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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억 그리고 불효 (54/57)

옛 기억 그리고 불효

소뇌음사의 만사신군은 환희영생단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침묵했다. 만사신군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서장의 다른 문파들의 주인들은 불안감에 휩싸여야 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의 취미라고 알고 있는 그들은 이번 환희영생교의 전멸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죽을까 걱정부터 했다.

"아나타의 소식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 톤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옥의 나찰보다 더 무섭게 들렸다.

"오리무중입니다."

"그래?"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아무런 말이 없는 만사신군이었다. 침묵하는 그와 비례하듯 방 안의 공기 역시 무거워졌다.

서장의 다른 문파의 주인들은 만사신군의 눈치를 보고만 있을 뿐 무엇이라 말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 후 만사신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난화는?"

"죽었습니다. 환희영생단의 사찰 한쪽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이라……. 그럼 난화가 누군지 알고 있는 자가 관련이 되었단 말이군. 현수인가?"

1황자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만사신군은 난화공주의 무덤을 만들어 줄 정도면 딱히 현수 말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현수라……."

다시 침묵하는 만사신군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취의 행방은?"

뜬금없이 취의 행방을 물어보는 만사신군의 질문에 마치 늦기라도 하면 죽는 것처럼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주인을 만났다고, 대제님과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크크! 식귀 주제에……. 나와 관계를 끝내겠다고? 우습군."

순간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한편에 서 있는 라마승이 만사신군의 손으로 딸려 왔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보다는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으으으으……."

만사신군의 손에 잡히는 순간, 그의 전신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쿵!"

만사신군은 말라비틀어진 라마승을 한쪽으로 던져 버리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가공할 악마진기다.'

많이 보아 왔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두려운 무공이다.

"크크! 대뇌음사와 포달랍궁에 나의 말을 전해라. 가서 취를 잡아 오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라마승은 대답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명의 죽음으로 끝나서 다행이라 여겼다.

만사신군은 자신의 말을 끝내고는 영취 공주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스르르륵!

영취 공주는 많이 야윈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황궁제일미라는 명성에 걸맞게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만사신군을 보자 마치 짐승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누님."

영취 공주는 그의 말은 듣기도 싫은지 고개를 돌렸다.

"난화가 죽었습니다."

난화 공주가 죽었다는 말에 영취 공주는 가늘게 떨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난화를 죽인 놈이 바로 현수입니다."

그제야 영취 공주는 만사신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취 공주의 눈은 현수가 난화를 죽일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 믿는 눈이군요."

"군은 네놈처럼 기분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분이 아니시다."

"크크, 유약하던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현수 그놈입니다."

영취 공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놈이 아바마마의 뜻을 거스르려고 했으니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더냐!"

"크크, 입장의 차이입니다. 누님! 그리고 천자의 자리는 처음부터 저의 것이었습니다."

영취 공주는 더 이상 만사신군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만사신군은 그런 영취 공주의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크크, 오늘따라 앙탈을 부리는 누님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네놈이 끝까지 날 희롱할 생각이더냐."

"전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누님! 이번에는 참겠지만 다음부터는 참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한 자들은 지금까지 살려 둔 적이 없습니다. 그건 아무리 누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니 알아서 하십시오."

영취 공주는 만사신군의 경고를 듣고 몸을 떨었다.

만사신군이 방을 나가자, 영취 공주는 창을 통해 하늘을 보았다.

"난화야……."

난화 공주의 죽음을 믿지 않는 영취 공주였다. 금방이라도 웃으며 나타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만사신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하고 운기에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눈을 뜬 만사신군은 충만한 내력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 1황자의 흉내를 내는 것도 힘들군."

파사의 신전에서 1황자의 몸을 차지한 만사신군은 지금까지 1황자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크크, 그년의 미색은……."

영취 공주를 볼 때마다 안고 싶은 욕망을 참기 힘든 만사신군이었다.

아직까지는 황제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강해 영취 공주를 그냥 두고 있지만 그 생각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만사신군이었다.

"크크, 그나저나 재미있군."

만사신군은 현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호면객이었다.

천지회의 혁무기와 천마회의 방각을 이긴 호면객을 생각하면 호승심이 절로 생겨났다.

마음 같아서는 호면객을 찾아 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소뇌음사를 떠나 중원으로 호면객과 싸우러 간다면 아마 서장의 수장들은 서로 손을 잡고 자신에게 칼을 겨누려고 할 것이다.

그들과 싸워서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과 싸운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또 자신의 유희가 사라지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만사신군은 중원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에게 부상을 입혀 악마록에 악마진기를 남겨 육체탈혼술까지 사용하게 만든 도황의 무공은 가공할 만했다.

그렇기에 10대 무공이 한 번에 등장한 지금은 나서서 움직일 때가 아니라 기다릴 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서 하나의 열매를 꺼냈다.

취가 원하던 만화극염화의 열매였다.

"크크, 감히 식귀 주제에 나를 배신해!"

만화극염화의 열매를 손으로 꽉 쥐어 버리고는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주르르르!

악력에 의해 만화극염화의 열매가 쭈그러들어 열매의 즙이 만사신군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만사신군은 다시 운기에 들어갔는데 처음 운기와는 다르게 검은 기류가 방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 * *

현수와 만사귀는 난주에서 강소성의 천연장으로 돌아왔다.

만사귀는 취에게 부적술에 관해서 많이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만사귀는, 일 때문에 잠시 천을 접속할 수 없게 된 건과 현수 그리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현수를 대신해서 여인천하의 문주였던 진소려를 그리고 자신을 대신할 취를 구했다. 물론 진소려가 현수의 몫을 하려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그녀의 신법이라면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자신의 몸을 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여인천하를 도와주고 그녀를 얻은 것이었다.

진소려가 현수에 비해 부족하다면 취는 만사귀에 비해 너무나 과분한 NPC였다.

천연장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잠시 천을 그만두어야 되는 이유를 말했다.

악비는 잠시 난감했지만 현수와 건 그리고 만사귀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럼, 룸넷을 하면 우리의 전용석을 만들어 주는 거야?"

수금인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신 싸게는 해 줄게."

"그건 당연한 거잖아. 현수, 네가 룸넷을 만들면 그곳을 우리 천연회의 본부로 만들어 공성이나 기타 이벤트 때는 함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현수 넌 룸넷을 한다고 해도 가끔 접속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현수는 수금인의 말을 듣고 괜찮은 생각이라 여겼다. 일단 고정 손님을 확보하는 것이니…….

현수는 천연회에서 많을 사람들을 받아 문파원이 한 100만 되어도 장사 걱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괜찮네, 그때는 나도 룸넷에서 접속할 수 있고……."

건이나 만사귀 역시 수금인의 말을 듣고 호응했다.

"자, 자.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앞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악비는 주 전력 3명이 빠진 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번에 진소려라는 유저와 NPC 몬스터인 취를 천연장의 식구로 들였어요."

"그건 잘했다. 하지만 현수의 전력을 감당하지는 못할 거야. 앞으로 강소성에서 공성을 하기 위해서는 현수의 도움이 절대적이야. 현수가 그때마다 접속을 해서 게임을 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꼭 공성만으로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역발산이 있잖아요. 그리고 화화와 짭새도 있고 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좋아하는 카오스도 있고……!"

현수는 둘러앉아 있는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있는데……."

건의 말에 모두 건을 주목했다. 악비를 보며 말을 하는 건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에게 부하가 있습니다. 도황의 전진을 이으면서 그들 역시 함께 취했는데 모두 108명이고. 그들로 하여금 천연장을 지키게 할 생각입니다."

건은 108도객을 이야기했다.

비록 그들이 NPC 몬스터라고는 해도 모두 강한 무인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유저들의 레벨이 올라가 능력의 차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충분히 천연장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 역시 수련을 하면 강해지니 천연장의 안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와, 정말? 너 쫄따구가 108명이나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버린 건이었다.

"좋아. 그들을 천연장의 NPC로 등록해."

"알겠습니다."

현수 역시 은자림으로 하여금 천연장을 암중으로 보호하고 자신의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천연회가 천에서 가장 강한 문파가 아닐까요. 저 역시 많은 수하들이 있거든요.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는데."

현수의 말을 듣고 모두 조금은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 내가 살황이야! 살수들의 종주. 쉽게 이야기하면 천에서 존재하는 살수들은 다 나의 부하들이지. 또 황궁의 무사들 역시 나의 부하들이지. 그러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어."

듣지나 말걸……. 모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 짭새는 권장을 쓰는 모든 이들이 부하가 되어야 하고 도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건의 부하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난, 또 뭐라고……. 야! 그럼 힘쓰는 사람은 다 내 쫄따구야?"

역발산이 현수에게 핀잔을 주었다. 현수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실명인을 불렀다.

"실명인!"

실명인을 부르는 현수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건과 화화공자 그리고 짭새는 어렴풋이 실명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실명인이 나타나 현수 앞에 부복했다.

"모두는?"

"천연장 주위에 배치가 끝났습니다."

역발산은 실명인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는 현수와 실명인을 번갈아 보았다. 역발산뿐만이 아니었다. 안에 있는 모두는 역발산과 마찬가지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제자들은?"

"2단계 수련을 마친 자들이 20명이고 2단계 수련에 접어든 자들이 30명, 도합 50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야?"

필살검이 궁금한지 물었다. 보기는 평범하지만 자신이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고수라면 천에서 유저와 NPC 몬스터를 합쳐 100위 안에 드는 고수라는 소리였다.

"은자림의 당대 림주!"

현수의 말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사사혈천의 이벤트 때 처음 그들의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각 문파의 장로들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을 암살한 자들이 바로 은자림의 살수들이라 했고 사사혈천의 사주를 받아 움직였다고 알고 있었다.

"와, 그럼 천하무적의 천연장이 되겠네."

악비는 생각을 정리했다.

108도객들과 은자림의 살수들! 이들은 지금의 현수나 건보다 더 큰 무력이었다. 현수나 건에게 일마나 일황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은자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현수와 건 그리고 만사귀가 빠진다고 해도 결코 전력이 약화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악비는 세 사람이 고마웠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냥 게임을 그만두어도 그들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강하지만 그들이 없다고 해서 천연장이 몰락하지는 않는다. 조금 더 움직이고 조금 더 위험이 따를 뿐이다.

"고맙다."

악비의 말은 천연회 모두의 말이었다.

"당연히 대타를 구하고 나가야지요. 그리고 영영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천연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접속해서 한팔 거들 테니."

건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건의 미소를 따라 모두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좋았다. 서로를 배려해 주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서로를 신뢰하는 이들이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부르주아 백수들의 모임인 천연회 문파원들이었다.

난주에서 진소려가 문파를 탈퇴하고 천연회로 합류했다.

그런데 현진이라는 여자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수금인은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았다.

"현진이라고, 저와 쭉 함께해 온 동생이에요. 저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악비는 진소려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수금인은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모두 조금은 의아해했지만 곧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환영식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젠장!"

수금인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버렸다.

누워서 눈을 감는 수금인의 머릿속에 잠자고 있는 기억의 일부가 되살아났다.

그때는 어렸기에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현진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현진이의 빈자리를 느낀 수금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만나려고 했지만 이미 현진이 곁에는 다른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금인은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진이의 곁에 있는 남자는 자신보다 더 능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 좋은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양보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진이의 빈 공간은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현진이가 자신을 떠난 이유가 돈 때문이라 생각했다. 게임을 그만두고 일을 해 보았지만 그렇게 해서 돈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라는 것을 느낀 수금인이었다.

그때 수금인은 결심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부르주아 백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게임에서 돈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어들였다. 현진이는 반대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을 떠난 현진이에게 게임으로 이만큼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현진이를 보니 그럴 자신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르주아 백수의 이미지는 좋은 것이 아니었고 또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몰라도 자신이 부르주아 백수라는 것을 현진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휴!"

답답한지 다시 일어나서는 천연장의 한쪽에 지어진 정자 위로 올랐다.

"젠장!"

수금인은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운이가 수금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달려왔다.

"아저씨."

"소운이구나."

"뭐 해요?"

"하늘을 보고 있지, 파란 하늘을!"

소운이는 수금인의 말에 절로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핏, 매일 같은 하늘인데……."

한참을 올려다봐서인지 소운이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는 정자 위로 올라와 수금인의 옆에 앉았다.

"아저씨, 무슨 걱정 있어요? 다른 날과 달리 아저씨 얼굴에 웃음이 없어요. 마치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말이에요."

소운이의 말을 듣고는 흠칫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은 소운이가 말한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과 같았다.

"그렇구나. 아저씨의 마음이 정말 저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낀 것 같구나."

"그럼, 바람 님에게 부탁해요. 바람 님이 바람을 불러 먹구름을 물러가게 해 줄 거예요."

수금인은 그런 소운이가 참으로 귀여웠다. 수금인뿐만 아니라 천연장의 모두가 소운이를 귀여워했다. 미령의 부모님들은 소운이를 마치 손녀 보듯 귀여워해 주었다.

"바람 님이라……."

수금인은 잠시 소운이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과연 자신의 마음에 낀 먹구름을 걷어 줄 사람은 누굴까.

'형수님이라면…….'

그래도 악비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아레스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핏! 오늘은 아저씨 재미없어서 소운이는 언니랑 오빠한테 가서 놀아야겠어요."

소운이는 자신의 말을 마치고는 미령의 동생들을 찾으러 갔다. 소운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수금인은 소운이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러다 수금인은 환영식을 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모여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수금인의 눈에 들어왔다.

"어서 와라."

악비가 수금인이 오는 것을 보고 손짓으로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수금인이 자리에 앉자, 악비는 진소려와 현진이에게 수금인을 소개를 했다.

"여기는 수금인이라고, 우리 천연회의 부회주를 맡고 있고 또 자금을 담당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했지만 수금인의 눈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인마! 그래서 넌 아직 여자가 없는 거야."

수금인은 본능적으로 필살검을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근데, 건이랑 현수는 어디 갔어요?"

"두 사람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서장으로 떠났어."

수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을 따라 서장으로 가고 싶었다.

현진이 역시 수금인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소려가 천연회로 간다고 했을 때, 따라나선 이유는 바로 천연회에 수금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연장에 도착해서 수금인을 만나고 자신을 피하는 것을 보고는 이내 후회했다.

현진이가 천을 하는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었다. 수금인과 헤어진 후 만난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무 걱정 없이 살던 현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난 후부터였다.

29세의 애 엄마.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사무직으로는 애를 키우면서 부모님을 함께 모시는 일이 버거웠다.

결국, 현진이가 선택한 일은 노래방 도우미였다. 그래도 그 생활은 힘들어도 충분히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으니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손님 중에 게임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말을 듣고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손님과 함께 다니면서 게임을 했지만 그가 말하는 것처럼 돈을 벌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르쳐 준다는 미끼로 자신의 몸을 요구했고 현진은 결국 그와 떨어져 혼자서 게임을 해야 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 게임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노래방에 다시 나가면서 시간을 쪼개 게임을 하다 진소려를 만났다.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그녀는 정말 친동생에게 해 주는 것처럼 현진이에게 잘해 주었다. 현진은 그런 진소려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고 진소려는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동생의 이야기를 해 주면서 게임으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현진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있고 부모님이 계셨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에서 지난날, 자신이 버린 수금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진이는 수금인이 자신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난주에서 환희영생단과 싸울 때나, 지금의 모습에서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더욱 미안했다.

환영회가 끝나고 진소려와 현진이는 한 방을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했다.

천연장은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건의 수하였다가 이제는 천연장의 식구가 되어 버린 108도객들이 머물 곳과 현수의 수하였다가 역시 천연장의 식구가 되어 버린 은자림의 살수들이 머물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식구가 늘어나다 보니 자연히 미령의 가족만으로 천연장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져 일반 NPC들을 모집하니 그 수가 더욱 늘어났다.

사람이 늘어나자, 자연히 천연장도 구성 체계를 새로이 잡아야 했다.

장주는 여전히 악비가 맡았고 부장주와 자금 관리는 수금인이 맡았고, 장원 전체를 관리하는 일은 령이 맡았다. 108도객들로 구성한 적천대를 만들어 그 수장의 자리에 108도객의 대주인 한을 앉혔다. 은자림의 살수들로 구성한 멸천대는 실명인이 수장을 맡았다.

그리고 역발산을 수장으로 한 천연대는 천연회에서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속했고, 여자들은 내당이라 하여 미유가 그 수장을 맡아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들로 구성된 내당은 하오밀문에서 보내오는 정보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을 겸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내당에서 할 일이 가장 많았다.

현수와 건 그리고 만사귀는 천연회의 구성에서 빠져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만사귀는 천연장의 확장 공사를 하면서 취와 함께 건물의 배치부터 나무 한 그루의 위치까지 선정해 주면서 모산의 진을 천연장에 설치하는 일을 했다.

수금인 역시 자금을 담당하고 있기에 천연장의 공사 기간 동안에는 천연장에서 만사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현진이는 천연장의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하면서 조금씩 배워 갈 수 있었다. 수아가 건과 함께 사냥하면서 조금씩 깨달은 것을 현진이 역시 깨달아 가고 있었다.

"많이 늘었네."

"덕분에, 많이 배웠어."

수아와 진소려, 이화, 혜련이 그리고 수진이까지 여자 5명이 모여서 사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빠들은 왜 우리랑 같이 사냥을 안 해? 보통 다른 문파들은 여자들과 사냥하기 위해서 잘 보이려고 하고 그러는데."

현진이는 천연장에서 함께 있으면서 남자들과 함께 사냥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혜련이만 남자들과 사냥을 하곤 했다.

"그거? 우리가 못 따라가서 그래."

"내가 보기에는 수아나 수진이는 상당히 강하던데.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 같기도 했어."

수아와 수진은 현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어, 뭐라고 해야 하나……. 레벨의 차이라고 설명해야 하나?"

레벨의 차이? 현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아의 레벨이 지금 130대이고 천연장의 남자들은 오히려 수아보다 낮은 사람도 있었다.

수아보다 레벨이 높은 사람은 기껏해야 필살검, 환상검, 화령검객 그리고 카오스, 이들 4명뿐이었다.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이 아닌데, 이건 현진이 네가 직접 느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 레벨이라는 차이가 참으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나중에 겪어 보란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 다들 좋겠다. 난 언제 수아나 수진이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진소려는 현진이의 마음을 알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수금인 오빠도 강해? 천연장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던데."

현진이는 수금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금인이 오빠? 강하지. 특히 돈이 걸린 문제라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들지. 그래서 많은 돈을 벌고 있기도 하고."

현진이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말에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현진이, 네가 직접 한번 물어봐. 금인이 오빠는 아직 여자 친구가 없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니? 이런 게 인연이 될지."

"그래."

현진이는 언젠가 한 번은 수금인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도움도 받고 싶었다. 자신을 나쁜 여자라고 욕해도 수금인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소려를 만난 날! 다시는 노래방의 도우미로 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을 끝내고 천연장으로 돌아오자, 현진이는 수금인을 찾았다.

"오빠."

"어……. 불렀어?"

"이야기 좀 해요."

수금인은 현진이와 함께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진이 네가 게임을 하리라고는……."

현진이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오빠."

"아니, 오히려 잘된 것 아니야? 덕분에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 결혼했으니."

수금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조금 묻어 있었다.

"그 사람…… 죽었어요. 2년 전에……."

말을 듣는 수금인은 순간 멍해졌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진이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이 미안했다.

"미안해, 몰랐어. 난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어."

현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현진이는 솔직하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수금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저에게 세 살 난 사내아이가 있어요. 이름이 명진이에요."

수금인은 현진이를 보았다.

수금인의 본명이 명진이었다. 최명진! 우연인지 현진이의 죽은 남편의 성 역시 최씨라 그 아이의 이름 역시 최명진이었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살아가려고 노력했는데 세상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었어요."

수금인은 묵묵히 현진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저에게는 돈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많은 돈을 준다는 노래방 도우미 일을 시작했어요."

노래방 도우미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현진이를 보는 수금인이었다.

"미안해요. 그러다 게임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부터 게임을 하기 시작했어요."

현진이에게 조금은 실망했다는 표정을 짓는 수금이었다.

"사실, 오빠에게 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서예요. 전 돈이 필요해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해요.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오빠가 가르쳐 주세요.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 오빠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현진이의 말을 듣고 있는 수금인은 가슴이 아려 왔다. 고작 이렇게 살기 위해서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간 것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현진이의 아픈 기억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거 없어. 게임으로 돈을 번다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뿐이야. 많은 사람들이 게임으로 돈을 벌길 원하지. 하지만 그건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 방법 같은 것은 없어. 그러니 차라리 게임을 하지 말고 사무직의 경리 일을 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수금인은 현진이가 결코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으면 했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지, 사람이 돈을 유혹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현진이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수금인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오빠!"

"미안해. 나 역시 그 방법을 모르니까."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수금인이었다. 하지만 현진이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만큼 힘든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만사귀는 현진이에게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방법은 시세 차이에서 오는 이득으로, 지금 부르주아 백수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같은 아이템이라도 싸게 파는 사람이 있고 또 비싸게 파는 사람이 있다. 싸게 아이템을 사서 비싸게 파는 방법인데 그 시세 차를 이익으로 얻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초기 자본이 없으면 쓸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현진이는 수금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방법은 자신도 예전에 사용했던 방법으로 들이는 시간에 비해 버는 돈이 너무도 작았기 때문이다.

"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그래?"

말이 없는 현진이를 보자 대충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수금인이었다.

"맞아,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만 돈을 버는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반 사무직의 경리 자리라도 알아보면서 해. 일을 마치고 게임을 할 수 있으니까."

수금인은 현진이가 그렇게 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현진이는 수금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현진이가 돌아가고 수금인은 정자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때, 은자림의 살수 하나가 수금인의 앞에 나타났다.

"정체불명의 무리가 은밀히 천연장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수금인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현진이의 말을 듣고 생긴 우울한 기분을 그들에게 풀 생각이었다.

"일단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주시해 주세요. 전 다른 대주들과 의논할 테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시고 담을 넘는 자들만 손을 봐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은자림의 살수는 소리 없이 수금인의 앞에서 사라졌다.

수금인은 모두 모이라고 전하고 그들이 사냥터에서 돌아오기만을 천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터에서 모두 돌아온 천연회의 문파원들은 임시로 만들어 놓은 회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의문의 무리가 이곳을 포위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악비는 실명인의 말을 듣고 그들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인물은 없었다.

천지회? 천마회? 이 두 곳이라면 자신들을 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들은 호면객에게 깨진 상태였다.

자신들을 노려도 방각이나 혁무기가 어느 정도 무공을 찾았을 때, 그때가 되어야 했다.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포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명인은 그들의 행동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음……!"

"몰랐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누군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기분이 별로군."

악비의 말에 제일 먼저 나서는 사람이 바로 역발산이었다.

"일단 눕혀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 방법은 현수가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말로 이것저것 다 따져 가며 서로 잘했니, 못 했니 따지는 것보다 일단 눕혀 놓고 대화를 나누어 자신이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는 것이 효과 만점의 방법이었다.

현수에게 당한 역발산 역시 이 같은 방법을 즐겨 쓰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맡겨 주시면 소리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실명인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악비는 실명인의 자신 있는 소리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을 볼 겸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멸천대는 놈들을 제거하고 적천대는 천연장 주위를 넓게 포위해서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알겠지만, 우리는 강소성의 민심도 살펴야 한다. 만약 오늘 일이 밖으로 새 나가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적천대의 임무가 가장 중요하니 실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실명인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모두 그런 실명인이 적응되지 않았다.

화령검객은 적천대를 이끌고 천연장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의문의 괴한들이 천연장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그들보다 더 뒤쪽에서 포위했지만 108도객들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빠르게 천연장을 포위했다.

지켜보고 있는 현진이와 진소려에게는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문파의 시스템이었다. 보통 다른 문파에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모두 함께 나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그냥 맡겨 달라는 소리에 군말 없이 맡겨 버리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뒷짐을 쥐고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

진소려는 수아에게 물어보았다.

"천연회의 모든 일은 이렇게 처리해요. 사실 천연회는 다른 문파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거든요. 언니도 아마 적응하려면 장금이에게 많이 배워야 할 거예요. 쟤들 보세요.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표정이잖아요."

수아는 이화와 혜련이를 가리켰다. 그녀들은 수아의 말대로 아직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금이는?"

회의를 할 때도 장금이가 보이자 않자, 진소려가 물었다.

"아마 소운이랑 함께 있을 거예요. 장금이는 천연회에서 하는 모든 일에 열외거든요. 참가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말고. 그냥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이 바로 장금이에요."

옆에서 듣고 있던 현진이는 궁금증이 생겼다. 얼마나 강한 존재들이기에 12명만으로 그들을 처리하려고 하는지…….

"카오스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올라가서 지원 사격을 준비해."

"그렇게 할게요."

카오스는 활을 들고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수금인은 자신도 함께 나가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비가 그들을 보낸 이유는 천을 잠시 그만두어야 하는 건과 현수 그리고 만사귀의 빈자리를 그들이 채울 수 있을까 해서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린다."

갑자기 나무 위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우와!"

은자림의 살수 즉, 멸천대가 의문의 괴한을 죽이는 것을 보고 놀라 카오스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밑에서는 악비가 궁금한지 카오스에게 물었다.

"장난이 아니에요. 사람 죽이는 데 촌각도 안 걸려요. 그리고 바로 옆에서 죽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진짜 은자림의 살수들은 알짜들이에요."

마치 나무 위에서 생중계를 하듯 자세하게 설명하는 카오스였다.

"오호!"

"왜?"

"108도객들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요?"

카오스의 말을 들은 악비는 순간 긴장했다. 그들이 싸움을 시작했다면 멸천대가 그들에게 들킨 것이고 괴한들이 포위를 풀고 도주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만약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다치게라도 한다면…….

악비는 카오스를 다그쳤다.

"사정거리가 가능하다면, 도주하는 놈들은 네가 잡아."

"아니, 그게 아니라 108도객들 중 몇 명이서 죽은 괴한들을 땅에 묻는데 진짜 빨리 묻어요."

악비는 내심 긴장했던 것이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는 카오스를 노려보았지만, 카오스는 악비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

"현수와 건이 없이, 저들만 있어도 성 하나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요."

현진이는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끝났어요."

카오스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실명인이 괴한 1명을 제압해서 천연장으로 돌아왔다.

실명인이 복면을 벗기자 그가 라마승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왜 라마승이 천연장을 포위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라마승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일까지 모든 것을 알아 놓겠습니다."

고문이라면 살수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의 수련 중에는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수련이 있었다. 고문이라면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들이기에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명인을 보는 현진이는 눈은 달라져 있었다.

수금인은 그런 현진이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널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냐?'

조금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수금인이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수금인이 혼자 남았다.

"오빠!"

현진이가 수금인을 불렀다. 수금인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나온 것이었다.

"돈이 그렇게 필요한 거니?"

"미안해요.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명진이를 잘 키우고 싶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유치원에도 보내고 장난감이나 맛있는 것도 먹여 가며 키우고 싶어요. 알아요, 오빠가 말하는 것처럼 회사에 다녀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이 하루 종일 명진이를 돌볼 수 없으니까요."

"휴! 그래, 알겠다. 돈이 필요하다면 방법을 가르쳐 줄게. 하지만 난 네가 나처럼 되는 것이 싫어."

"미안해요, 오빠."

수금인은 결국 현진이에게 게임을 해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수금인은 접속을 해제하고 집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자신이 현진이를 잊지 못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홀로 앉아 술을 마셨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나를 버린 거냐."

수금인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진이의 말을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래, 내가 채워 주마."

수금인은 결정을 한듯 술집에서 일어나 부모님을 찾아갔다.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있기에 떨어져 혼자 살고 있는 수금인은 부모님을 찾아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뜬금없는 죄송하다는 말에 수금인의 부모님은 걱정이 되는지 이유를 물었다.

"현진이를 만났습니다."

"잘 살더냐?"

수금인의 부모님도 현진이를 알고 있었다. 수금인과 만날 당시에는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수금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아들과 부모님을 모시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런……!"

수금인의 부모님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가?"

"현진이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쿵!

수금인의 부모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현진이의 사정을 들었을 때는 정말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아들과 관련이 되니 또 달랐다.

자신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자식이 있는 여자와 결혼을 한단 말인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된다."

"죄송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수금인의 부모님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형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수금인은 이미 결정을 했는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코 현진이의 처지가 불쌍하다고 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기를 원하신다면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집이 강하기로 소문난 최 씨 집안이다. 수금인 역시 고집이 상당히 강했다. 이제껏 자신이 주장한 일에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수금인이다.

"너…… 너, 그게 지금 자식이 부모에게 할 말이냐?"

"죄송합니다."

"도대체 넌 어떻게……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네가 뭐가 부족해서……. 허락할 수 없다. 오냐, 네 말대로 내가 죽거든 현진이와 결혼해서 살아라."

수금인의 아버지 역시 이번만은 수금인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집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수금인의 아버지였다.

"너, 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형은 아무 말 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현진이와 결혼식을 올리겠습니다."

짝!

수금인의 아버지는 참다못해 수금인의 뺨을 때렸다.

"그년이 자기랑 살자고 너를 꼬드기더냐?"

아버지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수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 애비의 가슴에 못을 박아야 속이 시원하겠냐. 이 못난 놈아."

결국 수금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결코 이렇게까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님을 설득해서 현진이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렸다.

불효 중의 가장 큰 불효를 했다고 생각한 수금인이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믿을 뿐이었다.

"네놈은 이제 내 자식도 아니다. 당장 나가거라."

"여보!"

보다 못해 수금인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나가라 해도!"

수금인은 일어나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건강하십시오."

"이놈아."

"명진아, 너 정말……!"

수금인의 아버지는 그런 수금인을 거부했다. 수금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고는 방을 나갔다.

수금인의 어머니는 그런 수금인을 따라나와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라며 수금인에게 사정했다.

형 역시 수금인의 어깨를 잡았다.

"가라고 해. 당신은 뭐 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 큰애도 들어오너라."

수금인의 아버지가 소리쳤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형! 미안해. 그리고 아버지랑 어머니를 부탁해."

수금인이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수금인은 집을 나와서 현진이에게 전화를 했다.

현진이를 만나 함께 살자고 이야기했다.

"돈을 벌고 싶다고 했지? 그럼 나와 함께 살자. 내가 책임질게."

뜬금없는 수금인의 말에 현진이가 되물었다.

"오빠, 무슨 말이야?"

"결혼식은 사정이 있어 올리지 못하겠지만……."

현진이는 수금인을 보고 화를 냈다.

"왜? 오빠도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야? 오빠가 함께 살자고 하면 내가 좋다고 그렇게 할 것 같아? 내가 노래방에 도우미로 일했다고 오빠도 날 헤픈 여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냔 말이야!"

현진이는 수금인의 말을 듣고 실망했다. 비록 자신이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이지만 이런 도움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수금인이 자신을 한낱 그런 여자로 보았다는 것이 서글펐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아야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수금인의 말을 듣는 현진이의 눈에 결국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너에게 함께 살자고 말한 것 같아? 아니야, 널 사귈 때부터 지금까지 널 우습게본 적은 없어. 내가 널 사랑하고 있었기에, 널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묻어 두었기에……. 지금, 지금에 와서야 그 묻어 둔 사랑을 너에게 말하는 거야. 그런 내가 잘못된 거니? 내가 그렇게 내 욕심만 채우는 사람으로 보였니? 아니야, 7년을 묻어 둔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게 내 욕심이니?"

현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욕심이면 난 그 욕심을 채우고 싶어.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현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수금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오빠는 충분히 그 욕심을 부릴 자격이 있어. 하지만 난 아니야. 난 오빠의 부모님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내가 모시고 있는 부모님이 용납하지 않을 거야."

"현진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야. 그러니 오늘 오빠가 했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할게."

현진은 몸을 돌렸다. 수금인은 돌아가는 현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현진이는 몸을 돌리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 오빠! 오빠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하지만 오빠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돼. 그래야 내가 오빠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간 것을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

현진이가 들어간 집을 보며 수금인은 두 주먹을 쥐었다.

'결코…… 난 이제 널 보내지 않아. 안 보고 7년을 기다렸어.'

이제부터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 수금인이었다.

수금인이 현진이와 만나고 있을 때, 악비는 실명인에게서 왜 라마승들이 천연장을 노렸는지에 대해 듣고 있었다.

'취라는 NPC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단 말이지.'

악비는 108도객과 은자림의 살수 그리고 취라면 충분히 현수와 건, 만사귀가 빠진 천연회를 꾸려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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