 아이템은 건이 주워서 자신에게 줄 것이니 상관없었다.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다른 무공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수의 무공은 다른 천연회의 사람들과는 달리 만자무서로 인해 이미 새로운 무공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흑랑도는 땅속에 파묻은 현수와 만사신군의 허리를 가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현수가 죽는 동시에 건의 눈앞에도 알림 메시지가 생겨났다.

-건 님께서 호면객을 죽였습니다.

-무림맹의 총관인 서문량과 마도련의 총관 마뇌를 찾아가시면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상공!"

허공에서 떨어지는 신형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아나타였다.

아나타는 허리가 잘린 현수를 부여잡았다.

건은 그런 아나타를 보며 긴장했다. 하지만 아나타는 현수와 함께 뒹굴고 있는 만사신군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향해 수도를 세워 강하게 내려쳤다.

빠악!

뇌수가 터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아나타의 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만사신군의 심장을 향해 수도를 박아 넣고는 그의 심장을 꺼내 힘껏 말아 쥐었다.

퍼억!

건의 앞에 또다시 알림 메시지가 보였다.

-퀘스트를 종료합니다.

-보상으로 승천도결의 성취도가 1성 올랐습니다.

-108도객이 영구적으로 건 님에게 귀속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건은 이런 알림 메시지를 보고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나타는 건에게 아무 말 없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땅에 묻힌 현수의 하반신을 꺼내 상반신과 함께 들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건은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나타가 완전히 사라지자 현수의 아이템들을 챙겨서 파사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영취 공주가 여전히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

건은 영취 공주를 깨워 만사신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영취 공주는 만사신군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현수가 왜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마, 현수는 1황자와의 싸움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먼저 의원에게 옮겼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현수가 저에게 마마를 황궁으로 모시고 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황궁으로 모시지 못한 죄는 나중에 황궁에서 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영취 공주는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추호도 자신의 말에 거짓이 없다고 영취 공주를 안심시켰다.

파사의 신전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하늘을 보았다.

맑은 하늘이 마치 앞으로의 서장을 축복하는 듯했다. 건과 영취 공주는 파사의 신전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갔다.

만사신군이 죽었다는 소식은 금방 서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만사신군을 죽인 두 사람은 서장에서 영웅으로 불리어졌다.

중원에서는 승천룡이 호면객을 죽였다는 소문이 나자 현상금을 받은 건을 부러워하며 건에게 무림 10대 고수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10대 고수!

천마 방각.

검황 혁무기.

도황 최건.

권황 짭새.

화왕 화화공자.

불성 각료대사.

금황 멸친어린천룡군.

살황 이현수.

신비이객의 사신낭객 그리고 호면객.

도황 최건!

무림의 동도들이 건에게 붙여 준 칭호였다.

호면객은 건에게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유저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불사신이라는 것을……. NPC가 아니라 유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조용하겠지만 잃어버린 무공의 성취도를 찾으면 천은 호면객으로 인해 다시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빈은 또 하나의 일이 거짓말처럼 풀리자 다시는 천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게 놓아둘 것이라고 다짐했다.

현수는 접속을 해제하고 야를 찾았다. 모든 일이 끝나 홀가분한 생각이 들었다.

"야! 이제 끝이 났어."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이제 황궁에 들러 보고만 하면 돼."

수진이 찾아 올라왔다.

"오빠."

수진이 현수를 보고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현상금이었다.

현수의 몸값은 지금 6억이었다. 그 6억이 날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아까운 모양이었다.

"아니야, 애들과 그렇게 하기로 이미 약속을 하고 진행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만드는 수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창업 자금을 빼고 건과 만사귀와 나누기로 했거든. 사실 혁무기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고 건이었어. 그 덕분에 현상금이 더 올라갔으니 그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지."

수진은 그제야 현수의 말을 이해했다.

"그럼, 오빠는 처음 현상금 4억을 가지는 거예요?"

"아니, 창업 자금이 5억이니까 5억을 빼고 1억을 3명이서 가르는 거야."

그래도 3천3백만 원이었다.

수진은 내심 아까웠다. 현수는 그런 수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게임하면서 돈을 벌 수 없어. 투자하는 것이 있어야 돈도 들어오는 거야. 난 지금 천연회의 문파원이 아니야. 그래도 공성에서 성을 먹으면 나의 지분이 나에게 와. 게임이란 그런 거야. 특히 부르주아 백수들은 이해타산을 철저하게 따지는데 수익에 있어서도 확실하거든. 아깝다고 그런 것을 아끼면 부르주아 백수도 할 수 없는 거야."

수진은 혀를 조금 내밀었다.

"핏, 그래도 아까운걸요. 두 사람이면 약 6천7백만 원인데."

-하지만 앞으로 현수 님께서 벌어들이는 돈은 그 돈의 몇 배가 될 것입니다.

야의 말을 듣고 수진은 야에게 쪼르르 가서는 자리에 앉아 야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부르주아 백수로 뛰어들어 볼까?"

-아마 현수 님께서 반대하실 것입니다.

수진은 현수를 보았다. 현수는 그런 수진을 보고 고개를 흔들며 세면을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야, 너 우리 인순이에게 뭐라고 가르쳤어?"

-컴퓨터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것들만 가르쳤습니다.

"그래? 그래도 아직 너만큼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배움에 있어 상당히 빠른 인순이입니다.

"야, 너도 우리 결혼식 때 인순이랑 결혼해라."

수진은 뭐가 재미있는지 야와 함께 웃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현수는 세면을 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백화점 공사 현장에 가 볼 생각이었다.

"나도 같이 가."

수진이 따라나서자 현수는 수진의 차를 타고 건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수진아, 넌 공사장에 있지 말고 쇼핑하고 있어. 난 내려갔다 한번 둘러보고 갈게."

"왜?"

"그냥. 함께 내려가면 일하는 사람들에게 눈치 보일까 싶어서……."

수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는 응답이 없자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현수는 공사 현장으로 가서 이것저것 알아보고는 수진을 만나 건의 아버지를 만나 뵙기 위해 백화점의 사무실로 향했다.

건의 부모님은 현수에게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너라."

"안녕하세요."

건의 아버지는 수진을 보더니 누구냐는 듯 현수를 보았다.

"결혼할 사람입니다."

결혼할 사람이라는 말에 반가운 듯 일어나 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앉아요."

건의 아버지는 수진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는 기분이 좋은 듯 연방 웃었다.

건이 수아를 데리고 왔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수아 때는 어느 정도 부담감이 작용했지만 수진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친딸처럼 대해 주는 건의 아버지였다.

"그렇게 해라. 고맙다, 현수야. 그래도 날 남이라 생각지 않고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니 말이야."

"저에겐 아버지 되시는 분이 아저씨예요. 그런 말 마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건이 너의 반만 닮았어도……."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백화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현수는 2층으로 올라가 결혼식에 필요한 청첩장을 준비하는 데 있어 디자인이나 규격 등을 어떻게 만들까 하고 야와 대화를 나누었다.

"일반적으로 하면 성의가 없어 보이잖아. 수아가 대한 수산의 외동딸이니 기준을 잡기가 조금 어려워."

-청첩장은 우리가 결혼을 하니 와서 축하해 주세요, 라는 뜻만 담겨 있으면 됩니다.

"그래도……."

-신문을 만들어 보시겠습니까?

"신문?"

신문을 만든다는 말에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만났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각각 싣는 것입니다.

현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다름 사람들에 비해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현수라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남는 시간을 야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자, 현수는 청첩장을 준비한다고 한 것을 후회했다.

생각이 복잡해지자 현수는 다시 천에 접속했다. 그러고는 서장에서 천연장으로 돌아와 건에게 자신의 아이템을 받았다.

"아나타가 너의 시신을 챙겨 들고 어디론가 떠났다."

현수는 건의 말을 듣고 아나타를 한번 찾아갈 생각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가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다.

"난 황궁으로 들어가 일을 끝내고 황궁에서 떨어진 무공의 성취도를 올려야겠어."

"그렇게 해. 나 역시 이제 슬슬 사법 고시를 다시 준비해야 할 때가 다가왔으니."

현수는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들러 현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영취궁을 찾아가 영취 공주를 만나는 것이었다.

영취 공주는 현수를 보고 반가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마마의 은혜로 다행히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한 모습을 뵈오니 저 역시 이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영취 공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수가 황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를 뵙고 그간의 일을 보고한 뒤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영취 공주는 몸을 돌리는 현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현수는 황제를 만나 뵙고 그간에 일어난 일을 모두 보고했다.

"짐이 부덕해서 일어난 일이로다."

"폐하, 가당치도 않는 말씀이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이옵니다. 폐하께서 부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욕심으로 일어난 일이오니 폐하께서는 상심치 마시옵소서."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 현수에게 상을 내리겠다."

"폐하! 신, 현수 폐하께 청이 있사옵니다.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상을 대신하여 주시옵소서."

"허락한다. 현수, 그대는 청을 말하라."

현수는 자신이 원할 때는 무림으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음!"

잠시 생각을 한 뒤 황제는 입을 열었다.

"좋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현수는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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